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뭐야? 재판받는 친구 위로도 안해주는 거냐?”
낯선 남자의 등장에 실내의 분위기가 일순 경직되었다.
“현성이 왔냐? 너 괜찮은거냐?”
“괜찮지 그럼, 내가 감옥이라도 갈거라고 생각했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행동 하나, 하나가 묘하게 건들거린다.
‘누구냐?’
내가 눈짓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김현성. 전형적인 재벌3세 약쟁이죠.’
2세도 아니고 3세. 이 정도면 상당한 자산가의 아들이라고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
“뭐야, 홍기도 오랜만이다?”
“형, 가죠. 너도 일어나.”
홍기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쉬무빙에게도 손짓을 했다.
“뭐야, 사람을 무슨 병원균 취급하는 거냐? 게다가 못 보던 얼굴들도 있는데, 인사 정도는 시켜줘야지.”
“뉴스에서 곧 클럽 같은 곳도 영업 중단시킨다던데, 마지막 추억을 약쟁이랑 엮여서 기분 잡칠 필요는 없잖아?”
와~ 가끔 홍기도 이녀석은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주먹질은 잼병인 녀석이 도발은 만렙이니…….
하긴 이게 올바른 도적의 본모습이겠지.
“그동안 계속 오냐오냐 해주니까, 진짜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봐?”
“쉬무빙 빨리 일어나.”
“어딜가!”
순간 김현성이 쉬무빙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안 그래도 기분 거지 같은데……. 그래. 어차피 너 한 번쯤 손봐주려고 했었어.”
“잠깐 실례.”
나는 슬쩍 김현성에게 다가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억!”
손목 뼈부분에 힘을 주자, 갑작스러운 통증에 김현성은 쉬무빙의 손목을 놓고 옆으로 물러섰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자연스럽게 쉬무빙과 김현성 사이로 들어가 그녀를 보호했다.
“좋은 자리가 아닌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하! 이제는 처음본 새끼까지 나를 무시해?”
어? 이놈 병을 잡았어? 설마?
-쨍그랑!
“꺄악!”
양주병을 테이블에 내리치자, 날카로운 병 조각 사이로 김현성의 피가 흘렀다.
새삼 가까이서 김현성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살짝 눈이 풀려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놈 이거, 재판중이라면서……. 설마 여기도 약빨고 온 건가?
“무슨 일이 십니까?”
병이 깨지는 소리와 여성들의 비명소리 덕분일까?
클럽 가드로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달려 들었다.
입구에 서있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화려한 문신으로 도배한 덩치들이었다.
“강실장! 이 새끼들이 날 먼저 공격했어!”
떡대들 사이에서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우리와 김현성을 살펴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다치신 것은 없으신 것 같군요. 일단 병은 내려 놓으시죠.”
“내가 공격당했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 들어? 이 새끼들 그냥 놔둘거야?”
아무래도 김현성과 떡대들 간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재미없는 상황이네요. 저 녀석 아버지가 여기 투자자에요.’
‘그래? 만약 일이 묘하게 흘러가면, 너 쉬무빙 제대로 지켜라.’
‘아무리 팀장님이지만 저건 너무 많지 않나요?’
‘8명? 한 5년 전이었으면 문제없겠는데……. 힘조절이 힘들겠네.’
‘저 사람들 진짜 깡패일 텐데요.’
‘그러니까 가능하지.’
요즘 세상에는 가축사료로 몸만 키운 어설픈 깡패들보다 체육관에서 운동 제대로 배운 일반인들이 더 강한 경우도 많을 정도다.
“표세인……씨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내 이름을? 강실장의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나와서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저 종수형님 모시는 놈입니다. 강성구라고 합니다.”
아, 염종수 녀석과 같은 소속이었군. 정말 세상 좁군.
하긴 그 녀석도 카지노 호텔 관리하고 있었고, 여기도 호텔 지하에 있는 클럽이다.
이 녀석들은 아무래도 호텔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양이다.
