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부장님.”
드디어 승진이 발표되었다. 고부장은 이제 고이사가 되었고 나는 정식으로 표세인 부장이 되었다.
“고마워. 하지만 딱히 변하는 것은 없을 거야.”
“그렇겠죠. 부장님은 얼마 전부터 팀장이라기보다는 이사님들이나 할 법한 업무만 보셨잖아요.”
“하하, 그런가.”
팀원들의 축하를 들으며 기뻐하는 와중이었다.
“표세인 부장.”
“고이사님!”
마침 이사로 승진한 고이사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고마워. 애썼어.”
고이사는 내게 악수를 건네며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이렇게 될 수순이었죠.”
게다가 정말로 내가 한 것은 없다. 자연스럽게 공석이 생겼고, 각 파벌에서 자신쪽 사람에 대한 승진건의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이사는 연차로든 영향력으로든 딱히 경쟁자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재무이사 역할을 맡아오던 함전무의 퇴임으로 어차피 그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
여러모로 일찌감치 정해진 수순이었다.
“지난번에 말한 대로 이 빚은 꼭 갚을 테니, 염려 놓으라고. 우리 재무팀은 언제나 표부장 뒤에 서 있다는 것, 알지?”
“뒤 말고 옆에 서있는 것으로 하죠.”
“하하하, 언제나 말도 이쁘게 한다는 말이지. 그럼 나는 가보겠네.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아서 말이지.”
“네. 나중에 따로 한 번 뵙지요.”
“그러자고.”
고이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기획팀 팀장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그건 지금 고민 중이야.”
우리팀은 맥베스 소속이지만, 반쯤은 내 전용팀? 이라는 느낌이다.
“어차피 다들 조만간 계약서 다시 써야할 테니까.”
“계약서를 다시 써요?”
“물론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지만, 기둥소프트로 옮겨야 할 것 같아서.”
“하하하! 이 몸을 스카웃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일단 고기를 앞에 두고 교섭을 시작하자!”
“……일단 홍기도 빼고 조만간 다들 계약서 보내줄게. 나름은 배려해줄 생각이긴 한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나, 우려스러운 점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줘.”
“나를 무시하지 마라!”
“맥베스 소속으로 남고 싶다고 해도 이해하니까. 아무래도 맥베스는 대기업이고, 기둥소프트는 신생이니까, 연봉 부분에서는 다소 신경 써주겠지만 혹시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좋아요!”
다행히 남궁원과 함송희는 불만이 없는 것 같다.
“권태인 차장님도 고민해보세요.”
“네? 네…….”
우리 애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권태인은 차장급이다 보니, 고민이 많이 될 것이다.
“아무튼, 당분간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맡은 업무에 집중해줘.”
“넵!”
“그런데 오늘도 어디가세요?”
“가지는 않는데, 자리에 붙어있지는 못할 것 같아.”
“요즘 바쁘시네요.”
“너희도 모두 바쁘잖아.”
이제 오행전기의 출시일을 발표하고 거기에 맞춘 1차 프로모션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 맞춰, 우선 쉬린칭과의 일을 정리해야겠지.
“아무튼 오늘은 업무미팅이 있어.”
“미팅?”
“쉬무빙을 만나야 해. 홍기도 너는 따라오고.”
“걔 한국말 잘하니까, 전 필요 없지 않아요?”
“헛소리 말고 따라와, 혹시 모르는 단어라도 나오면 어쩔 거야.”
나는 발빼려는 홍켓몬을 포박했다.
*
*
*
“조연아입니다. 반갑습니다.”
-쉬린칭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상을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두 사람.
한 명은 판호 발급을 결정하는 기관의 총국장.
다른 한 명은 국내 굴지의 게임 개발사의 부회장.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이 정도로 젊고 아리따운 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동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귀찮은 일이 많지요.
젊은 야심가들이 으레 겪어야 하는 고충을 두 사람은 말없이도 공유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이번 영상통화를 제안한 것은 조연아쪽이었다.
물론 쉬린칭은 굳이 듣지 않아도 용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제안에 대한 답이 무척 궁금했다.
지난번에 자신이 낸 문제는 절묘한 묘수로 풀어갔다. 하지만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표세인과 홍기도를 휘하에 둔 젊은 여장수의 지휘 솜씨가 궁금했다.
비슷한 연배의 여성 경영인. 살짝 경쟁심까지 발동할 정도.
“일단 이번 일은 우려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까?
말투에서 이미 예상하였음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굳이 의문문이었다.
“꽌시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맥베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표세인 부장에게 용건을 전달한 것은 다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요.”
-부장으로 승진하셨군요. 솔직히 왜 아직도 부장에 머물러계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조금 걱정이군요.
“그건 본인의 요청이기도 하고, 내부의 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표세인 부장님이야말로 맥베스의 핵심 자원 아닙니까?
우려의 말에도, 내부의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전부 무시한 채로, 자신의 말만을 이어간다.
기 싸움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주도권을 위한 포섭이라는 느낌.
그렇다면 이쪽도 거기에 맞춰주는 수밖에 애초에 조연아의 사전에 물러남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중국 출장 중에는 정작 홍기도 과장에게 온통 신경이 몰려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우리측 인재들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
한 방 먹였군.
쉬린칭의 침묵에 조연아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홍기도 과장을 향한 관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설마 직접 개인적 관심이라고 고백할 줄은 몰랐다.
