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하하하! 친구야! 잘 생각했다.”
윤현창은 내가 얼굴을 들이밀기가 무섭게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장님.”
김순영 역시 어색하나마 안도의 기색을 띄고 있었다.
“부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해병대 콤비도 90도 인사를 하며 나름대로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쩝, 아무튼 잘해봅시다.”
나로서는 그저 입맛만 다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기획과 프로그래머는 커뮤니케이션이 생명이다. 그런 만큼 서로 안면이 있는 이 녀석들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상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차장님, 걱정마십시오. 이 녀석이 누구입니까, 표세인 부장입니다! 맥베스의 마이다스! 손만 댔다하면 대박행진! 흥행보증수표나 다름 없는 남자!”
“……1절만 하자.”
듣고있으려니 칭찬같기는 한데, 묘하게 버겁다.
“그보다 여러분들이 우선 알아두셔야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저 이번에는 딱히 매출에 신경쓰지 않을겁니다.”
“매출에 신경을 안써?”
“네. 그렇습니다.”
게임 개발이란 예술 보다는 제품 생산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더욱이 한국 게임 업계는 그런 경향이 훨씬 강하다.
돈이 되는 MMO와 모바일 게임에만 열을 올리던 과거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런 경향은 확실하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인디게임 시장은 다르다.
보다 크리에이티브적이며 도전적인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거기에 조금 더 욕심을 덧붙여서…….
내가 원하던 색 하나 정도 입혀봐도 괜찮지 않겠나?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가 바라는 최우선 목표는 다름 아닌 서울이 등장하는 것.”
“서울?”
“네. 뉴욕, 런던, 도쿄 말고 서울이 좀 제대로 구현되길 바랍니다. 물론 인디게임이니 전부를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요.”
“그게 목표라고?”
어떤 장르나 시스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서울의 풍경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라니?
“자, 잠깐 이해가 안 되는데?”
윤현창이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그냥 서울 풍경 하나 담는 것이 어떻게 목표일 수가 있나?
“그냥 모델링 따서 넣으면 되는 거잖아. 그게 목표라고?”
“그냥이 아니지.”
“?”
“잘! 아주 잘 담아야지.”
“끄응……. 그래도 그게 목표가 될 수 있나?”
나는 피식 웃으며 창가 틀에 등을 기댔다.
“마침 우리가 나이대가 비슷비슷하지?”
김순영 차장이 가장 연장자이긴 하지만 그리 큰 차이는 안 나고, 가장 젊은 해병대 콤비도 그렇게 차이가 크진 않다.
“우리 어려서는 게임은 무조건 미국, 일본이었지.”
“그렇지.”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게임 속에 미국이나 일본의 도시가 고스란히 재현되기 시작하더라고.”
“음…….”
“나 그게 부럽더라. 그래서 이 기회에 한번 해보려고.”
“갑자기 무슨 그런 낭만 같은 이야기를…….”
“그래서 미리 말하려고 이번에 제 목표는 매출이 아닙니다. 인디잖아요. 인디스럽게 가고 싶어요. 그리고 각자 평소에 해보고 싶었는데, 적용할 수 없던 아이디어가 있다면 기탄없이 제시해주세요. 이번 프로젝트는 그런 시도들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옛날식 턴제 전투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
김순영 차장이 말을 꺼내고는 아차, 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좋네요. 턴제 전투. 저도 좋아합니다. 그만의 맛이 있죠.”
“저희는 액션이 좋은데, 이런 경우는 겹치지 않나요?”
해병대 콤비가 동시에 손을 들며 말했다.
“둘다 하면 그만이지, 무슨 걱정이야?”
“네?”
“옵션에 시스템 버튼 하나 추가해서 턴제와 액션 바꿀 수 있게 하면 되잖아?”
“아, 아니……. 그래도 되나?”
이런 경우보다 나은 것 하나를 선별해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원으로서 그런식으로 깎아내는 일에 적응하다보니, 자연적으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스스로 생각에 제한을 건다.
