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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87화 (187/346)

187.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문상훈의 흐뭇한 미소에 최기환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프로토타입이 이렇게나 빨리 완성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 FPS 쪽은 요새 오픈 소스가 많기도 했고……. 솔직히 이 정도 인력이 들어간 프로젝트인데, 속도가 안 나올 수가 없지요.”

“그건 그렇지.”

유례없는 전사 차원의 프로젝트.

맥베스가 보유한 개발진 전원이 단 하나의 프로젝트에 집중하니, 기대 이상의 시너지가 발휘되었다.

게다가 각 파트를 진두지휘하는 실장 삼인방끼리의 경쟁으로 각자 가장 효율적인 개발 프로세스를 앞다투어 쏟아낸 덕분에 나날이 개발 속도에 불이 붙고 있었다.

“그럼 제가 좀 기대를 해도 되겠습니까?”

“뭘?”

“그거 있잖습니까.”

최기환이 어물쩍 돌려서 표현하자, 문상훈은 피식 웃었다.

“뭐, 이대로만 한다면야…….”

문상훈은 이미 다른 두 명의 실장들에게 했던 말을 최기환에게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앞선 두 사람에게서 검증된 것처럼, 최기환에게도 즉효였다.

“알겠습니다! 더 분발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보다 이제 곧 임원회의 시간이군요.”

“……그래. 이제 곧 중대 발표지.”

임원급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중대 발표인 것은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부회장 타이틀의 소유자가 발표되는 자리.

하물며 그냥 부회장도 아닌, 차기 회장인 조연아의 부회장 취임이었다.

“내부 진통은 없을까요?”

사내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최기환이었지만, 이 정도 큰일까지 외면하는 것은 무리였다.

“원래라면 난리도 아니었겠지.”

이미 과거 자신의 은퇴 후에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가겠노라 선언한 바가 있던 조회장이다.

물론 이 시점에 조회장에게 과거의 약속을 어겼다며 손가락질할 인물은 없다.

더군다나 깨비몬 사업부문에서 조연아가 선보인 파격적인 행보는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

“함전무님이 계셨다면 말이야, 좀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무는 이미 조연아의 뒤에 섰고, 함전무는 은퇴했다.

남은 것이라고 한다면, 전무군단과 자신들 뿐.

그러나 그 두 파벌의 배후에는 표세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표세인 팀장이……. 이번 일에 목소리를 낼까요?”

최기환은 조심스럽게 문상훈의 눈치를 살폈다.

회사에서 표세인의 입지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식으로 파벌에 들어간 것도 아닌 처지라서 도무지 표세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글쎄? 별 이야기는 없던데?”

“그렇군요. 그럼 이번 취임식은 별거 없이 진행되겠군요.”

“…….”

최기환의 말에 문상훈은 대답대신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에게 별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상훈은 내심 씁쓸했다.

‘내가 듣지 못했다고, 별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겉보기로 파벌 내부에서 자신과 양성태의 입지는 비슷한 상황이다.

각자 표세인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쌍두마차의 좌우를 담당하는 상황.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은 양실장과 표세인만큼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만약 그둘이서 나를 빼고 모종의 일을 꾸민다면?’

한편으로는 그들이 그렇게 속내가 검은 인물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실장 삼인방이 경쟁하는 것처럼 자신과 양성태도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양성태가 자신보다 표세인과 가깝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우려되는 일이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잘 하고 있어. 이대로만 계속하라고.”

“예. 그럼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그래.

자신에게는 양성태가 갖지 못한 개발자 출신이라는 어드벤티지가 있다.

결국 개발사라는 것은 개발자 중심이기 마련이고, 표세인을 제외한다면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삼인방이 현재 자신의 수중에 있는 상황.

다소 억지스러운 생각까지 끌어내며, 문상훈은 애써 고민을 털어내려 애썼다.

*

*

*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연아가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한가지 잊은 것이 있어서.”

“잊은 것?”

“지난번 프러포즈 선물 말인데?”

