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84화 (184/346)

184.

“처음부터 쉬린칭은 그걸 바란 게지.”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 조회장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애초에 그녀의 선택으로 판이 바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너의 마지막 말까지가 그 친구의 테스트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저도 살짝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판호 발급을 쥐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게임에게 판호를 발급하는냐.

그리고 그 게임의 성공 가능성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성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생각.

거기에 그녀는 다름 아닌 카이두의 대주주다.

다른 이들이야, 단순히 공무원 정신으로 판호를 대하거나, 자신들 뒷주머니 생각에 열을 올릴 수도 있지만, 그녀는 경우가 다르다.

게다가 실제로 만나본 국장급 인사들은 급이 좀 많이 떨어진다는 인상.

“사람을 보는 눈과 시류를 읽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고방식까지.”

“어쩌면 하늘 운운했던 것이······. 이번에는 그 하늘을 자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네요.”

“뭐 중의적인 표현이겠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

조회장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친구 혼자만 남겨두고 와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홍기도 과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친구를 향한 쉬린칭의 시선은······. 뭐랄까, 다소 복잡해 보여서 말이야. 행여 스카웃 제의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스카웃 제의라······.”

“나름 자네에게는 중요한 인재가 아닌가?”

“맞습니다.”

마침 홍기도 없으니, 이런 대목에서 장난칠 필요는 없지.

“그런데 조금도 긴장해 보이지 않는 군?”

“세상에는 일반적인 논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있기 마련이죠.”

“홍기도 과장이 그런 사람이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 녀석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감이 지나친 것 아닌가? 중국 속담에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않던가?”

뭐, 그 녀석이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도 아니니 중국 속담이 적용될 것 같지는 않고······.

“아무튼, 이번에 재미있었네. 자네들이 어떤 분위기로 일을 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었단 느낌이야.”

“항상 이렇게 장난스럽지는 않습니다.”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더 장난스러워도 상관없어. 애초에 일이 재미 없다는 인식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여러모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쨌든 대충 짐 정리도 끝났고, 전염병 이야기가 나도는 와중에 빨리 끝나서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된 중국 출장이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듯이, 전염병이란 말이 오가는 시점에  예상보다 빨리 귀국할 수 있어서 무척 안심이었다.

“자네도 자네지만, 그 친구는 무작정 발랄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 부분에서는 또 철저하더군.”

“안전제일이죠.”

나는 조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쉬린칭과 만나고 싶지 않다며, 중국 출장도 꺼리던 친구인데······. 여기 와서도 숨죽인 채로 언제 귀국하나~ 하고 눈치 보는 모습이 역력하더군. 그 친구가 여러모로 고생 많았지.”

“음······. 그것 말인데요.”

“?”

“어쩐지 그 놈이 빨리 귀국하고 싶은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드네요.”

“뭐 따로 짚이는 거라도 있나?”

아, 이게 그냥 트레이너의 감이라서 딱히 말로 설명은 못하겠는데······.

아마 그놈 다른 꿍꿍이 있다에 그냥 기둥소프트 걸 수 있을 것 같네요.

*

*

*

“그래서 용건이 뭐야?”

홍기도의 목소리에는 살짝 조급함이 베어있었다.

“너무 쌀쌀맞은 것 아니야? 오랜만에 얼굴 봤는데, 우리끼리는 따로 대화 정도는 나눠야지.”

“지금 시국이 시국이잖아.”

“원래 그렇게 건강에 신경쓰는 타입이었나?”

“우리 집 모르냐? 가족들 중에 감기 환자만 나와도 주가 휘청이는 집이야.”

건강보조제 기업의 오너 일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건강에 관련된 일이라면 홍기도 역시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나는 순수하게 반갑다고 하기는 좀 어렵네.”

“······무슨 의미지?”

“너 마지막까지 우리 테스트한거지?”

“음······.”

“처음부터 국장들 내칠 생각이었으면서, 우리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게다가 그 며칠간, 우리를 이용해 번 시간으로 무언가 뒷공작을 했겠지.”

맥베스 일행에게 선택을 맡긴다는 핑계로 국장들의 움직임을 잠시 봉해 놓은 다음, 뒤에서 일을 꾸민다.

