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 출구만 밝은, 어두운 조명의 복도
말쑥한 정장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회사의 복도를 지나간다.
이 남자는 무엇을 위해 오늘도 출근을 하는 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즐거움을 위한 매체들이 존재한다.
소설, 만화, 영화, 그리고 게임.
왼쪽으로 갈수록 상상력의 폭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몰입감이 높아진다.
남자는 게임을 만든다.
게임이라는 것은 역사가 오래지 않은 매체다.
더 강력한 몰입감과 더 선명한 세계.
남자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사무실을 향한다.
*
*
*
“흐음…….”
김유성 피디에게 전달받은 다큐멘터리 대본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묘하게 낯뜨겁다는 느낌이다.
이런 류의 다큐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 양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지는 것.
하지만 이 대본이 나를 카메라 렌즈에 담기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니, 다소 쑥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려되시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런 것은 없는데, 어두운 복도에서 뒷모습부터 등장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네요. 원래는 이것과 좀 다른 느낌 아닙니까?”
“아무래도 IT업계 종사자들을 다루는 특집이기 때문에 조금 멋을 부려봤습니다. 더군다나, 표세인 부장님은 그림도 되니까요.”
김유성은 양손의 검지와 중지로 사각형을 만들어 그 안에 나를 담았다.
“으음…….”
역시 묘한 기분이다.
물론 내가 카메라에 찍히는 것이 처음은 아니고, 이래 봬도 방송 출연 경력은 있다.
경기 영상과 짧은 인터뷰 정도지만…….
하지만 역시 다큐라는 것은 다소 낯부끄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자자, 일단 첫 테이크는 별것 없이 복도 끝으로 걸어가기만 하시면 되니까. 느긋하게 한번 해보시죠.”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아의 주문이기에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하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야겠지.
나는 김유성의 지시에 따라서 2번 정도 복도를 오갔고, 그것으로 첫 번째 촬영이 끝났다.
“핏도 좋은데……. 자세도 좋네요. 누가 보면 모델이라고 생각하겠어요.”
“제 몸 두께가 모델 느낌은 아니지 않나요?”
“키가 워낙 크시니까, 그림이 됩니다. 걱정마세요.”
김유성은 연신 내 기분을 독려하려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내 외모를 칭찬했다.
“그럼 일단 1차 인터뷰를 진행해 볼까요?”
“여기서요?”
“여기가 이 건물에서 가장 그림이 괜찮더라고요. 촬영허가는 받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연아의 지시인데, 촬영허가를 걱정할까?
내 말은 주변에서 이쪽을 보며 두리번거리는 회사 사람들의 눈빛이 부담스럽다는 거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자, 이쪽 보시고!”
머리 끝까지 신이난 홍켓몬이 대체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카메라를 앞세워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넌 여기서 뭐 하냐?”
“카메라 기사님께 커피 한잔 대접하고 카메라 공부 중입니다! 자 웃어보세요.”
“알겠어. 기다려봐.”
-딱콩!
“악! 왜 때리……. 오케이 그 미소 좋아!”
나는 얘를 때릴 때가 제일 신나더라.
“방해하지 말고 그만 가봐. 이거 장난치는 거 아니야.”
“저도 진지하거든요?”
“대체 니가 왜 카메라에 진지한 건데.”
“저 나름 잘 찍어요. 요즘에 여성들에게 촬영기술이 얼마나 포인트가 높은지 모르시는군요?”
내가 알게 뭐냐. 내 여자친구는 사진 찍는 것 별로 안 좋아해.
“아니, 그런데……. 진짜 잘 찍으셨는데요?”
“그러게 우리와 있을 때는 좀 굳은 얼굴이셨는데…….”
촬영 스탭과 김유성 피디는 홍기도가 찍은 사진을 보며 저들끼리 품평하기 바빴다.
“들으셨죠? 제가 이런 남자입니다.”
그니까, 이런 남자이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너 게임 회사 직원이야.
본인을 촬영팀 일부로 착각한 홍켓몬은 대체 어느새 친해진 것인지, 촬영스텝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나누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저 놈이 여러분들을 많이 귀찮게 하지요? 대신 사과 드립니다. 제가 바로 돌려보내…….”
“아니요. 아닙니다. 즐거운 분위기 좋지요. 무엇보다 표세인 부장님 긴장도 풀어주는 것이 무척 좋네요. 오히려 저희쪽에서 몇컷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고의 컷을 선물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니가 왜 그런 걸 선물하냐고…….
