178.
“무슨 일이시죠?”
조연아는 살짝 당황한 목소리였다.
설마 조연준이 자신에게 연락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표세인은 출발했나?
표세인이 언급되자 조연아는 살짝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표세인이 조연준과 임시 동맹 같은 것을 맺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크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표세인은 이전부터 그들 가족이 잃었던 화목함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제임스 가족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물론 제임스라면 몰라도 조연준과 에머리까지 그렇게 일이 잘 풀릴지는 모른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거기까지는 무리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상대는 표세인이다.
그라면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는 기적도 실현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지금 막 출발했어.”
-······그렇군. 이거 내가 한발 늦은 모양이군.
“?”
-뭐 출발해버렸으니 할 수 없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괜한 오해할 필요는 없어. 이번 일에 나는 아무런 꿍꿍이도 없어.
라는 것은 결국 다른 일이라면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다. 역시 신용할 수 없는 상대다.
-아무튼 늦어버렸으니, 할 수 없군. 나중에 그들에게 조심하라고나 전해줘. 생각해보면 어차피 이 시점에 중국행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
“대체 지금 무슨!”
-그럼 이만.
자신의 할말만 하고서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조연아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조연준이 굳이 자신의 속이나 긁어 보겠다고 연락을 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럴땐 결국 양실장님 뿐이네.”
김비서도 우수한 인재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양실장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양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조연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뭔가 찜찜한 내용이었어요.”
자신 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모호한 대화. 조연아는 그것을 소상히 전달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중국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이미 하늘에 있는 비행기를 되돌릴 수도 없다.
더욱이 이번 미팅은 꽌시를 새롭게 다지는 중요한 자리.
맥베스 측에서는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는 일인 것.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름 아닌, 아버지와 남자친구의 안위가 걸린 일이다.
조연아는 살짝 조급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표세인 팀장이라면 전쟁터에 던져놔도 무사히 생환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물론 훈장도 몇 개쯤 건져오겠지요.
“네. 그러길 바랄뿐입니다.”
그렇게 양실장과의 통화까지 끝났다.
“하아, 회장딸······. 별거 없네.”
아직 정식 부회장 취임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회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이 회사 경영 전반을 컨트롤하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무력감이라니······. 새삼 자신이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무사히 돌아오겠지.”
조연아는 탁트인 창밖을 바라보며 씁쓸이 중얼거렸다.
*
*
*
“그러고보니, 중국은 처음인가?”
“중국이 처음인 것이 아니라, 비행기 자체를 지난번 미국행 때 처음 타봤습니다.”
“그래? 가만 그때도 퍼스트 클래스였지?”
“네.”
나는 조회장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퍼스트였어?”
“네. 뭐 어쩌다보니.”
“······누가 보면 금수저라고 생각하겠구만.”
“그러네요. 은근 곱게자란 남자?”
이번에는 홍켓몬까지 한입 거들었다.
“너도 부잣집 아들이잖아.”
“저도 퍼스트는 여기와서나 처음 경험했는 데요?”
“그, 그러냐? 하지만 회장님은······.”
“내가 날 때부터 이 회사 들고 태어났겠냐? 우리 부모님 제천 구석에서 밭농사하셨다.”
“······.”
뭔가 엄청 억울한데······.
“그보다 그쪽 일은 뭐······. 어떻게 계획 좀 세우셨나?”
조회장이 슬쩍 나와 홍기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지난번부터 계속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뭔가······. 얄밉다.
이정도 연배에 이런 얄미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가만 보면, 조연준이 가장 조회장과 닮은 것이 아닐까 싶다.
혹시 제임스와 연아는 다른데, 자기만 조회장님 닮았다고 삐져서 인성이 뒤틀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난다.
“뭔가 그 표정 거슬리는데?”
“네, 저건 딱 불손한 생각을 하는 표정입니다. 징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똑똑하구만.”
“현재까진 국내 유일의 표세인 기능장 보유자 홍기도입니다. 앞으로도 이 방면으로 조언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저 놈 약점이 뭔가?”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 같이 찌르기가 어려워서 문제지요.”