쉬린칭의 무서움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정말 너의 혜안은 두려울 정도야.”

“운 좋은 줄 알아.”

“운?”

“만약 표세인 팀장님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거나, 네가 조금만 실수 했어도 팀장님은 바로 널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셨을 거야.”

“표세인 팀장이라······.”

별다른 정보도 없었으면서 용케도 자신이 원하던 답을 정확하게 도출해낸 남자.

게다가 마지막에는 묘한 카리스마로 자신을 압박해 오기까지 했다.

중국 공산당의 내로라 하는 거인들 중에서도 그 정도 나이에 그만한 위압감일 지닌 사람은 몇 없었다.

상황을 따져봐도 자신이 갑이고 맥베스가 을인 입장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순간 면접에 나선 취업 준비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뜻에 따라 열심히 자신의 포부를 늘어 놓았다.

“그 사람 대체 뭐지? 조사한 바로는 운동선수 출신에 중소 개발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전부이던데?”

제왕학이라는 말이 서양권에서 넘어왔다지만, 실제로 관료주의의 역사가 긴 동양권이야말로, 후계자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쉬린칭 역시 외동딸로서 일찌감치 부모의 영향력을 이어받고 가문을 번성시키기 위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것이 지나쳐, 사람을 손익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고질병까지 생긴 상황.

그런데 그런 제왕학 따위와는 조금도 연이 없이 자란 남자의 시류를 판단하는 안목과 상대를 옭죄는 압박감이 이정도라니?

어린 시절부터 말투와 악센트까지도 철저하게 교정받고 자란 이들조차, 뒷배경을 걷어내면 별 볼 일 없는 본성이 드러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타고난 기질인 것이겠지.’

재능이라는 것은 비단 예체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즈니스 세계야 말로 결국 정점을 향한 과정에는 카리스마와 안목과 같은 재능의 요소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인물이 맥베스에 오기 전까지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일까?”

쉬린칭의 의문.

이것은 사실 양실장을 비롯한 표세인 주변인물들 역시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런 당연한 것을 몰라?”

“?”

“한국에는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말이 있어.”

“그것은 사람은 바뀌지 않는 다는 말일까?”

“그래. 하지만 난 그 말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해. 인간은 원래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그저 새로운 배역이 주어지지 않은 탓에 계속 한가지 배역에만 충실할 뿐인거야. 새로운 환경과 기회가 주어지면 누구든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물론 표세인의 숨겨진 자질이 다소 다른 이들보다 큰 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분은 홍기도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누구든 상황과 기회가 온다면 환골탈태 수준으로 변할 수 있다. 이것은 홍기도의 지론이자, 그의 경험담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환경의 변화이고, 그저 기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이건가?”

“그래. 물고기도 어디서 자라냐에 따라서, 갑자기 생태계 파괴종이 되기도 하잖아?”

그리고 아직 표세인의 진화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

‘요즘 슬슬 최종보스의 포스가 뿜어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완전체가 된 것은 아니다. 홍기도는 표세인의 현재 변화는 그저 과도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 그건 좀 정확하지 않은 비유인 것 같은데?”

갑자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오자 쉬린칭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실제로 홍기도는 지금 레스토랑 메뉴 중에 잉어 튀김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분명 생태계 파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저 메뉴를 보고 엉뚱하게 떠올린 것이란 의심이 든다.

“이거 맛있어 보이네.”

이런 괴상망측한 인물임에도 그 한마디, 한마디를 가볍게 치부할 수가 없다는 것이 우습다.

예측 불가.

이 단어가 마치 홍기도라는 인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것으로 가늠하는 도록 키워진 자신 앞에 홍기도라는 예측불가의 캐릭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는 거의 전율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었더랬다.

오랜 추억이건만, 아직도 그와 처음만났을 때의 놀람이 잊혀지지 않는다.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잠시 옛날 생각을 했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왜 표세인 팀장님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그쪽으로 튀지?”

“네가 중국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 나더군.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니까.”

이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부끄러움 한 점 없이 털어놓는 것이 쉬린칭이라는 인물의 특징 중 하나 였다.

“나에게도 좋은 추억이야. 물론 마지막은 네가 망쳐버렸지만.”