표세인은 그 점을 포착했다.
“눈치 보지 말고 뭐든 좋아. 적용해보자.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
내 말에 모두들 잠깐 눈치를 살피고는 저마다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좋다. 좋아.
바로 이런 것이 연아와 조회장이 바라던 그림이 아니겠는가.
“이참에 한번쯤 19금 요소를!”
“그건 안돼!”
“왜!”
윤현창이 버럭 따지고 들었다.
“국내 시장에서 19금 딱지 붙은 게임이 숨쉬고 살아남을 수 있겠냐?”
“으음……. 그건 그렇지.”
매출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유통 자체에 문제가 되는 요소는 넣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아예 글로벌 스케일에 맞춰서 볼륨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뭐 내용은 없어? 스토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서울 거리를 넣을 거면 오픈월드거나, 하나 못해 액션 장르라는 것 아니야?”
“FPS? TPS? 최소한 장르는 있을 것 아니야.”
“그것보다 혹시 이중에서 웹소설 좀 보는 사람 있나?”
“웹소설?”
“응. 한국식 이세계물. 컨셉은 그것으로 해볼까하는데…….”
“그거라면……. 김차장님 취미가 분명히 그런쪽 아니셨습니까?”
“취미라기 보다……. 아니, 취미 맞죠. 그래도 한달에 한 십만원 정도는 쓰는 편입니다.”
-짝!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박수를 쳤다.
“우리팀, 팀장님 정해지셨네요.”
“네?”
“한국식 이세계물 확실히 아시는 거죠.”
“네. 제법 읽은 편입니다. 그런데 팀장이라니? 당연히 표부장님이 리드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웹소설 내공이 그정도는 아니라서요.”
“너 설마 김차장님께 다 넘기고 슬쩍 발뺄 생각 하는거 아니지?”
“윤과장. 부장급은 그렇게 유치한 짓 안해요. 기억해두세요.”
내 말에 윤현창은 뭔가 말하려는 눈치였지만 입만 벙긋거릴뿐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게임으로 만들기에 좋을 것 같은 플롯을 연구해보죠. 참고할 만한 작품 추천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거라면 많지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금방 리스트를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
아니, 너무 많이는 말고요.
좀 과하게 눈이 빛나는 것이 살짝 걱정 되는데?
*
*
*
“윤과장님과 손 잡으셨다면서요?”
“오~ 정보가 빠르네? 그러나는 너는 회장님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며? 컨셉은 잘 잡았냐?”
“그럼요. 장난 아니죠.”
“장난 아니긴, 죽어라 장난만 치다 왔으면서…….”
“야!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떻게 해!”
남궁원의 말에 홍기도가 빽! 소리쳤다.
장난친건 맞냐…….
“뭐, 열심히해라.”
“크윽……. 그런 따뜻한 눈빛 뭐죠? 지금 무시하는 겁니까?”
“아니야. 격려하는 거야. 파이팅! 힘내.”
“크으윽……. 두고보자.”
홍기도는 정말로 분한 것인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부장님은 이번에 어떤 게임을 만드실 거에요?”
“부장님이 말해 주시겠어?”
함송희의 질문에 남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말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니들 웹소설 좀 보냐?”
“저는 로맨스 많이 봐요!”
“저는 아주 유명한 것만 가끔 보죠.”
“저는 방금 전까지도 읽고 있었는데여?”
마지막에 이상한 멘트가 하나 섞여 있던 것 같지만……. 일단 패스하자.
“한국식 이세계물 컨셉으로 하나 만들어보려고 생각 중이야.”
“오! 역시 부장님은 거침이 없으시네요. 저희쪽은…….”
함송희가 힐끔 못 미덥다는 눈초리로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나, 나도 곧 엄청난 아이디어가 나올 거야!”
“…….”
“…….”
“…….”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나와 남궁원, 함송희는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걱정마. 너는 그쪽 인재가 아니야.”
“제가 어느 쪽인데요?”
“아무튼, 다른 쪽이야.”
