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두 시간 남짓한 비행시간을 끝으로 우리는 상하이 푸동공항에 도착했다.
“환영합니다. 쉬린칭입니다.”
살짝 작은 키에 큰 안경테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창한 한국어다.
하비도 한국어가 가능했지만 어디까지나 다소 어눌한 외국인 딕션이란 느낌이었는데, 쉬린칭은 거의 네이티브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반갑습니다. 조양길이오.”
쉬린칭은 가장 먼저 조회장에게 악수를 청하고 뒤이어 내 앞에 섰다.
내 키도 키다 보니, 나와 쉬린칭은 키 차이가 상당했다.
“개발자라기 보다는 모델 같은 느낌이시네요.”
시작부터 외모를 칭찬이라, 살짝 치켜뜬 눈매에 이성의 외모에 대한 열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앞에 붙은 개발자라기 보다는이라는 표현이 살짝 밟힌다.
“부국장님도 무척 미인이십니다. 예상과는 좀 다르네요.”
“예상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아하, 이런 타입이구나. 이렇게 하나씩 코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상대의 대응 방식을 끌어내는 타입.
이렇게 얻은 정보들을 자신만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여, 커뮤니케이션의 기조를 잡아내는 것이 이 사람의 방식인 모양.
이런 타입에게는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의외로 소탈하게 속내를 드러내주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질문에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 때로는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지만, 정작 이런 사람들은 본인에게는 악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손꼽히는 입지를 지닌 성공한 여성. 그런 여성이 젊고 아리따운 외견을 갖추고 계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외라는 인상을 느끼게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의견이 아닌 다수의 의견이다?”
“저는 개발자니까요. 우리는 다수 고객들의 시선에 맞춰 움직이는 것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부 한정 타겟을 공략하는 게임들도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다수의 게이머를 공략하는 것을 기조로 움직이는 것이 기본 아닌가.
“그렇군요. 그것이 표세인 팀장님의 아이덴티티로군요.”
나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리고······.”
슬쩍 쉬린칭의 시선이 홍기도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도 조회장도 내심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그녀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서 꽌시 인수인계라는 큰 틀이 휘청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쉬린칭 공략에 큰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안녕하십니까! 맥베스의 홍기도 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윽!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의 고함을 내지르는 것 같은 인사와 함께 홍기도는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그러자 쉬린칭은 악수를 하려던 것인지, 어설프게 내밀었던 손을 난처하게 거둬들였다.
“그렇군요. 홍기도 ‘과장’이시군요.”
“옙! 홍기도 ‘과장’입니다. 이번 출장은 그저 회장님과 팀장님의 ‘수발’을 들기 위해, 동행했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이 녀석이 연기를 못하는 타입도 아니니······.
이 거지 같은 발연기는 컨셉이란 건데. 과장 직함을 앞세우는 전략이라.
이건 PVP존에서 나 쪼렙이니 건들지 말아주세요.
혹은 자동차 뒷유리에 초보운전이라고 써붙이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게 먹힐까?
“우리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쳇.”
역시 안먹히는 구나.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혀를 차다니······.
“······느낌이 이건 네가 나설일이 아닌 것 같다.”
“너가 아니라, 우리 아닙니까?”
“진심이냐?”
“아닙니다.”
조회장은 정말로 이 일에는 손톱만큼도 관여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발을 들이게 하고 싶은데, 정작 나도 발빼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라서······.
“일단 가시죠.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우리는 쉬린칭이 대기시켜 놓은 리무진에 탑승했다.
“리무진은 처음이네요.”
“나도 처음이다.”
“회장님도 처음이시라고요?”
“뭘 그렇게 놀라? 한국에서 리무진 탈일이 뭐가 있어?”
“돈도 많으신데, 한 번쯤은 타보고 싶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
“위대한 대리기사라는 게임에서 몰아봤으니, 됐어.”
“그, 그렇군요. 뭐 저도 그러긴 했습니다만······.”
“저는 타본 적 있어요.”
“와, 이 금수저 자식! 회장님도 못 타보신 것을······. 뭐 어떤 일을 겪으면 이런 것을 타게 되냐?”
“쟤요.”
“뭐?”
“쟤가······.”
“아······.”
뭔가 괜히 물은 것 같다.
“기억하고 있네?”
“그럼 기억하지.”
이제는 이 둘 사이에 경어까지 사라졌다. 나와 조회장은 최대한 티 안 나게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나쁘게 기억하는 건가?”