“이제와서 반품이라도 하려고? 나랑 힘겨루기 한 번 해보게?”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원래 모든 물건에는 사용설명서가 첨부되기 마련이잖아?”

“설명서?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네?”

연아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일단 문이사와 도이사. 이 두사람에 대한 이야기야.”

“시작부터 스케일이 큰데?”

도이사는 전무군단이라는 그룹에 속해 있던 탓에 문이사나 양실장 같은 스타 플레이어라는 인상은 없지만, 원래부터 가장 무던한 이사라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현재는 전무군단의 리더로 대두된 상황.

지금 당장의 액면가만 놓고 계산하면 오히려 셋 중에서 가장 액수가 높게 책정될 수도 있었다.

“일단 문이사부터 이야기해 볼까? 문이사는 뭐랄까 타고난 사냥개 같은 느낌이잖아?”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지.”

문이사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슬금슬금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는 도이사 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이사가 아니다.

그는 확고한 타겟이 있을 때, 가장 빛이난다.

“그런데 삼인방 컨트롤을 맡겼잖아. 그거면 된 것 아니야? 지금도 예상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일전에 연아가 말하길 문이사는 기복이 큰 성정 탓에 고위 임원으로는 오히려 흠결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실장 삼인방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으로 그의 평가가 상당히 달라져버렸다.

“아직은 그것이 자신의 밥그릇이라는 생각은 없으니까.”

“새로운 밥그릇을 주겠다?”

“표현이 좀 그렇긴 하네.”

딱히 문이사를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는데, 어째 표현이 다소 불손하단 느낌이다.

“흥미롭네. 좀 더 자세히 말해줘.”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실장 삼인방은 정식으로 내쪽에 줄을 선 것이 아니거든?”

“그랬어?”

이건 연아조차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 셋은 요즘 문이사 꽁무니를 졸졸 쫓는 신세가 아닌가?

“처음부터 조금 걱정되던 부분인데, 양실장이야 워낙 나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니까.”

“거의 추종이나, 추앙 수준이지.”

아니, 뭘 또 추앙씩이나.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문이사에게 쓸데 없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확실히 그렇지. 그래서 오빠의 곁에 서겠다고 했을 때, 나도 엄청나게 놀랐으니까.”

사람의 심리란 의외로 대동소이한 법이다. 나 역시 홍켓몬과 남궁원을 두고 이런 고민을 늘상 하고 있다.

이건 마치, 첫째를 질투하는 둘째를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시간상 좀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차별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인간 관계라는 것는 하루 아침에 뚝딱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때로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상대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겠지.

“네가 직접 문이사를 포섭해봐.”

“뭐? 오빠에게서 등 돌리게 만들라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양실장에게는 회장님의 비호가 있잖아?”

“아!”

“문이사에게는 삼인방과의 깊은 커넥션을 네가 허락해준다고 하면서 그저 조금 더 가까운 관계가 되자. 뭐 이 정도만 손을 내밀면 되지 않겠어?”

“……나중에 우리 아이 낳으면,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할 것 같다는 느낌인데?”

“아이를 키워본 적 없지만, 원래 부모들은 이렇게 하는 것 아냐? 각자 맞춤형으로…….”

“일단 우리 집은 아니었던 것 같네.”

“회장님에겐 회장님의 스타일이 있는 거지.”

“아무튼 이 부분은 알겠어. 단순히 반대의 목소리를 못내도록 틀어쥐는 것이 선물의 전부가 아니었던 거구나?”

“어차피 네 부하직원이잖아.”

내 말에 연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웃지? 이제는 직급상으로도 부회장이다.

회장님 이하로는 전부 부하직원 맞지 뭐.

“왜?”

“맞는 말이긴 한데……. 오빠는 정말 부하직원이라는 느낌이 안드네.”

“나 여기서 월급 받고 있어.”

“이제 그 월급 필요 없잔아?”

“왜 필요 없어! 법인은 법인이고, 나는 나지!”

이건 진심이다.

회삿돈이야, 내 주머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리고 기둥 소프트의 돈은 남김없이 긁어모아서 개임개발에 투자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오랜 야망이었으니까!