“한번 들어나 보지.”
“최대 약점은 환상종.”
“환상종이 뭐야?”
“상상연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꼭꼭 숨기고 있는 탓에 표팀장 애인은 환상종이라고 통합니다.”
“허허, 환상종. 그거 재미있구만.”
아······.
아버지 앞에서 딸을 환상종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모르겠다.
이 시점에 내가 나서면 일만 더 커질 뿐이다.
다행히도 나를 향한 조회장의 눈빛에는 그래도 잘 숨기고 있구만. 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일종의 대견함 같은 것이 살짝 섞여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랄까?
“두 번째는 뭔가?”
“두 번째는 선수 생활 은퇴 관련 이슈를 언급하면 훅 약해집니다. 술이라도 걸친 상황에서 그 주제가 나오면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내심 아쉽다 이거로군.”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름 일평생 운동했었는데, 그래도 올림픽 한 번은 나가보고 싶었겠죠.”
“그러고 보니 딱히 술 한잔 한적은 없구만. 이번에 한잔 하지.”
“네?”
“뭘 그렇게 놀라나? 우리가 술잔 한번 못 나눌 사이인가?”
그, 그건 아니지요.
그러고 보니 전에는 사위 될 사람 만취시켜서 술버릇 체크하는 레퍼토리가 튀어나올까 봐 살짝 걱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조회장도 크게 술을 즐기지 않는 타입이라 딱히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마땅히 응해야지요.”
회장에 장인에······.
어차피 거절할 방법 따위는 없다. 그런데 이거 계속 할 건가?
“좋아. 좋아. 그럼 다음은?”
“마지막으로······. 최대 약점은······. 저죠.”
“자네라고?”
“너라고?”
이건 나까지 놀라버렸다.
“후훗,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하극상 클럽의 수장인 저야말로 표세인의 수를 낱낱이 꿰고 있으며 언젠가 그를 뛰어넘은 실적을······.”
“임마. 표세인은 반말이잖아.”
“악! 회장님 앞이잖아요.”
아, 그러네. 너무 본능적으로 꿀밤이 날아갔다. 요즘 이 녀석에게 벼르는 점들이 너무 많아서 무의식에게 내 손의 제어 권한을 뺏겨 버렸다.
“그럼 표팀장이라고 하던지.”
“이런 대목은 이름을 불러야 맛이 살죠.”
“그건 그렇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다. 어차피 때렸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기도 하고.
“양실장에게 듣기는 했는데, 자네들 정말 귀엽게 노는 구만.”
“면목 없습니다.”
“아니야. 보기 좋아. 이렇게 즐겁게 시시덕거리면서 일해주면 나야 고맙지. 어차피 회사생활 힘든 거야.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네만.”
“회장님, 직원생활 안해보시지 않았어요?”
“······.”
그걸 기어코 찌르는구나. 나도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무서운 놈.
“흠흠, 어쨌든 그 하극상 클럽이라는 것은 뭔가? 뭐하는 거야?”
“목적은 간단합니다. 표세인을 뛰어넘는, 표세인 조차 감탄할만한, 표세인도 백기를 들 수 밖에 없는 실적을 이뤄내는 것!”
“오오, 좋구만 좋아!”
뭐랄까, 내 귀에는 조금 병신 같이 들리는데······. 회장님은 퍽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았다.
“표세인이를 뛰어넘는 성과······. 그거 아주 좋은 기획이야. 훌륭해.”
“딱히 칭찬 들으려고 생각한 것 아니니, 칭찬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저희의 지극히 개인적인 자아실현이니까요.”
나 항복시키는 것이 니들 자아실현 목표냐? 누가 들으면 내가 어디 성 쌓고 들어 앉은 대마왕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런데 칭찬이 필요 없다니······.
이 녀석 언제 한번 정신 교육 좀 시켜야 할까.
이제 슬슬 내 곁에서 높은 분들 만날 기회도 있을 텐데······.