“종수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깡패랑은 상성이 안 좋아. 괜한 짓거리 하면……. 니들 좀 망가질 거다.”
내 말에 강성구의 뒤에 있던 떡대 몇몇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강성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나를 마주 바라볼 뿐이었다.
“뭔 눈싸움이나 하고 앉았어! 조폭이 가오도 없냐? 일반인에게 쫄았어?”
김현성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싸움을 붙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강성구는 김현성에게 눈빛도 주지 않은 채로 나를 주시했다.
“예전에 천호동 사무실을 방문하셨었을 때……. 저도 거기 있었습니다.”
“음…….”
천호동 사무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염종수를 조폭 생활 청산시키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했었고…….
그것이 결국 큰 싸움으로 번져버렸다.
“표세인씨 발길질에 걷어차여서 갈비뼈가 네 대나 나갔죠. 뼛조각 제거를 위해 2번이나 수술을 했었습니다. 조폭 체면에 정말로 부끄러운 추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제 체면 좀 다시 세워 보시겠다?”
“제 체면은 염종수 형님을 잘 모시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지요.”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충성심 있는 타입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김현성씨, 집으로 보내.”
강성구의 말에 떡대들이 김현성의 양팔을 붙잡았다.
“씨발!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몰라?”
“김현성씨.”
강성구가 앙탈을 부리는 김현성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당신이야말로, 사람 잘 못 봤어. 이분 잘 못 건드리면, 당신 아버지도 감당 못 해. 그러니 운 좋은 줄 알아. 데려가!”
강성구의 말에 김현성은 질질 끌려나갔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러시죠.”
“그…….”
“?”
“건방진 부탁인 줄은 압니다만, 염종수 형님께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쯧.
입맛이 쓴소리를 들어 버렸다.
나라고 한때, 친동생처럼 여겼던 녀석에게 모질게 굴고 싶겠는가?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건, 올바르지 않은 길을 택한 녀석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처럼 대할 수는 없지 않나.
“형, 대체 정체가 뭐에요? 깡패들 때리고 다니셨어요?”
“그렇게 말하니, 표현이 되게 이상하네. 그냥 안 좋은 일이 한 번 있었어.”
“오호~ 우리 2차 가죠. 술안주 생겼네! 그 썰 좀 풀어줘요!”
“찬성!”
쉬무빙까지 번쩍 손을 들었다.
“들어서 좋은 이야기가 아냐. 그리고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들어가야지.”
“무슨 말이에요! 저 관광 중이라고요! 한창 더 놀 시간이에요!”
“이런 시국에 너무 과하게 즐기는 것도 좋지 않아요. 게다가 뭐가 관광입니까. 업무상 방문이시잖아요.”
“그래도…….”
결국 나는 볼멘소리를 하는 쉬무빙을 강제로 숙소로 돌려보냈다.
“뭔가 좀 죄송하네요. 원래도 가급적 피하는 녀석인데, 이렇게 딱 마주칠줄은 몰랐어요.”
홍기도는 김현성을 언급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니, 그건 네 잘 못 아니니 상관없는데, 너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 예전에도 뻣대다가 한번 큰일 날뻔 했었잖아.”
내가 과거 구타를 당하던 홍기도를 구해준 일을 언급하자, 홍기도는 피식 웃었다.
“형과 붙어다닌 이후로는 다들 만만해 보여서 큰일이네요.”
“몸 아껴라. 안 다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는 형은요?”
“호신술은 격투기의 기본이야. 들인 돈과 세월이 얼만데, 내 몸 하나 건사 못하겠냐. 그리고 나도 안 될 것 같으면 눈치 살피다, 발 뺀다.”
“그런 적이 있으세요?”
음……. 생각해보니, 아직 그런 적이 없었네.
*
*
*
“이야기는 부회장님께 들었습니다. 새로운 자회사 설립. 지금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는 느낌이군요.”
