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양실장님은 뭐랄까, 양실장님 답다는 느낌이네.”
인디게임 개발을 엠씨소프트 측과 손을 잡고 진행하는 것.
확실히 양실장 답다는 말이 나올만한 독특한 한 수였다.
“형평성 문제라고 생각해?”
“그럴 리가, 양실장님은 개발자도 아니잖아. 오히려 고마운걸? 이로써 비개발자직군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잖아.”
살짝 걱정했는데, 연아는 오히려 양실장의 방식을 환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나 이상무님이랑 팀먹기로 했어.”
“이상무님이랑?”
연아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뭐 대충 이런 반응일거라고 예상은 했다.
“홍기도 과장에게는 아버지가 합류하더니, 오빠 쪽에는 이상무님이야? 뭔가 좀 묘한 그림이네?”
직급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팀을 구성하는 것은 연아 본인부터가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에서 손꼽히는 상급자들이 앞다투어 참여하게 되는 것 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
“이상무님이 회장님과 승부를 겨루고 싶으신 것 같아.”
“이걸 바람직하게 여겨야 할까?”
감히 회장과 승부를 겨루겠다는 생각이 다소 걸리는 것일까?
확실히 부회장이자, 차기 회장으로서는 신경 쓰이겠지.
“에이, 순수한 경쟁이잖아.”
“나도 알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좀 과열 경쟁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라서…….”
아, 경쟁 자체는 괜찮다는 거군. 다행이네.
“사실 나 좀 흥미가 있는데, 오빠 계획은 뭐야?”
“부회장으로서의 질문입니까? 아니면 내 여자친구로서 하는 질문이야?”
“음……. 둘 다?”
“비겁하다.”
“어서 이실직고 하거라.”
연아는 키득거리며 채근했다. 이런 귀여운 채근이라니 역시 비겁하다.
내 여자친구는 너무 비겁하다!
“지난번에는 중국풍게임이었으니, 이번에는 아주아주 한국적인 게임을 만들어 보려고.”
“한국적?”
“넌 웹소설 안보지?”
“응.”
연아는 틈만 나면 책을 읽지만 그것들은 경제나 경영 관련 전문서적에 국한된다.
애초에 종이책만 고집하는 덕분에 웹소설을 접할래야 접할 수가 없는 것.
“오빠는 가끔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지?”
“응.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것들 몇 개 정도는 독파했지.”
“그래서 그게 정확히 어떤 건데?”
“한국식 이세계물이랄까?”
“응?”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 같은 것이 튀어나오고, 주인공은 특별한 스킬을 얻어 적들을 물리치는……. 뭐 그런 느낌?”
“그 플롯의 재미 포인트는 뭐야?”
“일단 배경이 현대라는 것에서부터 몰입감이 높고 기대감이 쉽게 높아질 수 있지.”
“그러고 보면 현대 배경에 몬스터라면……. 보통은 좀비지?”
그렇다. 현대 배경에 몬스터하면 단연컨대 좀비가 압도적이다.
“과거 일본게임 중에는 이런 배경의 게임들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거의 없는 편이지.”
“차별성은 있다 이건가?”
“나름?”
“그래서 규모는?”
뭐지? 왜 이렇게까지 캐물어 오는 걸까? 상사이자, 여자친구이니 물어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분명히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회장님의 사주냐?”
“음……. 부탁을 받긴했는데, 그것보다는 나도 일단 알아두고 싶어서.”
세상에! 회장님 너무 무섭게 나오는 것 아냐?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 이거지?”
“화난 건 아니지?”
“화나긴! 완전 흥미진진한데?”
경쟁자가 불타올라야, 이쪽도 흥이 나는 법이다. 조회장이 이정도까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전력투구를 하려 한다면 나 역시도 그에 맞춰 전략을 구상하는 수 밖에!
그리고 난 이런게 너무 좋다.
“정말 재미있겠다.”
“신나서 다행이네.”
연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튼 규모라고 한다면 실사 그래픽으로 가는 대신 맵 규모를 좀 줄일 생각이야.”
“어? 말해줘도 괜찮아?”
“그럼 물론이지.”