“나쁠거 뭐있냐. 다같이 재미있게 놀았잖아. 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인 것을 싫어했지만.”
“그때는 나도 어려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설펐으니까.”
“지금도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여전하단 거구나.”
“그래. 가치 없는 사람들로 채워놓을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아서.”
“가치······.”
“너는 가치있는 사람이야.”
“네. 품평 따위엔 관심 없어.”
“······.”
순간 쉬린칭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나와 조회장도 동시에 손을 들어 입을 막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내버려 두긴 했는데, 이것도 니들 작전이냐?’
‘일단 각개전투로 가고 어시스트하려고는 했는데······. 와, 이거 각 안 나오네요.’
‘위험한데······. 뭔가 너무 사적이라 오히려 일에는 지장 없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게다가 우리가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관람에 집중하시죠. 샴페인이라도 한잔 드릴까요?’
‘대낮부터 술을?’
‘콜라랑 팝콘이 있으면 좋겠는데······.’
‘줘봐.’
나는 샴페인을 잡았다. 설마 허락받고 마셔야 하나 싶어서, 쉬린칭 곁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여비서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그래.”
조회장님 잔을 채우자, 홍켓몬도 잔을 내밀었다.
“표세인 팀장님은 어떤 사람이지?”
쉬린칭이 뜬금없이 내 이름을 언급했다. 나는 순간 샴페인 병을 든 채로 굳었다가,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내 잔도 마저 채웠다.
“네 품평 기준으로는 가격도 못 매길 정도의 사람이지.”
“······너무 얕보는 것 아닌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홍켓몬의 진지모드는 나도 몇 번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보다, 저기요? 저 여기 있거든요? 낯부끄러우니까, 본인들 이야기에 집중해 주시죠.
“짧은 시간 내에 굉장한 성과를 냈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보다 더 젊고 더 큰 성과를 이룩한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네가 별것 없다는 거야.”
“?”
“결과 보고 판단하는 것이야, 누가 못하나? 여기 계신 조회장님은 표세인 팀장을 첫눈에 알아보고 바로 지원에 나서셨어. 너도 나도 아직 애송이야. 그걸 모르면······. 너도 정말 멀었다.”
홍켓몬의 말에 쉬린칭은 이번에도 무거운 침묵만 흘릴 뿐이었다.
‘이거 점점 듣고있기 괴로워지는 구만. 네 말대로 샴페인이라도 홀짝거리지 않으면 더 힘들뻔했어.’
‘네. 그러게요.’
우리가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사이, 리무진은 호텔앞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어이고, 내리자. 내리자.”
조회장님은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헐레벌떡 리무진 밖으로 탈출하셨다. 누가 보면 화장실이라도 급한 건가? 하고 착각할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나 역시 그 뒤를 쫓아 쌩하고 탈출했기에 비웃을 여유 따윈 없었다.
“후우하~ 공기는 별론데, 마음이 후련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구만.”
나와 조회장은 호텔 정문 앞에서 두팔벌려 공기를 들이마시며 해방감을 만끽했다.
“식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우선 올라가시죠.”
“······그렇군. 끝이 아니었군.”
뭔가 굉장히 밀도 있는 시간이었는데, 저거 전부 이번 일과는 1도 관계없는 사담들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일을 시작도 안 했는데, 쉬고 싶단 생각이 들다니······. 나도 많이 물러졌구나.
식사는 의외로 레스토랑이 아닌, 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 즉 이들이 준비한 우리의 숙소에 마련이 되어 있었다.
“팀장님.”
홍기도가 슬쩍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왜?”
“아까 일. 쉬린칭은 사과 같은 것 하지 않을 거에요.”
“사과?”
“다른 사람 배제하고 저와 단 둘이서만 대화한 것이요.”
확실히.
꼼꼼히 따져보자면 실례이며, 결례다. 워낙 특이한 상황이라서 멍하니 있기는 했는데 분명 비즈니스적인 상황에서는 있기 힘은 일이었다.
“이게 중국인들 특성입니다. 이건 그들에게 무례가 아니에요. 일반 식당 같은 곳에 가도, 종업원들이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대화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군. 문화의 차이라는 거군.”
“예. 그러니 이런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저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고맙다. 그보다 괜찮은거냐?”
“뭐가요?”
“일부러 툭툭 시비 걸고······. 게다가 과하게 나와 회장님까지 들먹이며 속을 긁던데.”
