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표세인 팀장은 참석하지 않았군요.”
이번 임원회의의 목적은 조연아의 부회장 취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제 곧 조연아가 등장하여, 이 회사의 세대교체의 막이 올랐음을 선언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근래 맥베스 내부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남자.
표세인이 없다는 것은 다소 의아할 지경이었다.
“아직 팀장이니까요.”
도경우의 질문에 양성태는 나지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본인부터가 팀장이라고 호명했음에도 새삼 표세인이 아직도 팀장이라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언제까지 팀장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시랍니까?”
“일단 이번에 부장으로 진급합니다.”
“……부장. 그것도 한참…….”
“그 부분은 따로 생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흠흠, 뭐 그러시다면야.”
다름아닌 함전무의 후계자로 낙점된 표세인이었다.
직접 표세인의 카리스마와 양성태와 문상훈을 거느린 그의 영향력도 목격했다.
아직도 왜 양성태와 문상훈이 표세인에게 굴복한 것인지는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도경우 본인은 표세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임원들은 사정이 다소 달랐다.
그들은 표세인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함전무가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직급과 연배가 까마득하게 차이나는 인물에게 고개를 숙여야할 처지였다.
“우려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네, 이걸 언짢게 여기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충분히 이해하실겁니다. 그 증거로 딱히 티를 낸다거나 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오히려, 의외다 싶을 정도로 표세인은 자신들에게 접근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너무 설칠까봐 걱정했었는데…….’
젊은 나이에 과한 권력을 쥐게 되면 좀처럼 주체를 하지 못하는 법이다.
도경우는 처음에 그 점을 우려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과는 너무도 다른 행동.
게다가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어디까지나 직급상 하급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깍듯하게 행동한다.
“표세인 팀장님은 여러모로 범상치 않으신분이지요.”
“하지만 너무 의중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도 저희들 입장에서는…….”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편히 갖으라고요?”
“아마, 표세인 팀장님은 도이사님을 비롯한 함전무님 계파의 임원분들과 일종의 파트너쉽을 맺은 것 정도로 인식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파트너쉽이라…….”
“그러니 과하게 예의를 차리실 필요도 없고 눈치 보실 필요도 없으실 겁니다.”
그저 표세인이 원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을 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하리라…….
“하지만 그 말씀은 돌려서 생각해 보자면……. 아직 표세인 팀장님의 사람이 되기에는 검증이 부족하다는 것처럼 들리는 군요.”
도경우의 말에 양성태는 슬며시 입가를 늘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어린 무언이었다.
“저도 요즘 책임감 때문이랄까……. 방금 하신 말씀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양실장님이야 포지션이 좀 독특하니 예외라고는 해도……. 문이사님의 경우는 좀 다르지요.”
“호오…….”
임원진 태반이 문이사와 같은 개발자 출신이 아니던가?
비서실장이라는 양성태의 독특한 입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문상훈의 뒤로 밀려나는 것을 바라는 이들은 없었다.
그것이 문상훈이라는 남자가 지닌 멍에와도 같은 것.
더욱이 전무군단의 입장에서는 한때, 경쟁상대였던 이상무 파벌의 에이스.
결국 문상훈에게는 밀려날 수 없다는 것.
“조연아 부회장님도 그렇고 표세인 팀장님도 그렇고……. 사내에 거칠게 불어닥친 세대교체의 기류는 우리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순히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할 수는 없지요.”
도경우의 말에 근처에서 내심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임원진 몇몇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이 문상훈이와 한판 붙어보시겠다. 이 말씀이시군요?”
때마침 문상훈이 실장 삼인방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는 문상훈 본인이 임원진 사이에서 젊은 축으로 통했었지만, 어느새 가장 젊고 두각을 드러낸 실장 삼인방을 동행한 모습에서 전과는 전혀 다른 연륜이 느껴졌다.
“우리는 언제나 그러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문상훈은 다소 과할 정도로 입가를 늘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파벌상으로 표세인 휘하에 속해있다고는 하지만, 그 내부의 경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권력을 탐하기 마련이고, 그 것에 가장 특화된 이들이 결국 임원이라는 자리를 획득하기 마련.
“아쉽군요. 이번 판호 프로젝트가 하필이면 전사 차원으로 개발 중이라서, 경쟁할 기회가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쪽분들 아니신지? 요즘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우리는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 소리는 듣는데, 팽당한 사냥개는 뭐라 불러드려야 할는지?”
도경우는 지지 않고 문이사가 이상무를 떠난 것을 팽당했다며 비꼬아 도발했다.
“……진짜 한번 붙어보긴해야겠네.”
문상훈은 앉아있는 도경우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리고 도경우 또한 고개를 치켜들며 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었다.
함전무와 이상무에서부터 비롯한 갈등의 인연은 그들이 한발씩 물러난 상황에서도 여전히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표세인 팀장님은 과연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양성태는 한발 물러나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기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회장님 오십니다.”
김인숙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순 비어있는 상석으로 돌아갔다.
-드르륵.
임원진 전원이 일제히 기립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앉으세요.”
“네.”