연아에게 쉬린칭의 제안을 역이용하여, 새로운 자회사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들은 양실장은 곧장 나를 찾아왔다.
“네. 하지만 정작 목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려나요?”
“네. 그것에 대해서 아이디어가 있다면 기탄없이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혹시 양실장님은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세요?”
“의외로군요. 표세인 팀장님이시라면 바로 아이디어를 떠올리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게임 개발 말고 아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름 마케팅에도 조예가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예전에 유튜버들을 이용해 아주 멋진 성과를 이루어내셨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건 마케팅에 조예가 있던 것아 아니라……. 가만, 마케팅?”
“게임 개발과 퍼블리싱을 함께 하는 경우는 드문 법이죠. 그리고 중국이라는 지극히 독특한 특성을 지닌 시장이라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버젓이 세계 최대의 퍼블리싱 기업이라 할 수 있는 카이두가 있는데, 우리가 거기서 뭐 나눠 먹을 만한 구석이 있을까요?”
“그래서 마케팅이란 겁니다. 카이두도 마케팅 부분은 의외로 외부업체를 통해 진행하는 편이니까요.”
“호오…….”
확실히 그럴듯한 아이디어라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중국은 마케팅 영상에도 국가광파전시총국의 입김이 없으면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총국장인 쉬린칭과 손을 잡고 운영하는 게임 마케팅 전문 업체…….
게임 개발만큼의 이윤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잘 자리 잡는다면 아주 쏠쏠한 알짜배기 회사로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각이 나온다.
“더군다나 쉬린칭이 이런 기업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자연스럽게 게임 마케팅 채널들은 일제히 굴복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야지요.”
가만 마케팅 채널들을 모두 굴복시킨다고?
“……이거 단순히 쉬린칭의 입지를 이용하겠다는 아이디어가 아니군요.”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 군요.”
“백회장……. 뒷 목 좀 잡겠는데요? 양실장님 정말 무서운 분이시군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백회장이 단단히 실수한 셈입니다. 표세인 팀장님이 설마 쉬린칭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사로 잡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요.”
“솔직히 이번에는 홍기도 녀석의 공이 크긴 한데요.”
“네. 그러고보니, 요즘 홍기도 과장의 행보가 눈에 띄더군요.”
“행보씩이나…….”
뻔히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눈에 보여서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회장님까지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잠자고 있던 호랑이가 발톱을 드러낸 것일까요?”
“잠자던 고양이가 냥젤리를 드러낸 것이죠. 혹시라도 그녀석이 제게 반기를 들까봐, 걱정되시나요?”
나와 홍기도가 딴에는 긴밀한 관계를 자랑한다고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다를 수 있는 법이다.
더욱이 조회장의 곁에서 회사 내부를 단속해온 양실장이라면 이런 일이 가벼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의 홍기도 과장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빨빨거리며 요리조리 쏘다니며 인디게임 개발 준비를 착착 진행해가고 있다.
요즘 들어 가끔 기특할 때가 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웃음이 날 정도다.
“저는 한 번쯤 져주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져준다고요?”
“네. 저렇게 열성적으로 준비한 일이 큰 성과로 돌아오면, 앞으로도 더욱…….”
“양실장님.”
“네?”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홍기도는 절대 그런 놈이 아닙니다. 목적 달성하면 배 두드리며 다시금 양지 바른 곳 찾아서 낮잠 모드에 들어갈 놈이죠.”
“으음……. 그건 좋지 않군요.”
“그러니 전력으로 상대해줄 생각입니다. 어쨌든 모두가 열과성을 다해 노력하는 것은 회사로서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내 개인적인 즐거움까지!
“뭐 표세인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어쨌든 신규 자회사는 그 느낌으로 진행하면 좋겠네요. 직접 부회장님께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백회장에게 심어놓은 덫을 재정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예상보다 더 큰 덫이 준비되어 버렸다.
백회장님. 성격도 보통 아니시던데, 뒷 목 잡고 쓰러지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크크큭.
그게 제일 문제일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