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뭐든 순조로운 시기에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마련.
어느새 판호 프로젝트의 테스트 빌드가 완성되고 이것을 카이두에 서비스 심사를 보냈다.
그러자 의외의 사람이 방문했다.
“카이두에서 ‘오행전기’의 심사 통과했습니다.”
쉬무빙은 담담한 어조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오행전기는 이번 판호 프로젝트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여러 가지 타이틀명이 있었지만, 가장 메인인 오행 시스템을 홍보하는 쪽이 나을 거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어차피 중국에서 서비스 되는 게임들 네이밍센스라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이기도 하고…….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런데 설마 그 소식을 전해주시려고 직접 방문하신 겁니까?”
쉬린칭의 비서인 쉬무빙은 갑작스러운 방문이 고작 이것뿐일 리는 없겠지.
“쉬린칭 부국장님께서 표세인 팀장님의 혜안에 감탄하셨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걸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두분 국장님들께서 신종 폐렴에 감염되시는 일이 발생하셨고……. 그 결과 조만간 쉬린칭 부국장님은 정식으로 총국장으로 취임하시게 되실겁니다.”
“크으……. 축하드립니다.”
그 나이에 국가광파전시총국의 총국장이라니…….
“그래서 그것이 본건이었습니까? 아니죠.”
이번건 역시도 전화 한통화면 충분한 내용이다.
“네.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번 오행전기 관련으로 저희 쪽에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제안이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오행전기는 VIP급 서비스를 약속한 바가 있지요.”
“네. 그래 주셨지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좋은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조금 더 긴밀한 연대를 이뤄보면 어떨까 해서요.”
“……그 말씀은?”
“기둥소프트에 지분을 조건으로 한 투자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지분만큼의 조력은 아끼지 않을 것이고요.”
“허…….”
순간, 얼마전 제임스에게 다끔한 충고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때마침 이렇게 지분을 노린 제안을 받을 줄이야…….
‘확실히 묘한 기분이네.’
게다가, VIP급 대우라는 미끼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수작. 확실히 쉬린칭은 집요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다.
“일단 그 문제는 제가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당장 결정하실 수 없다는 말은 이해합니다만, ‘제가’ 라니요? 기둥소프트는 비상장 회사이고 표세인 팀장님은 기둥소프트의 지분을 거진 고스란히 소유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처음 협상했을 당시에는 9대 1의 비율로 이야기가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거의 8대2의 비율로 결정 되었다.
결국 기둥소프트는 내가 지분의 80%를 소유하고 있으니, 쉬무빙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곧이곧대로 드러낼 필요는 없다.
내가 굳이 임원으로 껑충 뛰어오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기둥소프트가 어디까지나 맥베스의 사내벤처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네. 하지만 지분 비율은…….”
“언제나 물밑에 사정이란 것이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아! 어쩐지……. 저희도 이 부분이 의아스러웠습니다.”
역시 쉬무빙은 노련함이 부족하고 순박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럴듯한 핑계다.
일개 팀장에게 뜬금없이 사내벤처 대표명함을 내려주고 지분까지도 거진 고스란히 떠안겨 주었다.
도저히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물밑 사정이라는 한 마디면, 알아서들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고 나는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일단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리 급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오행전기 론칭 전까지는 확답을 듣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사실 쉬린칭의 제안은 크게 문제 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VIP급 대우라는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전해주었고, 본인의 입지 역시 껑충 뛰었다.
여러 가지면에서 그녀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원래라면 그래야 하는데…….’
내 의지로 주변 인들에게 지분을 나누어주려 했던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는데…….
어쩐지 저 쪽에서 눈독을 들이니까, 기분이 묘하게 요동친다.
‘어쨌든 대비책을 마련해야 겠군.’
쉬린칭의 제안을 무작정 거절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요구를 고스란히 수용하고 싶지도 않다.
“저는 당분간 한국에 머물 예정이니, 결정이 되시는대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표세인 팀장님.”
“네.”
“저희는 정말로 긴밀한 협업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뜻에서 제안하는 것일 뿐입니다. 너무 경계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쉬무빙은 짧은 인사와 함께 맥베스를 떠났다.