“사과하진 않겠어. 그 만큼 절실했으니까. 어린 날의 치기란 대개 그런거잖아?”

“그 이야기는 됐어. 딱히 지난일을 왈과왈부하고 싶지 않아. 그보다 어쨌든 네가 좋아하는 표현이잖아. 천지인.”

천지인.

운과 환경과 인간 관계.

“맥베스에 오면서 표세인이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던 감춰진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생긴 것 뿐이야. 대부분 이런 기회를 만날 때, 사람은 변해. 그러니 당장 마주하고 있는 상대의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버릇은 고치는 것이 좋아.”

“좋은 충고로군. 역시 오랜 벗이라는 것은 좋아.”

“······너 진짜 친구 없구나.”

오래전에 헤어진 남자친구를 오랜 벗이라고 표현하자, 천하의 홍기도 조차 황당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표세인······. 욕심이 나는데?”

“돈 말고 사람 잡는 재주 없는 너에게는 무리야. 게다가 본인이 티를 안내서 그렇지. 표세인 팀장님 지금 돈이 얼마나 많은 줄 알지?”

“그래. 깨비몬······. 정말 좋은 캐시카우지.”

쉬린칭은 못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이거야? 다른 것은 없어?”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 이 특유의 야박함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는 쉬린칭이었기에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졌다.

모두가 쉬린칭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녀의 곁에 머물기회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곁에 두고 싶었던, 지금도 욕심이 나는 홍기도라는 남자는 도무지 잡아 둘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승부욕과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지금 여자친구 없지?”

“······돌아가면 소개팅 할거야.”

“소개팅?”

“그래. 엄청 미인과의 소개팅이 준비되어 있어.”

홍기도는 양실장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지금 그것 때문에 빨리 귀국하지 못해 안달이었던 거야?”

“당연하지. 넌 지금 내 소개팅을 지연시키는 악의 무리에 불과해.”

“아, 악의 무리?”

터무니 없는 표현이 튀어나오자, 쉬린칭은 그녀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래서 어떤 사람인데? 어떤 가문의 여식이지?”

“가문 같은 소리하네. 애초에 소개팅 상대 가문이 무슨 상관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고로······.”

“그건 너 같은 사람이고.”

“아, 아니. 너와 나 말이야. 너희 집도 일반적인 집은 아니잖아?”

“우리 집은 그냥 미국에서 건강보조제 수입하다가 웰빙붐 타고 갑자기 로또 맞은 집에 불과해. 너희랑은 달라.”

미국에서 영양학을 전공하다 포기하고 건강보조제 수입을 시작했다.

그러다 운 좋게 웰빙붐에 편승했고, 지금은 헬스 붐까지 겹쳐서 하루아침에 부자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실제로 홍기도가 어린 시절에는 옷이 없어서 누나들 옷을 입고 다닌 적이 있을 정도였다.

쉬린칭의 가문처럼 몇 대에 걸쳐 부와 권력을 쌓은 뼈대 있는 집안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지?”

“훗, 그걸 물어본다······.”

······고 해도, 순순히 말하진 않겠지. 하고 쉬린칭이 생각한 순간.

“······면, 말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이것봐라~”

홍기도는 냉큼 스마트폰을 꺼내, 양실장과 그의 동생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가족들이 하나 같이 훈훈하지? 이쁘지? 그치? 내가 양실장님 얼굴보고 바로 계산 끝냈다는 것 아니겠어? 캬아~ 우리 양실장님이 직접 소개팅까지 언급하시다니! 표세인 팀장님하고 다니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니까?”

함께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고작 소개팅 제안이라니!

표세인이 들으면 기겁할만한 이야기였지만, 정작 홍기도는 순도 100%의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래, 뭐 이쁘네. 어려보이고.”

꽌시란 상호 의존적인 관계다.

쉬린칭은 이번 맥베스의 판호 프로젝트 유통에 전에 없는 지원을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댓가로······.

“하하하! 돌아가면 내가 바로 회사로 가서, 양실장님께······.”

이 남자의 미소를 부숴버리고 말겠다.

총국장 지위를 손에 넣는 것 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쉬린칭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나는 네가 좋으면, 그냥 좋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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