기립도 대답도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번에 맥베스 부회장에 취임한 조연아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아낌없는 조언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조연아의 담담한 인사말에 박수세례가 터져나왔다.
‘이건 또……. 느낌이 다르군요.’
‘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전보다 부드러워 진 것 같은데……. 묘한 무게감이 있군요.’
실장 취임때까지만해도 날선 긴장감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 조연아의 표정은 이전과는 달리 무척 부드러웠다.
대기업의 부회장이라는 직함에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젊은 나이임에도 묘하게 그 분위기가 자연스럽다.
오랜 시간,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노련함이랄까?
조연아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앉아있던 것처럼 어색함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제 취임과 동시에 많은 변화가 있을거라는 점입니다.”
변화.
당연했다.
조회장의 연배는 그리 젊지 않다. 이제 맥베스의 지휘봉은 조연아가 손에 쥘 것은 명약관화한 상황.
문제는 그 변화가 무엇이냐는 것.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판호 프로젝트는 무척 실험적인 개발입니다. 전사차원에서 모든 개발인력이 하나의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사실 해외 유수의 대형 개발사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방식이고, 과거에는 국내 개발사들도 그랬지만, 저희 맥베스의 입장에서는 무척 오랜만이지요.”
하나의 IP에만 집중하는 것은 무척 위험도가 큰 모험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근래 씨가 마른 판호를 따낸 상황이기에 모험을 걸었다.
“그러나 이건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조연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자신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표세인과 관련된 이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우측에는 이상무와 관계된 이들과 딱히 뚜렷한 소속이 없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쟁.
조회장이 누누이 강조했고, 이제는 표세인도 신경쓰기 시작한 시스템.
“국내 개발사들은 과거 발 빠르게 모바일 시장이라는 트랜드에 편승해 주가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안주한 탓에 불황을 거듭하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치부를 들춰내자, 저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조연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과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번 판호 프로젝트가 궤도에 올라서, 인원 개편이 가능하게 되면 새로운 조직개편을 추진하려 합니다.”
“조직개편이요?”
“지난번 개편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몇 우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조연아는 신경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열 번, 백 번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번 정부지침에 따라서 재택근무도 실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택근무라는 말에 임원진 일동이 입을 다물었다.
집에서 근무를 한다는 생소한 개념.
이것이 어떤 효과로 작용할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이참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시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일 테지요. 그런 의미에서, 차후 소속부서와 관계없이 지원자들을 모아 인디게임 개발 공모를 해볼까 합니다.”
“이, 인디게임 개발 공모요?”
“네. 이번 현안에는 그 어떤 직급도 무시합니다.”
“직급을 무시?”
“예. 신입사원의 아이디어라면, 당연히 신입사원이 리드하고 이사급이 그 밑에서 개발자로서 참여할 수도 있겠지요.”
조연아의 말에 몇몇은 황당한, 일부는 미묘한 비웃음 섞인 반응이었다.
신입사원이 임원을 이끌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부회장다운 치기 어린 아이디어라는 느낌이었다.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겠어.”
의외로 문상훈은 반기는 기색이었다. 미국 지사장을 역임하는 그였기에 이런 식의 부서 쪼개기 프로젝트가 낯설지 않았다.
“마침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어떠십니까? 당연히 참여하시겠지요?”
도경우가 문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하. 자신 있으신가 봅니다?”
“그러는 그쪽은 지난번에 양실장님께 패하지 않았습니까?”
“……표세인 팀장에게 진 겁니다.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는데요?”
문상훈의 대답에 도경우가 양성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성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지난번의 승부는 사실상 표세인 팀장님과 문상훈 이사님의 승부였지요.”
“그렇군요. 그런데 양성태 실장님은 참가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도경우는 슬쩍 양성태의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양성태가 개발자 출신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대외적으로 모두의 부동산과 좀비로얄의 배후가 양성태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글쎄요. 저는…….”
그때였다.
“여러분들이 우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회를 준다고 해서, 하급자가 상급자를 리드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아랫사람들이 속이 편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는 그에 걸맞는 책임자를 준비했습니다.”
“책임자?”
“들어오시죠.”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대부분의 임원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저, 친구가 왜 저기에?”
“왜 그러시죠? 아시는 분입니까?”
양성태와 문상훈이 동시에 놀라자, 도경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저도 참가할 것 같군요.”
“호오?”
대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누구이기에 양성태가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기획팀 소속 홍기도 과장입니다.”
홍켓몬이 임원회의에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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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도를 인디게임 개발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하셨다고요?”
“그래. 이런 번잡스러운 일은 맡지 않으려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덥석 물더구나.”
“인선 기준은?”
일단 이것부터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기회에 직급과 관계없이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는 개발환경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녀석은 딱 봐도 남들 눈치 안 보기로는 제일인 것 같던데? 내가 틀렸냐?”
“틀렸다기보다…….”
홍켓몬은 남들의 눈치를 안 본다기보다…….
그냥 제 관심사가 아닌 일은 죄다 무시하는 녀석인데요.
이거 괜찮으려나?
여기까지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