아마, 어딘가, 어떤 파트인가……. 잘하는 것이 있겠지.
“오늘 왜 이렇게 어깨를 많이 두드리세요.”
“그냥 위로해주고 싶은 그런 날이 있잖아?”
“크윽……. 진짜 두고 봐요.”
나는 분해하는 홍기도를 뒤로한 채, 함송희를 바라보았다.
“참 송희야. 지난번에 작업하던 것은 잘 진행되고 있지?”
“네. 빠르지는 않지만, 예상 일정에는 맞출 수 있을 거에요.”
“오케이. 조만간 회의 한번 하자. 필요한 인력이나, 외주 조력도 검토해봐야지.”
“넵!”
“남궁원. 너는 뭐 문제 없지?”
“네. 문제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좋아. 항상 고맙다.”
“아니에요. 제 일인걸요.”
역시 믿음직하다.
“좋았어. 자, 오늘도 힘내서 일해보자.”
“부장님이 그 자리에서 문서 작업하시는 것도 오랜만인 느낌이네요.”
“그런가?”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반문했다.
“그러고보니 우리팀도 새로운 팀장이 필요하겠군아.”
“그냥 부장님이 겸임하시면 안 되요?”
“응?”
“다들 같은 생각이신 것 아니세요?”
함송희의 말에 남궁원과 홍기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게 가장 좋지.”
“어차피 우리는 표세인 파티 같은 느낌이잖아요?”
팀원들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뭔가 고맙네. 그러고보니 요즘 우리 회식 없었지?”
“오오! 이번에 새로 생긴 고깃집이 있다는데, 거기 살치살 최고래요!”
“넌 맨날 고깃집이냐?”
“너도 좋아 하잖아?”
“싫다고는 안했다.”
“오늘 가요?”
“그래. 오늘 가자.”
간만에 우리끼리 오순도순 한잔하자. 그렇게 회식을 결정하고 다시 업무에 돌입하려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김실장님?”
연아의 오른 팔인 김인숙 실장이었다.
-표세인 부장님. 실례지만 지금 제 방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나 잠시 다녀올게.”
나는 곧장 김실장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김실장의 방에는 생소한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지난번 깨비몬 영상물 제작때 만났던 피디와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다.
어쩐지 같은 영상제작 관련 일을 하는 사람 같다는 느낌.
“갑자기 호출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부르시면 당연히 와야지요.”
“이분이 표세인 부장님이시군요. 부회장님 대신이라고 해서 조금 걱정했는데, 핏이 너무 좋으시네요.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하시니, 화면발도 잘 받으시겠어요.”
갑자기 이건 뭐지?
피디일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멀뚱거리자, 한발 늦게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김유성 피디라고 합니다.”
“표세인입니다.”
“김피디님은 이번에 게임 개발 관련 다큐를 준비중이라고 하십니다.”
“하하하. 부회장님이 너무 놓치기 아쉬운 마스크라서 표세인 부장님을 추천했을 때, 조금 서운했는데, 직접 만나 뵙게 되니. 제 기우였네요. 이 회사는 미남미녀들만 있는 것 같습니다.”
김피디는 활짝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큐요?”
갑자기 웬 다큐?
“요즘 이런 컨텐츠가 제법 인기가 있습니다. 이번에 저희 방송국에서 게임 개발자들을 모아서 다큐를 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맥베스에서는 표세인 부장님을 추천받았고요.”
“으음…….”
“혹시 언짢으십니까?”
김실장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거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부회장님이 직접 추진하신 일입니다. 물론 외부에 얼굴이 노출되는 일인 만큼 거절하시려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조금 더 푸쉬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맥슨과 엠씨소프트, 앵그리게이트와 같은 회사들도 전부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김피디는 거의 애원하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고, 김실장 역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연아의 지시라면…….’
연아 나름의 생각과 판단에서 내려온 지시일 것이다.
아마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을 봐서는 내가 정 싫다면 거절해도 좋다는 제스쳐겠지만…….
“좋습니다.”
여자친구가 까라면 까야지.
총대 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