조회장님이야 워낙 캐릭터가 캐릭터라서 별일 없어도 이러다 한번 큰일 나는 것 아닐까?
“그거 아주 좋아. 나중에 따로 한 번 이야기 하지. 내가 뭔가 아이디어가 생각났어.”
“오오, 물주님 아이디어는 언제나 환영······. 악!”
“회장님한테 물주가 뭐냐.”
“이거 사적인 대화잖아요.”
“출장이니 공적인 자리지.”
“비행기 도착도 안했어요. 사적인 자리죠!”
어쭈 이 시점에 댐벼?
쉬린칭건 수습도 안됐는데?
“사적인 자리라 치고, 판호건 끝나면 숨돌릴겸······. 인디게임 경연 한번 어떻겠나?”
“이, 인디게임 경연?”
뭐, 뭐지······.
이거 재밌어 보이잖아?
“1등은 수익의 절반을 포상으로 받고, 2등은 3분의 1, 3등은 특별 상여금? 뭐 이 정도면 다들 흥이 나지 않겠나?”
“오오! 역시 개발 원탑 조양길!”
사적인 자리라는 선언이 떨어지니, 심지어는 회장님 성함까지 튀어 나온다.
그런데 지금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멤버는 어떻게 할까요?”
“원하는 참가자들 뽑아서 팀을 구성해보라고 하는 거지.”
“요즘 인디게임들 시장성 괜찮죠. 다들 의욕과 아이디어들이 넘쳐날 겁니다.”
“그래. 그래. 재미있겠어. 나도 오랜만에 개발 한번 해보고 싶군.”
조회장은 직원들이 즐거워할 거라는 것 보다도, 본인 자신부터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흥이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좋은 기획이다. 직급에 관계없이 주도적으로 파트를 이끌거나 주도하는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맨파워 점검이란 의미만으로도 무척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크흐흐흐. 우리는 무조건 다른 팀입니다.”
“미안한데 솔직히 너는 딱히 내 안중에 없다.”
“나 함송희 찜!”
“이런 것은 제비뽑기나,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회장님, 시드권 같은 거 정해주세요! 생태계 파괴종인 표세인에게는 제약이 필요합니다.”
“그건 그렇지. 옳지 시드 배정 받은 사람들은 팀원 선정 마지막에 하는 것으로 하지.”
“회, 회장님?”
“뭘 당황하나. 자네 정도면 시드 배정 같은 패널티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게 아니라. 제가 그 정도면 회장님은······.”
일개 팀장, 아니 백보 양보해서 외부스튜디오 대표에게 시드권 패널티라면······.
회장 패널티는 뭘까?
게다가 애초에 회장 제안이나, 회장과 붙어서 이겨 먹을 미친놈이 나나 홍켓몬 말고 얼마나 더 있겠나?
“나는 이미 현역이 아니니까, 어드벤티지 받아도 되지. 그래. 함송희란 친구가 유능하다 이거지?”
와······. 이렇게도 양보 없는 페어플레이 정신이라니!
어쩐지 자식들 어릴 적에도 이렇게 양보 없이 이겨 먹으면서 놀아줬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음······. 그런데 그렇게 손 놓고 인재 전부 빼앗기면 안되는데.
설마 문이사에게 코딩 시키고 양실장에게 데이터 테이블(엑셀 파일) 관리 맡겨야 하는 것 아냐?
“함전무도 예전에는 코딩 마스터라고 불리던 녀석이다. 이상무는 의외로 도트도 잘 찍어. 뭐 나만큼은 아니지만······.”
“하, 함전무님과 이상무님께 코딩 요청하기는 좀······.”
우리 인간적으로 거기까지는 가지 말죠.
그런데, 진짜 그 레벨 아래로 싹다 씨가 말라버리면······.
“회장님이 함송희 가져가면, 저는 한팀장님!”
“적당히 해라 진짜······.”
아······. 왜 나는 이런 별것 아닌 것을 지고 싶지가 않을까.
정말 이기고 싶다.
< 팝콘 또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