“네. 쟤 머릿속에 박아 놓으려고요. 오늘의 메인 게스트가 제가 아니라는 것을요.”
“오케이. 동조한다. 나와 회장님은 오늘 이 자리에서는 숨만 쉴거다.”
전에도 그렇지만, 이따금 뾰족한 작전이 없을 때가 있다. 혹은 공유가 안 되거나.
이럴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독자노선을 취하고 발빠르게 상대 움직임에 호응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느 정도는 홍기도의 움직임에 맞춰서 일부러 숨을 죽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치정 싸움에 발들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진심이지만.
“회장님은 괜찮으실까요? 불쾌해하실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
홍켓몬의 진지모드에는 나도 적응이 안된다. 이녀석이 조회장까지 신경쓸 줄이야.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이다. 게다가 본인 기질 자체가 눈치도 남다르신 분이고.”
“역시······.”
“그래. 역시니까. 그 이상은 말하지 말자.”
“네. 아무튼 저는 일단 제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오케이.”
나와 홍기도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이 시점에 내 포지션은 당연히 조회장의 옆자리니까.
“둘이서 잘 이야기 했나?”
“네.”
“나름은 작전대로 흘러가는 거지? 진짜 정신나가서 치정극 찍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네. 저는 쉬린칭도 그건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런 것 같더군. 가끔 그래. 중국인들이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이 뭔줄 아나?”
“뭡니까?”
“상대를 속이는 술수. 이것은 순수 책략이라고 칭송하는 경향이 있지. 그래서 성공하면 감탄하지 손가락질하지 않아.”
“오랜 옛날부터 책략으로 적들을 획책해온 나라다운 문화라는 겁니까?”
“맞아. 그에 비해 우리는 정면으로 깨부수는 맹장형 장수들을 선호하는 기질이 강하지. 사실 팩트로만 놓고 보면 이순신 장군도 알렉산더 못지않은 맹장이거든. 자꾸 어설프게 지장이나 덕장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나는 마음에 안 들어.”
“13척으로 300척이 넘는 함대를 정면승부로 깨부수려는 것 자체가 상식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죠.”
“그런데 중국은 그 반대지.”
“반대라는 말씀은?”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보다 많은 병사를 보유한 나라 따위는 없었지. 그런데도 그들은 항상 이간, 기만 등의 술책으로 적들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지. 뭐 그게 효율적이니까.”
조회장은 말을 멈추고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군다나, 근래 중국은 더 많은 것들을 욕심내고 있지. 우리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야. 그들과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해.”
“그렇군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겠어요.”
꽌시는 대등한 관계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주면, 우리도 그들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
저들이 말하는 의리라는 것은 한국의 정 같은 개념이 아닌, 다소 계산적인 관계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관계를 중심으로 도움을 주고, 안준다는 생각 자체가 형평성과 청렴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다.
“내심 진짜로 홍과장 의중을 떠보려는 속셈도 있지만, 그 와중에 틈틈이 우리 반응도 염탐하고 있다는 느낌이더군.”
“확실히 우리쪽에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편하지.”
“맞는 말씀입니다.”
끌려가는 느낌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차였다.
만약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흐름을 우리 쪽으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비서의 말에 따라 우리는 테이블에 착석했다.
“우선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실 안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궁금해할 안건. 그래. 꽌시의 인수인계.
“함전무님은 좋은 파트너였습니다. 세월은 무상한 법이지요. 은퇴로 인한 인수인계. 더군다나 조회장님까지 이렇게 성의를 보이셨으니, 제가 두 팔 걷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 말씀은?”
조회장이 슬쩍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염려 놓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거 든든하군.”
라고 말하는 조회장의 눈빛에 안도의 기색 따위는 없었다.
이제 본론이 나올 차례.
이것을 듣기 전에 자신을 믿으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중국 정부가 게임을 정신적 마약으로 규제한 이래, 중국 게임 시장의 성장세는 정체상황입니다.”
“······그렇습니까?”
갑자기 정부 레벨의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정부의 검열 의지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진 현재 제가 속한 국가광파전총국은 4개의 부서로 나누어져,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흠······.”
“그렇군요.”
중국 사정에 밝지 않은 우리로서는 그저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
“현재 각 부처의 국장들이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디에 배팅을 해야할지 고민 중이지요.”
“······라는 말씀은······.”
“제 선택을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중국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저희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제 나름의 기대일 뿐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지금 엄청난 기회 아닌가?
< 이거 진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