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91화 (191/346)

191.

“이걸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군.”

“…….”

“…….”

문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지은 죄가 있는 탓에 슬그머니 글라스를 등 뒤로 숨기고 눈을 피했다.

“문이사님.”

“네.”

“축하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했습니다.”

“축하할 일?”

문이사는 자신의 의자에 앉으며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한잔 받으시죠.”

나는 눈치껏 문이사에게 글래스를 내밀고 술을 따랐다.

“이거 비싼 술이야.”

“……제가 나중에 채워두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축하할 일이 뭔지나 들어 볼까?”

“저 이직하려고 합니다.”

“이, 이직?”

제임스의 말에 문이사는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내가 뭘 잘 못 들은 건가?”

문이사는 제임스가 아닌 나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치지 말고 자세히 말해봐. 대체 무슨 소리야?”

“기둥소프트에 정식으로 합류할 생각입니다.”

“아! 난 또 뭐라고…….”

문이사는 살짝 허탈하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 기둥소프트도 드디어 자체적으로 뭔가를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아닙니다.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그저…….”

“그저?”

“제임스라면 제가 잘 못된 선택을 내렸을 때, 올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부탁을 드렸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로렌스라는 큰 허들이 남아있지만……. 아마 괜찮을 겁니다. 한국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고, 타냐도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건 안심이군요.”

나와 제임스는 살짝 잔을 부딪쳤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표세인 팀장이 원하는 그림이 그건가? 좋은 인재들을 기둥소프트로 흡수하는 것?”

“아닙니다. 몇 명 정도는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 기둥소프트는 맥베스 산하 개발사가 아닙니까.”

“지분은 거진 자네 소유 아닌가?”

“지분과는 별개지요. 이 점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아, 잔이 비었군요.”

나는 문이사의 잔을 도로 채웠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란 말이지. 자네도…….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그렇습니까? 나름 겉과 속이 똑같다는 말도 듣는 편인데요.”

뭐 그 앞뒤로 의외로 음흉하다는 말이 따라붙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도 가끔 고민한단 말이지.”

“어떤 고민이요?”

“표세인 팀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지난번에 분명 편하게 하라고해서 그러고는 있지만……. 일단 우리 파벌의 헤드란 말이지.”

“하핫. 정말로 그런거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원래 직급과 직책은 별개가 아닙니까. 필요상 제가 그런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문이사님은 임원이시고, 저야 아직 일개 팀장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곧 부장진급 발표가 날 테지만, 어차피 그렇다고는 해도 직급차이는 여전하다.

나는 굳이 오만한 태도로 다른 이들을 내려다 보는 일에는 취미가 없다.

솔직히 그것이 딱히 더 능률적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좋아.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믿는 수 밖에……. 그보다 왜 양실장은 없지?”

“양실장은 부른적이 없습니다만?”

제임스의 말에 문이사는 이번에도 나를 바라보았다.

“양실장님께는 나중에 말씀드리면 되겠지요. 지금은 그저 ‘제임스의 아이디어’대로 축배를 들기 위해 문이사님의 술을 좀 빌리던 참이었습니다.”

“정말로 한 말은 지키시는 분이시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 약속했었죠? 그쵸?

“표세인 팀장님 말씀대로 문이사님의 술을 훔쳐먹은 것은 제 아이디어입니다.”

“뭐야? 설마 지금 내가 술이 아까워서 놀랐다고 생각하는거야? 나 문상훈이야.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하하, 역시 문이사님은 멋지십니다.”

“……뭔가 놀림당하는 느낌인데?”

“전혀 아닙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음식 훔쳐먹으면 목숨 걸어야하는 것이 당연한 시절을 거쳐온 나에게는 술도둑(?)들을 흔쾌히 용서하는 문이사의 배포에 감사할 따름이다.

애초에 음식도둑에게 화가나는 이유는 돈문제가 아니지 않나?

내가 먹으려 했던 것이! 내가 먹으려는 순간에 없다는 것!

아아……. 제임스의 꾐에 넘어가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아무튼 꼭 보상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얼마죠?”

“글세? 한 백만원 정도?”

“큭!”

술 한병이 백만원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백만원짜리 술을 사무실에 보관한다고요?”

“사무실이니까, 비싼 술을 보관하지. 보통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마시는 용도잖나. 그리고 백만원이면 크게 비싼 것도 아니잖아?”

문이사는 이번엔 제임스에게 동의를 구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임스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표세인 팀장님은 아무래도 돈 쓰는 법도 좀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잘 됐군요. 문이사님께 보상할 술을 알아보는 김에 공부도 좀 해보시죠.”

제임스는 평소에는 철저히 일반 사원 코스프레를 하면서도 이럴때는 여지없이 부잣집 아들 포스를 풍긴다.

“씁,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흠, 이런거라면 나쁘지 않은데? 자주 이용해 달라고, 하하하.”

아니요. 앞으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직 소시민 근성이 완전히 씻겨 나간 것은 아니니까.

한 병에 백만 원이 넘는 술이라니…….

엄마한테 혼날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요즘 내가 입는 옷값은 더 문제지만……. 이 부분은 연아가 원하는 것이니 패스.

“그건 그렇고, 아직 기둥소프트 향후 플랜이 없는 상태라고?”

“네. 일단은 판호 프로젝트가 먼저니까요.”

“하지만 중국 출장도 다녀왔겠다. 요즘 크게 할 일 없지 않아?”

크윽……. 사실 원래라면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남궁원과 문이사 두 사람에게 떠맡긴 상황인지라, 할 말이 없다.

“그건……. 그렇죠.”

“그렇군. 그런데 이번에 임원회의에서 홍기도 과장 그 친구가 뜬금없이 등판하던데, 이거 표세인 팀장의 새로운 그림인가?”