*
*
*
“요즘 자주 찾아오네?”
내 방문에 연아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게 말입니다. 공사다망하신 부회장님을 이렇게 자주 찾아뵙는 것도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워낙 일개 팀장에게는 버거운 안건이 생겨서요.”
“아, 아직 부장 진급 발표 안났구나?”
“내 것만 안 난 것이 아니죠. 고부장님의 이사 승진도 발표가 났으면 좋겠네요.”
“그건 아직 이사회 심의중이야. 오빠 승진은 바로 처리가능 한데, 굳이 함께 하겠다며?”
“내 승진은 이사 승진에 묻혀 갔으면 좋겠네.”
사내에 마팀장처럼 나를 고깝게 보는 인물들은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괜히 나를 시기하는 이들에게 기름을 끼얹을 필요가 없다.
완전히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승진명단에 내 이름만 떡하니 박혀있는 것 보다는 낫겠지.
“참 의외로 섬세하단 말이지.”
“부회장님이 의외로 대담하신 것처럼 말이죠.”
“흠, 남자친구에게 부회장님 소리들으니까……. 뭔가 설레는데?”
“설렌다고?”
“상황극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연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취향이 있었어?”
“아니, 없는데 그냥 좀 웃겼어.”
“바라면 말해. 언제든 맞춰줄게.”
“오, 연기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래 봬도 예성 유치원 주연배우 출신이거든?”
이제는 배역이 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버거운 안건이라는 것이 뭐야?”
“오늘 쉬린칭 쪽에서 사람을 보냈거든.”
“들었어. 쉬무빙이랬지? 사촌인 것 같던데.”
“맞을 거야. 일단 표면적으로는 오행전기가 카이두 허들을 넘었다는 소식.”
“좋은 일이네.”
연아는 예상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심혈을 기울린데다가, 대주주인 쉬린칭이 푸쉬하는 프로젝트다. 이게 차질이 생겼다면 오히려 놀랄 일이었겠지.
“두번째는 쉬린칭이 결국 경쟁자들을 제치고 총국장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그 나이에 총국장이라니……. 엄청나네.”
“그 나이에 부회장이라니……. 엄청나네.”
“…….”
“죄송합니다.”
아우, 우리 부회장님 패기 너무 쎄시네요. 숨도 못 쉬겠어요.
“쉬린칭의 영향력은 더욱 거대해지겠네. 이번엔 우리가 운이 좋았네.”
꽌시 대상인 쉬린칭의 입지 강화는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이득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그렇지.”
“하지만 꽌시란 것은 단순한 우정 따위가 아니니까. 뭔가 대비는 하고 있어야 겠네.”
“늦었어.”
“응?”
“대비하기엔 늦었어. 이미 저쪽에서 제안을 해왔어.”
“제안?”
“기둥소프트에 지분을 나누자더군.”
“…….”
연아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어찌보면 처음으로 부회장의 일거리를 전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둥소프트의 지분은 오롯이 나와 맥베스가 쥐고 있으며, 연아는 맥베스가 보유한 지분의 행사권자다.
“혹시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있어.”
“있어.”
“뭔데?”
“부회장님 지시에 따르는 것.”
“풋.”
내 말에 연아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일개 팀장 나부랭이가 부회장님 지시에 따르겠다는 것이 웃겨?”
“크크크. 그렇네. 일개 팀장이 부회장 지시를 따르겠다는 말이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네.”
연아는 뭐가 그리도 웃긴지, 눈물까지 닦아내며 웃었다.
“그래요. 표세인 팀장님. 제 지시에 따르시겠다니, 묘수를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오! 기다렸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네요. 회사 하나 더 만들죠.”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기둥소프트는 모처럼 비상장으로 외부 투자가 필요 없을 정도의 자금력을 지녔지. 이건 향후에 엄청난 무기가 될거야. 그리고 이후에는 그 가치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거야. 그러니 공짜로 수저를 얹게 할 수는 없어.”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 맥베스와 기둥소프트, 그리고 쉬린칭의 투자금을 모아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거지. 애초에 쉬린칭도 이번 건에 한해서는 발을 헛디딘 셈이야.”
