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양성태의 하루는 언제나 규칙적이다.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를 굽는다.
달걀 프라이 하나를 곁들여 평온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그의 아내는 해외 출장이 잦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결혼 후에도 이렇게 혼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익숙했다.
오늘도 여느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내린 커피의 향을 즐긴 양성태는 샤워 후 출근 준비를 끝마쳤다.
여기까지는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하지만 집을 나선 이후, 양성태는 평소와는 다르게 맥베스가 아닌 엠씨소프트 본사로 향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엠씨소프트의 대표, 설동은의 비서가 양성태를 맞이했다.
“설대표님은 자리에 계십니까?”
“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설동은의 방으로 향한다.
“일단 상황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분명히 보조를 맞추기로 하지 않았나!
설동은 아침부터 스마트폰을 붙잡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대화랄까, 일방적인 호통을 듣고 있는 상황이랄까…….
바깥까지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스마트폰 너머에 있는 상대의 다급한 마음이 전해졌다.
설동은은 양성태를 발견하고는 손짓으로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무튼 이 일에 대해서는 저희도 검토 중이니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지금 손님이 오셔서 더 이상 대화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봐! 설대표!
“후우…….”
설동은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하고 깊은 숨을 토했다.
“백회장님은 여전히 정정하신 것 같습니다.”
“정정한 정도가 아니지. 이번에 자네들이 제대로 불을 질러준 덕분에……. 중간에서 내가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야.”
설동은은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중간이라…….”
“나름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의외로 중간에 서있기가 쉽지 않은 일들이 많지요.”
양성태의 말에 설동은은 비릭한 미소를 지었다.
“좀 봐주라고, 지금까지 한참 시달리는 모습 봤잖아.”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양성태 역시 특유의 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동아줄을 준비해오신 건지. 대신 칼을 휘두르라고 종용하는 건지……. 벌써부터 겁이 나는군. 커피?”
“아니요. 녹차로 부탁드립니다.”
“커피와 녹차 부탁해.”
인터폰을 통해 음료를 주문한 설동은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금새 음료가 준비되고 두 사람은 잠시 목을 축인 후에 대화를 이어갔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할지 너무 뻔한 상황이라서, 되려 겁이 나는 군.”
“그러셔야 할 겁니다.”
“응?”
평소 양성태 답지 않은 멘트에 설동은은 살짝 당황했다.
“내가 오해했나? 나 지금 진짜로 협박받는 건가?”
“네.”
“뭐?”
양성태의 말에 설동은은 몇차례 기침을 했다.
“대체 지금 무슨 꿍꿍이인거야? 백회장 말대로 국내 개발사들 싸그리 지워버릴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설마요.”
“그래. 그렇지.”
피해망상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백회장이 꼭두새벽부터 설동은을 괴롭힌 것이 바로 그런 망상이었다.
맥슨을 폭락시킨 맥배스의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될거라고 생각하는가?
동종업계 경쟁사의 주가를 농락하는 행보를 가만 지켜보다가 뒷감당을 어찌할 생각인가?
평소라면 설동은도 이런 부분에서는 강경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일은 시작부터 백회장의 허물이었지 않은가?
당장 자신에게도 맥베스를 공격하자고 손을 내밀지 않았던가?
“그럼 제대로 한 번 말해줬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내가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또 영문모를 대답이었다.
평소에도 양성태가 나이답지 않게 선문답을 즐기는 편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대답의 성격이 확연히 모호했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조롱당한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설동은이라는 남자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기에 나름의 선을 절묘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표세인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알지. 잘 알지.”
처음 양성태의 소개로 만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벌어진 일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중국 게임 시장의 거물인, 쉬린칭을 포섭하고 그녀가 총국장에 앉으면서 단번에 합자회사를 만들어 마케팅 라인을 틀어쥐어버렸다.
이후 맥베스를 노리던 맥슨의 침몰까지…….
‘이 모든 것이 그 남자 혼자만의 수완일 수는 없겠으나……. 상당한 공을 세웠겠지.’
설동은은 여전히 표세인의 가치를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가절하한 상태에서도 절로 소름이 돋을 지경!
“틀렸습니다.”
“?”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
“표세인이 그린 그림. 그리고 표세인이 손쓴 그대로입니다.”
“!”
양성태는 허언을 하는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누군가의 이름값을 섣불리 치켜세우지도 않는다.
으레 높은 사람들을 모시는 이들은 저마다 누군가를 추켜세우는 습성을 갖게 된다지만, 타고난 기질과 조회장의 담백한 성품이 양성태라는 인재를 키워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가 있나?
“표세인에 대해서는 나도 조사를 안 해본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럴수록 모르겠더군. 딱히 이렇다 할만한 것이 없던데?”
설동은의 말에 양성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뭐지? 원래도 자네 속을 훤히 들여다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안개가 자욱한 느낌인데?”
평소에도 도무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고 또한 그것이 양성태의 매력인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그럴듯한 배경을 등에지고 그저 앞에 놓인 계단을 밟고 올라섰을 뿐인 인간에게는……. 뭐랄까, 감동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법이지요.”
게임 업계를 넘어 주위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의 수 없는 러브콜 속에서도 오롯이 조회장의 곁을 지킨 양성태가 아니었던가.
드디어 설동은은 양성태의 진면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거였나? 조회장님을 그토록 따르던 이유가?”
