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오행전기의 운영에 관한 부분은 차츰 우리 손에서 떠나 운영팀의 손으로 이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표세종도 드디어 인디게임 개발팀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헤헤.”
표세종은 오후에 있을 회의를 기대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표세종은 근래 부쩍 홍기도와 가까워졌다. 그들의 친분 관계의 깊숙한 부분에는 홍기도를 향한 존경심이 깔려 있었다.
표세종의 기준에서 홍기도는 존경해 마땅한 남자였다.
‘살면서 형에게 도전하려는 사람은 처음봤네.’
나이차이가 크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표세인은 워낙 다재다능한 남자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세인에게 감탄하거나 감회될뿐 경쟁의식을 표출하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단순한 시기와 질투라면 많았지만, 홍기도는 다르다.
보너스로 받은 막대한 돈을 표세인의 프러포즈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쾌척하는 배포!
표세인에게 오른팔 격으로 인정받고, 존경하면서도 그를 감탄시키려 노력하는 도전정신까지.
어느 부분 하나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드디어!
하극상 클럽의 첫 번째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인디게임 개발 회의에 참석하는 날이 온 것이다.
“뭘 그렇게 실실 쪼개냐? 뭐 좋은 일 있어?”
윤현창의 말에 표세종은 씨익 웃었다.
“아무리 윤과장님이라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는 경쟁자니까요.”
“경쟁? 너랑 나랑?”
“네.”
“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를 이해한 윤현창이 킬킬 웃었다.
“아주 신났구만. 하지만 우리 팀에 니네 형 있는 것은 알지? 미안한데 이기는 것은 우리야.”
예전에는 으르렁거리던 사이였지만, 손을 잡은 이상 이보다 더 믿음직한 아군은 없을 것이다.
윤현창은 표세인이라는 흥행 보증수표의 성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팀에 홍기도 과장있고…….”
“걔가 아직 표세인한테 비빌 짬은 아니지. 니네 팀은 아직…….”
“……회장님도 계시고.”
“……굉장한 저력을 가진 팀이지. 회장님과 함께라니, 너희 정말 부럽다야.”
윤현창은 실시간으로 멘트 방향을 뒤트는 신기한 재주를 선보였다.
“그래도 표세인 부장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맞아요. 지난번에 김차장님과 윤과장님이 원하는 바를 바로 둘 다 넣어버리면 된다고 깔끔하게 정리하실 때, 캬, 카리스마가 진짜…….”
해병대 콤비는 지난번과는 달리 표세인에게 완전히 감명 받은 모양이었다.
“혹시 저희도…….”
“없어. 나랑 김차장님도 겨우 그 녀석 설득했는데……. 그리고 니들은 운영쪽 일 도와야지.”
“네.”
해병대 콤비는 울상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둘다 넣는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에요?”
표세종이 해병대 콤비가 흘린 정보를 윤현창에게 질문했다.
“별 것 아냐. 나는 액션 게임을 원했고, 김차장님은 턴제 게임을 원했거든.”
“어? 그런데 그것들 두가지가 병행이 가능해요?”
“니 형이잖냐. 뭔가 또 놀랄만한 생각을 해내겠지. 지금은 나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른다.”
“흐음…….”
표세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수십년간 그의 동생으로 자라온 표세종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홍기도와 함께 표세인을 놀라게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표세종은 회의시간을 기다렸다.
*
*
*
“아직도 의견이 합치되지 않은 거에요?”
“…….”
“…….”
남궁원의 말에 조회장과 홍기도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서로 양보할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으음…….”
“난감하네요.”
남궁원의 뒤를 따라 한명수와 함송희도 난처하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두 사람 모두 단순한 고집싸움이 아니라, 서로가 그럴듯한 착안점을 기반으로 대치중인 상황이기에 일발적으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자네, 표세인 부장 동생이라고 했지?”
“네!”
이미 상견례에서 만났던 사이이지만, 조회장은 지금까지 표세종을 한 번도 아는체하지 않았다.
애초에 회사에서 마주친 것 자체가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네는 뭐 좋은 아이디어 없나?”
순간 모두의 시선이 표세종에게로 집중되었다.
