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의학의 발달로 인간 사회는 수많은 질병을 극복해 가고 있으나, 여전히 스페인 독감을 시작으로 홍콩 독감이나, 신종 플루와 같은 범유행전염병들의 등장은 끊이질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스와 메르스 같은 비교적 최근에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질병들도 있었다.
비누가 인류의 평균 수명 증가에 지대한 역할을 했듯이 우리는 이럴 때마다 위생과 방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자, 이거 쓰시고, 손 소독도 하십시오.”
“너무 호들갑인 것 아닌가?”
마스크를 건네는 나를 향해 조회장은 살짝 난처한 표정이었다.
“회장님.”
“응?”
“이럴 때는 아무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어?”
“그냥 하는 겁니다.”
운동선수로 자란 사람들은 마초적이고 호탕한 성격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래서 건강하니까, 난 이런 것 필요 없어! 라는 타입은······.
솔직히 말하자면 엘리트 체육인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냥 취미반 수준?
자신의 몸이 재산임을 알고 컨디션 유지에 만전을 기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체득해온 엘리트 체육인들은 옆에서 기침 소리만 들려도 입부터 가리는 법을 배우기 마련이다.
“손 비비시고요.”
조회장에게 마스크를 씌우고서 나는 그의 손에 손소독제를 뿌렸다.
“그런데 우리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잖나.”
“쉬린칭의 비서가 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안에 있더라도 그녀가 밖에서 병원균을 대동하고 들어올 수도 있다.
“자네는 이런 것쯤 끄떡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짓이 병 앞에서 까부는 겁니다. 체격과 면역력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감기에 걸려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한 것이 몇 번이던가? 하물며 대개 위험한 질병들은 때로는 생명도 위험하다.
무엇보다 조회장은 나이도 나이지만······.
“제 여자친구의 아버님이십니다. 귀찮더라도 따라주세요.”
“흐흠, 그놈 참······.”
아버님이라는 단어에 또 조회장이 슬쩍 눈을 돌리면서도 열심히 손소독제를 비볐다.
“왔습니다.”
마침 로비로 마중을 나갔던 홍기도가 쉬린칭의 비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자, 너도 손 소독 한 번 더하자.”
“네.”
가정교육의 영향일까?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겁이 많을걸까?
홍기도는 이런 점에서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비서님도 마스크 착용하시고 손 소독하시죠.”
“······.”
“뭐하세요. 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처음에는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일단 순순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소독제를 이용했다.
“지금 유행병 전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것을 어떻게?”
비서가 살짝 당황했다.
어? 이걸 곧이곧대로 드러낸다고? 뭐지?
쉬린칭은 4차원적이기는 해도, 나이에 맞지 않게 노련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수행하는 비서는 너무 순박하다?
“일단 알고 계셨다면 더욱 주의를 하셔야죠.”
“하지만 아직 정확히 어떤 수준인지는 모릅니다.”
“일단 이럴때는 조심하고 보는 겁니다.”
“음······. 글쎄요. 혹시 국장들과의 미팅에서도 이 행동을 유지하실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 있죠. 하지만 이런건 아다르고 어다른 법입니다.”
“네?”
내 말에 비서가 살짝 당황했다.
“우리가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유는 우리의 안전 보다 상대의 안전을 위해 배려하는 것임을 밝힌다면 이해해 줄 겁니다.”
“그럼에도 상대가 언짢아한다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하지요. 선별에도 도움이 될테고요.”
“이해가 잘 안되는 군요.”
역시 아직 멀었다. 뭐지? 이 특유의 순박함은?
비서라고 한다면 양실장이나, 김비서 같은 눈치 빠르고 수싸움에 능한 인재들만 접해서 그런지,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다.
물론 쉬린칭 정도되는 인물의 비서니까 스펙이야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지금도 통역 조차 없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뭐랄까······. 묘하게 이 부분이 거슬린다.
정말로 쉬린칭의 비서가 맞나?
“그 부분은 나중에 지켜보시면 알게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우선은 본론으로 넘어가죠.”
“알겠습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쉬무빙이고 아시는 대로 쉬린칭 부국장님의 개인 비서입니다.”
“서씨?”
내가 되묻자, 쉬무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쉬린칭의 사촌동생입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아직 덜 숙성된 인재라는 느낌이었는데, 친족이라면 이해가 간다.
이쪽도 뭔가 배움을 위해 비서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쉬린칭의 친족이라면 쉬무빙의 집안도 보통은 아닐테니까?
“어쨌든 요청하신 자료들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방문했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지요.”
우리는 쉬무빙이 건네준 자료를 훑어보며 자리에 앉았다.
“우선 총국의 바이젠과 판권국의 리타오텐. 이 두사람이 후보자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네.”
“현재 가장 문제인 것은 두 사람의 이력이나 영향력 면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저울에서 쉬린칭의 선택이 가장 무거운 추라는 것이 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택하지 않은 쪽은 반드시 원한을 품겠지요.”
권력다툼에서 밀려난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는 것은 아닐터.
쉬린칭에게도 상대의 원한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이 선택의 무게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제 느낌상. 쉬린칭은 저희의 의견을 100% 그대로 적용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저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번에도 쉬무빙은 순순히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쩌면 쉬무빙 혼자 이곳에 보낸 것 자체가, 쉬린칭이 우리에게 자신의 솔직함을 여과없이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느낌이다.
“부국장님께서는 이따금 모호한 이야기를 하곤 하십니다. 애초에 본인께서도 상당히 직감에 의존해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시기도 하고요.”