“……오빠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네.”
“응응. 걱정말고 회장님께 전해드려.”
“자신만만하네?”
“물론이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빠가 누군데?”
“조연아 예비신랑.”
“크크큭. 그거 좋은 타이틀이네.”
자, 어디 한 번 해봅시다.
나도 슬슬 홍켓몬과 대마왕(조회장) 콤비 공략을 준비해애겠다.
*
*
*
“양실장이 엠씨소프트를 끌어들였다고?”
문상훈은 최기환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만만치 않구만……. 참 기발하단 말이지.”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도 양성태 보다는 문상훈을 동경하던 최기환이었다.
사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에 외부 회사를 끌어들이다니?
최기환은 콧김을 뿜으며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우리도 개발하다보면 외주 없이는 힘들어. 딱히 형평성 운운할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어차피 양실장은 개발자도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상과는 다른 문상훈의 견해에 최기환은 그저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우리 일이나 잘하면 돼. 어차피 외부조력으로 이 문상훈이의 프로젝트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럴 리가 없죠!”
문상훈이 주도하고 실장 3인방이 뒷받침한다.
이번 오행전기의 출시건만해도 자신들의 저력을 여실히 증명하지 않았나?
개인의 역량이라면야, 근래 표세인에 견줄만한 인물은 없다.
하지만 팀 단위라고 한다면 실장 3인방의 역량은 막강하다.
“양실장은 그렇다 치고, 도이사쪽은 어떻지?”
“그쪽은 시끌시끌합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상당한 인원들이 모여서 연일 회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법 골치 깨나 썩고 있겠군.”
전무군단 장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든 시점. 도이사는 이번 이벤트를 통해 완벽한 통제력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의 끝에 문상훈을 누르는 것으로 건재를 과시하려 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사실 도이사 보다는 그……. 책임자라고 나섰던 과장급 친구 있지 않습니까?”
“홍기도?”
“네. 네. 그 친구쪽이 저는 더 신경이 쓰입니다만?”
“글쎄……. 나도 그 친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말이지.”
홍기도는 양성태와 제임스와는 종종 어울려도, 유독 문상훈에게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표세인과 죽이 잘 맞는 부하직원이라는 것 정도가 문상훈이 알고 있는 홍기도에 대한 전부였다.
“게다가 이게 진짜인지, 의심이 되는데…….”
최기환은 좀처럼 말을 망설이는 일이 없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망설이게 되는 소식.
“뭔데 그러지?”
“회장님이 그 친구 팀에 합류하셨다는데요?”
“농담이겠……. 아니지, 자네는 농담 같은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그정도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면 오히려 3인방 중에서 가장 먼저 이사 직함을 손에 넣었으리라…….
“회장님이 직접 나서실 줄 몰랐는데……. 그럼 정말로 과장급 인사 밑에서 개발에 도전해보시겠다는 건가?”
“설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 설마 그게 될 턱이 없지.”
이번 프로젝트에 한해, 직급을 완전 무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미 자신을 포함한 이사진들이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겠죠?”
“그래. 말도 안되지.”
조회장은 무시.
저건 결코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는 팀이다.
그저 조회장이 지시하고 팀원들이 따르는 모습이라면, 기존과 다를 것이 무언가?
인디게임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려는 상황에서 기존의 구태의연한 모습을 고수하는 팀은 크게 우려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는 많이 올라왔나?”
각 개발실의 젊은 직원들이 올린 아이디어를 규합해 출발한다.
이것이 그나마 올바른 접근 방식이 아니겠나?
“물론입니다. 몇몇은 제법 그럴듯한 아이디어들이 보입니다.”
“그래. 게임 업계는 언제나 젊은 아이디어들이 이끌어가는 법이지. 채택된 친구를 팀장으로 앉히고 한번 이끌어보게 하자고.”
문상훈은 미국지사의 대표로 이러한 형태에는 익숙했다.
그는 도이사 진영처럼 허울뿐인 직급폐기 시늉을 할 생각은 없었다.
좋은 리더의 자질이란 원래 직급과는 관계 없는 법이다.