“전혀 아닙니다.”

“아니라고?”

문이사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번에는 정말 나와는 관계가 없다.

“정확히는 회장님의 그림이죠.”

“소개는 조……. 아니, 부회장님이 하시던데?”

아직은 연아와 부회장이라는 이름이 바로 매칭이 되지 않는 듯이, 문이사는 한번 말을 더듬었다.

“이번에는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뜻이 합치했다고 봐야겠지요.”

“그건 좋은 일이군. 느낌상 다소 다른 비전을 그리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에 같은 구상을했다고 해서, 다음번도 같으리란 법은 없지요.”

제임스가 정확히 맹점을 짚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가? 두 사람의 의견이 그렇다면 틀림없겠지.”

문이사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막상 할 일이 없냐고 말하긴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백회장을 상대하는 건이 있지 않나. 내 생각에는 그거 상당히 중요한 일일텐데……. 그 양반도 보통이 아니지.”

사람평가에 깐깐한 문이사가 보통이 아니라고 할 정도다.

물론 나 역시 백회장의 캐릭터를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아니, 파악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공격의사를 보이지 않았던가?

“뭐 양실장도 주시하고 있으니, 어련히 잘 하겠지.”

“네. 이럴때마다 양실장님 덕분에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그래. 두 사람은 참 궁합이 좋지.”

어? 이거……. 그건가? 설마 질투?

“그리고 문이사님도 똑같죠.”

“뭘 입바른 소리를 하려고, 그만 둬.”

“아니요. 정말로요. 지금 실장 삼인방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면서 잡음 하나 없이, 이끌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 문이사님이 아니었으면,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죠.”

완전히 빈말은 아니다.

그리고 실장 삼인방을 컨트롤하는 부분에서는 나조차 의외다 싶을 정도로 문이사는 훌륭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흠흠, 그래.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말로는 입바른 소리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문이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아무튼 조심하라고…….”

자신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문이사의 입장에서 외부의 방해로 잡음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백회장도 백회장이지만, 난 설대표가 더 신경쓰이는군.”

“설대표요?”

“일단 우리의 약진에 속이 끓는 것은 설대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직접 나서지 않아도 최소한 백대표의 계획에 한 손 거드는 정도는 할걸?”

“알겠습니다. 그쪽은 양실장님께 다시 한 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백회장이야 곁에 조연준을 심어 놓았지만, 설대표쪽은 박아 놓을 와드가 없다.

그러니 양실장에게 기댈 수 밖에.

“어쨌든 판호프로젝트는 내게 맡기고 외부일이나 잘 신경쓰라고.”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네요.”

정작 팀장인 내가 개발을 책임지고, 임원인 문이사가 이런 외부일을 맡아야하는데, 뭔가 거꾸로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로 부장으로 승진하는 거야.”

“네. 좀 너무 빨라서 고깝게 보일 수도 있지만…….”

“고깝긴, 너무 늦어. 최소한 실장급은 되어야지. 기둥소프트 대표잖나.”

“너무 빠른 진급은……. 제가 원치 않아서요.”

“그래, 뭐 잘 하고 있으니. 아, 그보다 나 다음번에 도이사와 한판 붙을거야. 양실장도 낄지는 모르겠지만.”

“한판 붙는다고요”

“그래. 서열정리는 해야지.”

서열정리……. 이건 파벌에 관련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도이사는 우리 파벌에 속한 인물은 아니니까.

“서열정리라…….”

“?”

“그러고 보니 저도 서열 정리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표세인 팀장이 서열 정리를 할 것이 있어?”

“잊죠. 아주 징글징글한 녀석이 하나…….”

홍켓몬 녀석이 인디게임 프로젝트에 솔선수범해서 나선 이유는 뻔하다.

‘하극상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정식으로 붙어볼 때도 됐지.

“어디 요 녀석이 얼마나 컸으려나…….”

*

*

*

“판호 프로젝트 상황은 어떻냐?”

“잘 되고 있어. 아마 이 달 내로 간단 시연 버전 정도는 나올걸.”

어차피 플레이어블 캐릭터 작업과 밸런싱이 오래 걸리는 것이지, 미완성 맵에서 테스트해 볼 수 있을 정도의 리소스는 이미 완성이 끝난 상태였다.

FPS와 AOS 장르는 오픈 소스로도 많이 풀려있는 상태기에 구현에 드는 품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니가 갑자기 왜 그걸 신경쓰냐?”

같은 기획팀에게 할만한 질문은 아니었으나, 상대가 홍기도가 아닌가?

하지만 홍기도는 대답 대신 함송희를 바라보았다.

“너는?”

“저는 단기간에 끝날 프로젝트가 아니라서요. 이게 그러니까…….”

“스탑! 내 머릿속에 외계어를 입력하지마!”

홍기도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너희는 나랑 한팀이야. 만약 나중에 표세인 팀장님이 영입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 해.”

“뭔 개소리야. 뭘 영입하고 뭐가 한팀이야?”

“판호 프로젝트가 끝나면 인디 게임 프로젝트 시작할 거야. 그때 너희는 나와 한팀인거야. 알겠지?”

“전 표세인 팀장님 편 하고 싶은데요?”

“맞아. 너 보단 팀장님에게 붙는 편이 백배 낫지.”

“바보들아!”

“?”

“언제까지 팀장님 비호하에 있을 거야!”

“너, 설마 지난번에 말한 하극상 어쩌구…….”

“그래! 한번 정도는 표세인 팀장님께 우리의 진면모를 보여줘야지!”

“그건 그렇긴한데…….”

“그런데 표세인 팀장님을 상대로……. 가능할까요?”

“적은 지금 방심하고 있다!”

홍기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최종보스(표세인)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회장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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