‘아, 이거 그거다.’
어릴적부터 자주 겪었던 일.
‘제가 세인이 동생이라며?’
‘기대한다.’
뛰어난 형을 둔 동생은 좀처럼 형의 그늘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운 기분이었지만, 점차 부담이되고…….
나중에는 고통으로 변질되기 까지 했었다.
어느정도 자라면서 차츰 형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설마 기획과 프로그래머라는 다른 포지션에서도 이런 기대를 받을 줄이야.’
표세종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일단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홍기도 과장과 회장님은 각자 핵앤슬레시와 횡스크롤 샌드박스 장르를 주장하고 계신거죠?”
“그렇지.”
“그거 합칠 수는 없습니까?”
표세종의 말에 듣고 있던 모두가 잠깐 굳었다.
“합쳐?”
“방금 전에 윤현창 과장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각자 다른 아이디어를 들은 그 자리에서 함께 적용하면 그만이라고 했다더군요.”
“크큭. 하하하.”
순간 홍기도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큭. 정말 못 당하겠네.”
“?”
“회장님 저게 답인 것 같습니다.”
“저게 답이라고?”
“생각해보면 이번 인디게임 개발은 각자 아이디어를 눈치 보지 않고 기탄없이 적용해보자는 측면도 있었잖아요?”
“흠…….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맞아. 이게 무슨 중국집 짬뽕도 아니고…….”
조회장과 남궁원이 살짝 우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히려 홍기도는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너는 표세인 부장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고 했지.”
“그랬지.”
남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포함시키면 결국 원래 우리는 이것저것 안 가리잖아? 좋은 건 반드시 넣잖아.”
“그런데?”
“표세인 부장의 생각은 옳지!”
“이유가 고작 그거냐?”
“맞아! 표세인의 말을 따르면 대체로 다 잘 풀리거든?”
홍기도는 자신의 장점을 오판하지 않는다. 개발자로서의 역량은 남궁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표세인의 사고를 읽고 움직이는 것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
“일단 조합해보고 그 후에 덜어내기를 해보자, 안된다는 생각 말고 해보는 거야. 인디게임은 원래 그런 참신한 시도가 살아남는 시장 아니야?”
“뭔가 얼렁뚱땅 그럴듯한 것 같기는 한데…….”
“클클, 말로는 뭐든 쉽지. 그래서 이걸 합쳐 보자 이거지?”
조회장은 홍기도와 자신이 준비한 기획서를 번갈아 가리켰다.
“네. 우리 나름 드림팀이잖아요.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에요.”
“일단 샌드박스 페이즈와 핵앤슬래시 파트를 나누는 것부터 생각해봐야겠네.”
“그보다는 뷰가 횡스크롤과 탑뷰로 나뉠텐데……. 이걸 붙이려면…….”
남궁원과 한명수는 곧장 패드에 로직을 그리면서 검토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뭐 꼭 횡스크롤일 필요는 없어.”
“저도 굳이 탑뷰는 아니어도 되요.”
조회장과 홍기도 역시 각자의 딜을 나누며 조율에 돌입했다.
“한 건 했네?”
“제가요?”
“응. 네 덕분에 드디어 일이 진행되기 시작했잖아?”
함송희의 칭찬에 표세종은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그냥 형 말을 전해준 것 뿐인데요?”
“뭐든 상관없지, 일을 돌아가게 한 거잖아?”
“그, 그런건가요?”
“역시! 표세인 부장님이야. 거의 신이지!”
“신?”
함송희가 천장을 보며 배시시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표세종은 남몰래 하극상의 의지를 또 한 번 불태웠다.
*
*
*
“그래서 지난번에 말한 턴제와 액션을 어떻게 해결할 거야?”
오후가 되어 나와 인디게임 팀의 일원들은 회의실에 모였다.
그리고 첫 질문은 윤현창의 몫이었다.
그들은 지난번 내가 말한 두 가지 전투 방식을
“간단하지, 버튼 하나 지정해서 모드를 전환시켜버리는 거야.”
“모드를 전환시켜버린다고?”
“턴제 전투를 원하는 사람들은 턴제 전투 모드로 플레이하고, 액션을 원하는 사람은 액션을 플레이하게 하는 거지.”