이 기회를 통해 좋은 인재를 새롭게 발굴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회장님이든, 도이사든……. 허울뿐인 흉내로는 이 싸움에서 못이겨.”
문상훈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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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회장님 대체 언제적 스타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언제적이라니! 나는 요즘도 요즘 게임하고 있어!”
문상훈의 예측은 완전히 박살났다.
홍기도는 무려 맥베스의 창립자이자, 국내 게임업계의 전설인 조양길에게 호통을 치고 있던 것!
“어, 언니 저 무서워요.”
“이건 나도 좀 무섭다.”
홍기도와 조양길이 다투는 모습은 남궁원까지도 넋을 잃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인디게임은 트랜드가 생명이라니까?”
“아니죠! 대형개발사에서 손대지 않는 올드 스쿨이면서 고정 타겟층이 있는 게임에 집중해야 한다니까요?”
젊은 홍기도가 올드스쿨 게임을 주장하고, 연로한 조양길이 트랜디한 게임을 지지하는 다소 언밸런스한 상황.
“표세인, 그 녀석을 생각해봐. 언제나 트랜드를 철저히 공략해서 승승장구하잖나!”
“전혀 아니에요. 필요할 때, 필요한 선택을 하는 것뿐이에요. 표세인 부장은 기본적으로 어디에 메어있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표세인과 같은 방식으로 표세인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음!”
표세인을 쓰러트린다! 라는 대목에서 조양길은 짧게 신음했다.
“자네 진심이군.”
“물론입니다. 저 진지하다고요.”
홍기도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쟤 또 반말했다. 적어둬.”
“네. 언니.”
“……나 진지모드 일때까지 이러기냐?”
“니가 진지하긴 무슨……. 그리고 애초에 회장님도, 너도, 정말로 표세인 부장을 쓰러트릴 생각이 있으신 거에요?”
“무슨 말이지? 지금 내가 뭘 위해 이곳에서 목이 터져라 떠들고 있다고 생각하나?”
정말로 이런 뜨거운 회의가 얼마 만이던가? 한창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라서 숨이 찬 와중에도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결국 올드스쿨이네, 트랜드네, 답 없는 이야기만 떠들 뿐인데, 결국 명확한 계획이 없다는 거잖아요.”
“으음……. 이것저것 생각해보긴 했는데…….”
조양길은 할말이 없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렸다.
“너도 할말 없지?”
남궁원의 말에 홍기도는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표세인 부장을 대입하면 각이 안나와서, 자꾸 포기하게 되네.”
결국 홍기도 역시 뾰족한 아이디어는 없는 상황.
“일단 표세인 부장님에 대한 생각을 지워!”
“내 목적이 표세인 부장을 쓰러트리는 건데?”
그 이전에 회사 업무이지만……. 홍기도의 머릿속에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표세인에게 한방 먹여준다는 생각뿐.
“지금 상황에서는 표세인 부장을 신경쓸수록 스텝이 꼬일거야.”
오행전기를 기획하며 표세인을 의식하며 기획한 경험이 있는 남궁원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좀 더 목표를 명확하게 잡고 그것에만 생각을 집중해. 표세인이라는 이름을 의식하면 아무것도 못하게돼.”
“흠, 이거 훌륭한 조언이군.”
조양길은 선뜻 인정했다.
“이 친구도 영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지금 오행전기 메인이에요. 못 움직여요.”
아무리 남궁원이 일벌레라도 몸이 두 개인 것은 아니다.
이제 막 오행전기라는 대형 타이틀이 중국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상황.
게다가 이런 장르의 특성상, 곧 거대한 파도가 되어 시장을 휩쓸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국 게임을 언급하지 않는 중국 관영 방송에서조차, 중국인들의 취향과 문화적 특색을 잘 살렸다며, 칭찬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
남궁원은 움직일 수 없었다.
“회장님 권한으로 얘 어떻게 안 돼요?”
“……적당히 해라.”
남궁원은 짜게 식은 눈빛으로 홍기도를 흘겨보았다.
“운영으로 넘기면…….”
“……적당히 하시죠.”
이 회사 이대로 괜찮은가?
까라면 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