“발을 헛디딘 셈이라고?”
“그렇지. 그녀의 꽌시는 어디까지나 맥베스와의 것이야. 오빠 개인이 아니지.”
“아! 그렇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애초에 나에게 뭘 요구할 관계가 아니다. 요구를 한다면 맥베스에 했어야 했다.
“이거 건수 잡은거네?”
“그렇지. 쉬린칭 답지 않아. 중국인들은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하지. 이 건으로 우리의 체면이 크게 깎인 셈이니. 이것을 들먹이면 오히려 그쪽에서 상당히 양보를 해야할거야. 그런데 쉬린칭이 이정도로 수가 얕은 인물이었어?”
“아니. 아니야. 세상에 완벽한 사람 없고,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은 있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쉬린칭이 저지를 법한 실수가 아니야.”
“라는 것은?”
“일부러 틈을 만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겠지?”
“그리고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카드를 제시하겠군. 그리고 그게 진짜 목적이야.”
“와! 쉬린칭 똑똑하네! 하지만 그 의도를 바로 간파한 우리 부회장님이 더 똑똑하시네요.”
“표팀장. 부회장에게 똑똑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똘똘하시네요?”
“어허!”
“똘망똘망?”
“……남들 앞에서 그러면 진짜 화낼거야.”
아, 내 심장 고장났다. 너무 귀엽다. 진짜.
“부회장님.”
“왜?”
“사랑합니다.”
“크크크. 정신나갔어! 지금 어딜 다가와! 여기 회사야!”
“부회장님. 사랑합니다.”
나는 연아의 앙탈 따위는 싹 무시하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며 순식간에 얼굴 전체를 뽀뽀 도장으로 도배했다.
*
*
*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에둘러 접근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반응이 어땠지?
자신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본인이 묻고 싶은 것만을 냉큼 물어온다.
쉬린칭의 독단적인 화법에 쉬무빙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웃는 얼굴이었지만, 기둥소프트의 지분을 언급했을 때, 분명……. 다소 날카로운 반응이 있었습니다.”
-날카롭다? 조금 미묘한데?
“대놓고 흔들리는 반응을 보일만한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날카로운 반응이란 것은 좀 감이 오지 않는데?
“확신하긴 어렵지만……. 경계심과 분노 사이에 어디쯤이랄까요? 확실히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을 건드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무섭다고요. 그 사람.”
-무서워? 항상 경호원들한테 큰소리까지 치는 네가?
“그 사람은 처음부터 좀 달랐잖아요. 게다가 국장님들이 전염병으로 문제가 될 거라는 것까지 척척 맞히고……. 저 어릴 때부터 그런 거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고요.”
-확실히 귀신 이야기 같은 것을 안 좋아하긴 했지.
“어쨌든 왜 이런 식으로 접근했는지나, 알려주시죠? 나름 저 공부 시켜준다고 곁에 두시는 거라면서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음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당장 극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격차가 있음을 쉬무빙 본인부터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쉬린칭이 자신의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곁에 두고 경험을 쌓게 하려는 의도란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일단 가늠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
“가늠?”
-의외로 사람을 파악할 때,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알기 어려워도,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안되는 지를 알아내는 것은 쉽잖아?
“하지만 홍…….”
아차! 순간 홍기도라는 남자를 언급할 뻔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쉬린칭 본인부터가 홍기도가 관련된 일이라면 그가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지 않나.
-뭐라고? 마지막이 잘 안들렸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에요. 더 하실 말 없으면 저는 이제부터 관광객모드로 돌입하겠습니다.”
-좋아. 모처럼이니, 즐기라고. 다음 일이 시작되기 전까진 자유야.
통화는 종료되었다.
“좋았어!”
쉬무빙은 카드를 한 장 꺼내 들었다. 쉬린칭에게서 받은 말 그대로 비장의 카드.
이 순간 쉬린칭의 비서 쉬무빙은 없었다. 백화점에 현금 테러를 준비하는 한 명의 싼커(散客)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름 선은 지키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