“그거 일거리가 너무 많지 않나?”
따로 따로 나뉘어도 개발이 수월하지 않은 장르인데, 이 두가지를 합쳐버린다니? 개발 역량이 두배가 필요해지는 것 아닌가?
“따로 개발한다면 그렇겠지만 처음부터 이것을 고려해서 시스템을 설계한다면 프로세스를 어느 정도 간편화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말처럼 쉬울까?”
“일단 뷰만 다르게 가져가고 모션과 이펙트는 공용으로 사용하는 거지. 그러면 데미지 테이블만 따로 계산하면 되지 않겠어?”
“으음……. 딴은 그럴 듯 하긴 한데…….”
“일단 시작부터 겁먹지 말자고 인디게임 정신을 불태워 보는 거야.”
“인디게임이란 말에 좀 쉬울 줄 알았는데…….”
“원래 인디게임이 개발은 더 힘들지. 욕심이 많잖아.”
“아! 맞어! 내가 그걸 잊었다! 너 그런 놈이었지?”
흐흐흐…….
그래. 그걸 이제야 깨달았니?
나로 말하자면 개발이란 고페이, 고열정이 기본 전제된다고 생각하는 놈이지.
“아, 내가 실수 했나?”
“이미 늦었습니다. 팀원님. 들어올 때는 맘대로 와도, 나갈 때는 맘대로 못가요.”
나는 윤현창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이 타이밍에 힘쓰면 진짜 무섭거든?”
“알아.”
“이거 자율 참가잖아.”
“참가는 그렇지. 탈퇴도 자율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무서운 놈…….”
“뭘 새삼스럽게.”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일단 시스템 쪽은 각이 잡힌 것 같고 웹소설 플롯은 결이 나왔나요? 저도 일단 몇 개 정도는 읽어봤습니다.”
“제가 추천해놓고서 이런말 하긴 했지만, 역시 저는 프로그래머인 것 같습니다. 각이 안잡히네요.”
“그 말씀은?”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서울배경과 규모를 고려할 때……. 솔직히 기존 작품에서 스토리 작가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스케일이 맞지 않으니까요.”
김순영 차장은 다소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이미 이것은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웹소설은 스케일이 크다. 만약 만든다면 AAA급 오픈월드 게임이 아니라면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만 본따 놓고는 원작이라 내세우는 모바일 게임이라면 모를까.
“사실 예상했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럼 방법이 있으신가요?”
“일단은 저도 기획자 나부랭이지, 않습니까? 스토리 파트가 전문은 아니지만, 하하하. 오랜만이네요.”
“아, 하긴 예전에 세븐메이지 시나리오 초반 부분 네가 짰지.”
“응. 그랬지. 그때 정말 힘들었지.”
“그런데 이제와서 할 수 있겠냐? 너 한동안 개발 손도 안댔잖아?”
“무슨 말을! 오행전기 제외하면 계속 개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궁원에게 메인 디렉터를 넘기기는 했어도, 중간중간 도울 수 있는 기획은 내가 맡아서 쳐내기도 했다.
“그래서 컨셉은 뭔데?”
“지난번에는 조금 특이하게 가볼까하고.”
“특이하게?”
“추천 받은 웹소설을 보다보니까, 요즘 또 다른 트렌드가 하나 있잖아?”
“어떤?”
“아카데미?”
“아카데미?”
“몬스터가 출몰하는 서울 한복판. 그곳에 소총을 착용한 10대 학생들의…….”
“오오, 뭔가 그럴 듯…….”
“등, 하교길을 포함한 하루를 우리가 다루면 될 것 같아.”
“하, 하루?”
“하루는 너무 짧지 않을까요?”
내 말에 윤현창과 김순영은 당황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지…….
“저는 이거 괜찮을 것 같아요. 약간 자신이 있으니, 한번 믿어 보시죠.”
인디게임은 원래 이런 갑작스러운 아이디어 하나를 밀어붙이는 맛이 또 묘미가 아니겠나!
홍켓몬 그리고 회장님.
기대하시죠. 이번에도 깜짝 놀랄만한 물건 하나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블루칩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