역시 젊기 때문일까?
아니, 역시나 노련한 수다. 차라리 솔직히 말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음을 몰라서 종종 실수를 범하는 것이 대표적인 젊은이들의 실수니까.
“개인적이라고 하시니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지요. 하지만 경영자로서 우리 직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불편하군요.”
-정말 표세인 부장을 일개 직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둥 소프트 지분 비율도 그렇고…….
뭐랄까, 이럴 때마다 새삼 표세인이라는 남자에 대해 놀라게 된다.
‘나도 네 직원이야.’
어쩌면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이 아닐까?
외부의 시각으로 볼 때, 이제는 표세인을 일개 직원이라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다.
기둥소프트의 대표라는 직함부터, 그 본인이 주변에 퍼트리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자신을 맥베스의 직원이라고 자처한다.
이것이 경영자로서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게다가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이미 수조원대의 자산가다.
어차피 어지간한 외부의 유혹으로 표세인을 흔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기둥소프트 설립에 조회장이 이만한 양보를 했던 것은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 아니었을까?
순간 가슴 어림이 따뜻해지고 자신감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등을 떠받쳐주는 주변의 섬세한 손길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렇기에 조연아는 망설임 없이, 그녀가 원하는 스탠스를 유지할 수 있다.
“앞선 무례와 더불어 이 질문까지만 참겠습니다. 예. 표세인 부장은 명실상부한 맥베스의 직원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으시다면, 이 부분은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조연아의 단호한 대답에 쉬린칭은 곧장 한발 물러섰다.
“어쨌든 지난번의 제안. 그것은 우리와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제스쳐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네. 다소 제가 마음이 앞선 탓에 실수가 좀 있었지만, 그 뜻은 분명합니다. 맥베스와는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군요. 저희도 동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조연아는 양실장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꺼내 들었다.
“맥베스, 기둥소프트, 그리고 카이두가 합자회사를 설립하는 거지요.”
-중외합자말씀이시군요.
중국에서는 합자회사를 중외합자라고 부르며, 중국 정부의 외자 제안지침에 따라 외국계 대기업들이 중국시장 진출을 위해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쉬린칭에게는 무척 익숙한 개념이었다.
“게임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중심으로 한, 회사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일단 선행사업으로는 한국게임들에 한정해서 실행해보아도 좋겠지요.”
-…….
쉬린칭은 잠시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그저 기둥소프트의 지분이나 투자하려 했었던 것인데, 합자회사라…….
-만약 그 계획이 진행된다면……. 맥베스는 향후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한국게임사들의 명줄을 틀어쥐게 되시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영향력확대는 꽌시인 당신에게도 기쁜 일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엮여버리면, 정말로 나중에 발을 뺄 수가 없다.
“거절하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맥베스를 건너뛰고 표세인 개인에게 제안을 했던 무례를 사과하기는커녕 못 박게 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예. 하지만 조금 서둘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둘러야 한다고요?
“저희는 이 기회에 오행전기 마케팅을 첫사업 아이템으로 삼고 싶으니까요.”
-경험도 없는데, 다소 빠르지 않습니까?
“맥베스 아메리카의 미디어 제작 기술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또한, 카이두의 노하우가 더해진다면, 안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닙니까?”
듣고보니 그렇다.
확실히 급히 생각해낸 아이템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짜임새가 느껴진다.
-쉬무빙을 통해서 보고를 받은 후에 확답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시간을 끌지는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 대면치고는 무척 건설적인 대화였군요.”
건설적인 대화.
어쩐지 맥베스 관련 인물들과 엮이면 어쩐지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끌려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어쨌든 행운이 계속 된다.
이것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남은 것은 실무자인 쉬무빙이 제대로 사안을 검토해서 보고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
홍기도와의 과거사 같은 문제로 좀처럼 페이스를 지키기가 쉽지 않은 자신과는 달리, 쉬무빙은 그런 것이 없으니까.
*
*
*
“오빠, 지난 번에 너무 멋있었어요.”
“오, 오빠?”
쉬무빙의 말에 양실장이 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회사에서는 직급으로 불러야지. 그리고 오늘부터 부장님이야.”
홍기도가 누군가에게 사회생활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아! 그렇네요. 표세인 부장님. 지난번에는 너무 멋지셨습니다.”
“아, 아니……. 굳이 왜 그걸 반복하는 거야. 술자리에서의 일은 잊어.”
“헤헤헤,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양실장님, 죄송합니다. 진행 부탁드립니다.”
“하하,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나중에 꼭 좀 공유 부탁드립니다.”
왜 제가 아닌 홍기도를 보고 말하시는 겁니까.
“어쨌든 주요 내용은 이 문서 그대로입니다. 세부적인 계획은 상호 보완을 거쳐야겠지만…….”
양실장의 말에 쉬무빙은 곧장 업무모드로 돌입했다.
영어로 적힌 문서인데도, 읽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굉장한네?’
‘중국애들이 속독법 같은 잡기에 능한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건 몰랐네.
어쨌든 순식간에 서류 내용을 검토한 쉬무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아이템이네요. 마침 서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조합이기도 하고요.”
“별다른 우려 사항은 없습니까?”
“우려 사항이라고 한다면……. 한가지 있네요.”
“뭡니까?”
“이거 맥베스측 담당자가 누구죠?”
“그건 아직…….”
“그 부분이 제일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쉬무빙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내 돈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