직감에 의존하는 타입. 그렇군. 확실히 이런 계통이라면 홍기도와는 궁합이 좋을 수 밖에 없겠네.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이 문제지만······.
“지난번에는 난데 없이 하늘을 움직인다거나 하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솔직히 평소에도 이따금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이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하늘? 하늘을 움직인다고요?”
“네. 정확히는 또 한 번 하늘을 움직일 수 을지······라고 하셨습니다.”
“진짜 별 소리를 다하네.”
듣다 못한 홍기도가 혀를 내둘렀다.
“그렇군요. 하늘······. 확실히 이 녀석이 운이 좋은 편이죠.”
“팀장님이 아니고요?”
“내가 운이 좋았다면 그 많은 야근 크리를 감당하지 않았겠지. 넌 운좋게 항상 빠져나갈 일이 생겼잖아?”
“흠······.”
홍기도는 입을 앙다물고는 나와 조회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요놈 불안하네······. 그런 눈빛 좋지 않아.
다행히 홍기도의 반응은 그것이 끝이었다.
“어쨌든 이해했습니다. 선택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운이라는 요소가 중요하죠.”
“그건 저도 이해합니다만, 그렇게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것도······.”
“클클, 우리 비서님은 좀 더 많이 배우셔야 겠군.”
“네?”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조회장이 클클 웃음을 흘렸다.
“모바일 시장이 열렸을 때, 그런 엄청난 대운을 앞에 두고 오판한 이들은 적지 않았지.”
“운이란건 의외로 모두의 주변에 널려있는 법이야. 그런데 사람마다 그 운에 접근하는 방법과 횟수가 눈에 띄게 차이나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
이번에는 조회장이 나와 홍기도를 슬쩍 바라보았다.
“확률이니, 통계니 아무리 떠들어봤자 동전 던지기 이상의 확률을 뽑아내는 것도 아니지. 그리고 운이 좋은 녀석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운을 이용할 줄 아는 녀석들이거든. 결국 운이 좋다는 것은 결과론에 불과하다는 거야.”
“······그렇군요. 그렇게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부국장님도 이렇게 설명해 주는 타입이라면 좋을 텐데.”
“끌끌, 쉬린칭도 아직 젊지.”
확실히 연륜이라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 무섭다.
조회장 특유의 시선 곳곳에서는 경험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결국 인간이란 경험이라는 토대를 기반으로 인격과 사고의 방향성이 정해지는 것이다.
“일단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드리자면 모든 면에서 비슷한 실적을 지닌 이들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바이젠은 뭐랄까, 굉장히 호탕한 인물입니다. 반면 리타오텐은 조용하고 매사 심사숙고하는 타입이죠. 그렇기에 강점과 약점이 극명하게 나뉩니다.”
실적과 영향력은 비슷하지만 지닌 바 성향은 천양지차라는 건가?
마치 양실장과 문이사가 떠오른다. 물론 그들은 실적과 영향력의 종류도 확연히 다르지만.
“그런데 상황상 바이젠이 직속 상사아닙니까?”
“맞습니다.”
총국 소속의 국장과 부국장이란 것이 바이젠과 쉬린칭의 관계다. 그런데도 리타오텐과 동등하게 저울에 올려놓은 상황.
“바이젠을 선택하면 득이 적은 대신, 선택하지 않으면 후환도 만만치 않다는 느낌인가요?”
“아무래도 직계 라인이니까요. 하지만 후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국, 그들 중, 로비와 정치력을 동원해 국가광파전시총국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는지가 관건이죠.”
후환은 신경쓰지 말고, 결국 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인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이 시국······.”
“의외로 각 나왔네요.”
“그치?”
“클클, 그래. 이건 나도 알겠구나. 이제 나도 네놈들 속을 좀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군.”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여러분도 딱히 부국장님과 다를 것도 없네요.”
자신만 이해 못 하는 상황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쉬무빙이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굳이 우리가 쉬린칭의 비서 교육까지 담당할 필요는 없다.
“그들과의 만남은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현재 몸이 달아오른 것은 그들 쪽이니까요?”
쉬린칭의 영향력이 대체 어느 정도기에, 국장인 그들이 부국장의 부름을 애타게 기다린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의문을 풀렸다. 어째서 쉬린칭이 이런 중대한 결정을 우리에게 부탁했는지, 그리고 우리의 의견을 100% 따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우리가 칼이었군요.”
“그래, 차도살인이란 게지.”
“차도살인?”
여전히 쉬무빙은 나와 조회장의 대화를 쫓아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떨어져서 이 상황을 바라보면 쉬운 문제인데, 아직 그 정도로 노련하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비슷한 후보.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면 결국 상대는 앙심을 품기 마련이죠.”
“네. 그거야 당연······.”
“그러니, 제 삼자가 필요한 것이지요.”
“아!”
“거기에 더해 실제로도 뒷일에 대한 예측이 안 되니, 하늘에 비는 심정으로 동전을 던져본다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똑똑하고 날카로운 수다. 정작 말로는 하늘 운운하는 소리를 해놓고서는, 실제로는 자신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판을 짜 놓았다.
아마도 내일 우리가 바이젠과 리타오텐을 만나는 자리에서 본인은 한걸음 물러난 스탠스로 이득만 취할 셈이리라······.
이걸 어쩐다.
갑자기 장난기가 좀 발동하는데?
< 이 판 그냥 깨버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