“백회장님도 집안 덕을 좀 보셨죠. 하지만 조회장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IT신화의 주역 중에는 이른바 흙수저라 부를만한 이들이 제법 있지만, 그래도 정점을 찍은 이들은 대부분 그럴듯한 집안 출생인 경우가 많았다.
대학시절 동아리 방에서 키득거리며 제 손으로 프로그램을 짜올리며 밴처 신화를 이룩한 이들은 극소수이고, 그 중에 가장 이름난 인물이 바로 조양길이었다.
“저도 딱히 부모 덕을 보고 자란 것은 아니라서요.”
“아, 그렇지 자넨……. 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제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매료되지요.”
“완전한 오판이었군. 양성태라는 남자가 그런 감상적인 인물이었다니.”
양성태가 감동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누가 상상이나했었겠나?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만 보이던 남자가 아닌가?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니까. 그러니까 더 끌리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예술계에 종사하는 아내에게도 그랬다. 예술이라고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감정적이나 못해 격정적인 여자를 만난순간, 마음의 벽이 산산히 부서졌었더랬다.
“재미있군. 하지만 지금 굳이 그것을 말했다는 것은……. 조회장님 이후……. 표세인쪽에 완전히 설 것이라는 뜻이군.”
“네. 저는 운이 좋지요. 표세인은 저보다 연배가 아래입니다. 제가 은퇴할 때까지, 그 사람 하나만 바라보고 보필하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랜시간 설동은은 끊임없이 손길을 내밀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지만, 지금 이순간은 달랐다.
완벽한 결별이다.
“좋아. 그건 확실히 이해했어. 약속하지. 더 이상 어설프게 집적거리는 일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핵심은 표세인. 오케이. 양성태를 사로잡은 그 매력남의 이름이 거듭 언급되는 이유는 뭔가?”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뭐?”
저희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양성태는 분명히 ‘저’라고 말했다. 양성태나 설동은이나, 말의 토씨 하나에도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담아내는 타입들이다.
“자세히 듣고싶군.”
“이제 곧 조연아 부회장을 필두로 맥베스의 선봉에는 표세인이 설 것입니다.”
“그렇겠지.”
“현재 포지션에서는 그 표세인을 떠받치는 것은 저와 문이사라는 그림이 완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사실 내부에는 그보다 다소 복잡한 사정들이 깔려있습니다.”
점점 이해가 가질 않는다.
회사 내부의 일을, 그것도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소상히 털어놓다니?
“제 뒷배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뒷배? 지금 그 이야기에 자네에게 무슨 뒷배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는데?”
“필요합니다. 저도 다소 놀랐지만……. 저도 욕심이라는 것이 생기더군요.”
“욕심?”
“네. 표세인의 오른팔이 되고 싶다는 것.”
“허. 허허. 허허허……. 농담하는 성격은 아니지?”
“예.”
그래. 아닐 것이다. 그것만은 설동은도 확신하고 있었다.
“문이사가 그정도였나? 나름 해볼만하지 않나?”
문상훈의 능력이야 상당하다지만, 양성태가 자신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라고는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문이사 하나면 어떻게 되겠는데…….”
“?”
“조금 지나치달까…….”
“지나쳐?”
“위기감이 느껴진달까?”
“위기감?”
“아무튼 그런 상대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설동은 대표님의 조력이 좀 필요합니다.”
“허허…….”
맥베스에 인재풀에 대해서는 나름 소상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지?”
“곧 인디게임을 개발할 기회가 생깁니다.”
“인디게임?”
“그쪽에서도 알음알음 시도하시지 않습니까. 나름 주종목은 달리 잡으시겠지만.”
“뭐 그렇지.”
국내 개발사들이 모바일 시장의 정체를 피해 새로운 돌파구로 PC게임 시장을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인디게임 시장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때, 제가 도움을 받을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후로도 협력관계는 공공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흐음……. 뭔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알겠어. 하지만 맨입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닐테고…….”
“물론입니다. 단 한번!”
“한번?”
고작 한번?
“단 한번, 제가 설대표님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지금 그게 대체 무슨?”
“언젠가 그 시기가 왔을 때. 좋은 거래였다고 생각하시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
“이번 맥슨 사태의 시작은 백회장님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표면상의 그림일 뿐이죠.”
“라는 것은?”
“더 큰 폭풍이 몰아닥칠 것입니다. 표세인은 단지 게임 개발에만 몰두할 그릇이 아닙니다. 그는 게임 업계의 생태계 자체를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표세인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게다가 서슴없이 업계의 중역들에게도 모든 것을 뒤바꾸겠다는 의지를 서슴없이 드러내고있지 않은가?
“다소 모호한데?”
“언제나 목격하기 전까지는 모호한 법이었죠.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스마트폰의 등장처럼, 이 업계는 그 모호한 발상과 에너지를 지닌 괴물이 선도하는 세계입니다. 이것만은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지요.”
“으음…….”
“그때가 되면 분명 설동은 대표님께서는 제게 큰 감사를 하게 되실 겁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성태의 확언에 설동은은 그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체 누구를 그렇게 신경쓰는 건가?”
“그건……. 아직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자네 뒤를 봐주면…….”
천하의 엠씨소프트 대표 설동은이 뒷배가 되어준다면 감히 누가 그 앞에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나?
하지만 양성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설대표님.”
“응?”
“쉬린칭. 감당 가능하십니까?”
“어?”
“그냥, 쉽지 않은 게임이라는 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양성태는 끝까지 자신의 고충을 완전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너 요즘 이직 준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