뭐 예전에는 그냥 이룰 수 없는 꿈이란 느낌이었으니까…….

“크큭, 알겠어. 아무튼 계속해봐.”

“문이사는 이 개념 자체를 형평성의 문제라고 인식할 거야. 그러면 너와도 나름 돈독한 관계가 유지되겠지.”

양실장에게 조회장.

자신에게는 조연아.

이것이면 나름 그가 느낄 소외감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약 문이사가 완전히 내 사람이 되어 버리면?”

“원래 네 사람이야. 이 회사의 직원들 모두. 우리는 맥베스 소속이잖아?”

“…….”

“왜?”

“오빠가 그럴 의도는 아니란 것은 알지만 조금 무서울 정도네.”

“?”

“아니, 말 끊어서 미안. 어쨌든 문이사는 알겠어. 그럼 도이사는?”

“도이사는 간단하지. 문이사에게 도이사랑 기 싸움시켜버려.”

“어?”

기싸움이라는 단어에 연아가 화들짝 놀랐다.

“아까 말한대로, 문이사는 타겟이 있을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야. 반면 도이사는……. 아니, 전무군단 자체가 지금 목표가 없어.”

“아!”

“도이사가 당장 함전무처럼 전무군단을 휘어잡을 수도 없을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목표의식이 필요하지.”

“위기감을 통해 시너지를 끌어올린다?”

“정답! 역시 우리 연아는 똑똑해요.”

“……놀림 받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오빠에게 칭찬받는 것은 나쁘지 않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과장한 것도 아닌데 뭘.

머리야 애초에 연아가 나보다 훨씬 똑똑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오케이! 모두 접수했어. 다시 한 번 말할게. 선물 고마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부회장님.”

“그래. 항상 정진하도록.”

우리는 유치한 농담과 함께 잠시 웃었다.

“즐거운 것 같군.”

“회장님?”

때마침 조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세요?”

나도 그렇지만 조회장도 연아의 방을 방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조회장이라면 보통 사람을 부르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별건 아니고, 취임 발표 전에 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말이다.”

“아, 저는 그럼…….”

“아니. 너도 자리에 있어라.”

“네.”

뭔가 요즘 항상 이런 식이란 느낌이다.

“연아야.”

“네.”

“이제 회사에서 너와 나는 동급이 되는 셈이다.”

“동급이라뇨. 엄연히 회장이 더…….”

“전무니, 상무니 해도 어쨌든 같은 고위 임원이란 것은 같지, 힘겨루기가 가능하다는 거야.”

“힘겨루기요? 저랑 회장님이요?”

“그래.”

힘겨루기라니, 아버지와 딸이다. 게다가 이미 후계자로 낙점한 딸과 무슨 힘겨루기를 한 단 말인가?

“지난번에 너희의 일을 비밀로 하라고 했던 것이나, 그 밖에 무슨 제약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더 있다면, 그것들 모두 깡그리 잊어라.”

“!”

해금 선언이랄까?

드디어 나와 연아의 관계를 공표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해금 선언을 듣고나니…….

오만가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일일이 내 눈치 볼 필요 없다. 뭐든 네가 알아서 하고 내게 따로 보고할 필요도 없다.”

“……대신 책임도 제 몫이라는 거군요.”

“그래. 난 단 하나도 수습해주지 않을 거다. 주주회의를 설득하는 것도 네 몫이지. 불신임안이 들어와도 그것은 오롯이 네 몫일 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언제까지고 조회장의 비호 속에 있어서야, 성장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시는 거죠?”

“당분간 내가 좀 바빠 질 것 같거든?”

“네?”

“그런게 있다. 아무튼 잘해라. 참고로 나는 오늘 임원회의 불참이다.”

“불참이라고요?”

“그래. 알아서 잘 해라. 표세인이.”

“네.”

“너는 나 좀 보자.”

갑자기 왜 이러시지?

나는 살짝 긴장한 연아를 두고 조회장을 쫓아 방을 나섰다.

인선 기준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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