그러는 사이 마침 구경 온 남궁원과 함송희가 보였다.
‘부장님 힘내세요.’
‘부장님 너무 멋져요!’
아무래도 쟤들도 구경삼매경 중이라서 홍켓몬 체포 지시도 힘들 것 같다.
나는 순순히 포기하고 이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원래는 태권도 선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시작된 첫 질문은 내 과거 경력에 관한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과거 수상경력이 엄청났고, 상비군으로 올림픽 출전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갑자기 태권도를 그만두시고 군대에 입대하셨더군요.”
살짝 난감한 이야기에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사고와 방황의 시기였습니다.”
“그 일 이후 게임 회사에 취직하게 되신 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원래부터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왔기에 운동이 끝난 후에는 철저히 휴식하며 게임을 즐기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체대 출신의 개발자라는 것이 이 업계에서는 상당히 생소한 이력이라고 하던데, 그것과 관련해서 힘들거나 혹은 좋았던 일이 있습니까?”
역시 방송국이라고 해야할까? 제법 조사를 잘 해왔단 느낌이다.
좋게 말하자면,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기 위해 빈틈없이 질문을 구성해왔다는 느낌이랄까?
새삼 방송에 한 번 출연하는 것으로 인생이 바뀐다는 말이 떠올랐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거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겠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딱히 좋은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질적인 것을 경계하기 마련이니까요.”
내 말에 멀리서 지켜보던 김순영 차장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딱히 당신을 지목한 것은 아닙니다. 긴장 푸세요.
당신도 송부장 말만 듣고 움직인 것에 새삼 긴장하지 마세요.
물론 학벌주의가 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요새는 그런 기미가 싹 사라지기도 했고…….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 그리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회사란 성실함과 실적으로 평가받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이전 회사에서 송부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맥베스에서의 초고속 출세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래 봬도 2번 연속 조기 승진 대상자였다.
체대 출신 개발자라는 이유가 나에게는 모종의 동기부여로 작용했고, 나는 그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타 전공자들에게도 게임회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추천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게임을 좋아하고, 만들고 싶다면 망설임 없이 도전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쉬운 일을 원한다면 반대로 게임 회사에는 취직하지 않을 것을 권하고 싶군요.”
“그것은 게임 업계에 만연한 크런치 문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날카로운 질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게임 업계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닌 만큼 대답에 더욱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첫손에 손꼽히는 워커홀릭 종족입니다. 제가 첫 입사 당시에 가장 충격이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궁금하네요. 뭔가요?”
“신입사원의 패기랄까,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남보다 늦게 퇴근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세상에 다들 너무 집에를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하하하, 당황스러우셨겠군요.”
“그리고 그것은 방송국도 마찬가지겠지요? 그쪽도 워라벨 유지가 힘든 직군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예. 저희 쪽도 그렇지요.”
인터뷰 담당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업계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열정과 야망에 휩싸여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지요. 애석하지만 그것은 게임업계가 특별히 힘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표세인 부장님께서 특별히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포인트는 무엇이 있습니까?”
“박탈감이라고나 할까요?”
“박탈감?”
인터뷰 담당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모두가 이것을 사랑해 주리라 생각한 아이디어가 정반대의 결과를 얻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네요.”
“네. 그건 정말로 뼈아픈 일이죠.”
내 답변에 촬영관계자 일동이 공감한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게임 개발의 장점이 있을까요?”
“조금 전 말씀 드린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가 모두의 사랑을 받을 때, 그때의 만족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칭찬은 그 어떤 마약보다도 강력하다.
칭찬받고 싶다.
게임을 만들고 싶다.
이것은 게임 개발자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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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가 모두의 사랑을 받을 때, 그때의 만족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지요.]
“이거……. 생각보다 더…….”
표세인의 1차 인터뷰를 편집하던 김유성 피디는 입맛을 다셨다.
“김피디, 지금 뭐 해?”
“아, 국장님.”
국장 유정현의 등장에 김유성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앉아. 앉아. 호들갑은.”
유정현은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는 같은 피디였고 예전에는 사수와 부사수였던 처지다.
“그보다 뭘 보고 있어?”
“아, 이거 지난번에 말씀드린 게임 업계 관계자들 다큐 편집 중인데요.”
“오, 마스크가 좋네? 미리 이야기 못 들었으면, 배우라고 생각했겠어?”
“조사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과거 선수시절부터 미남에 장신으로 인기몰이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선수?”
“예.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이었는데, 사고로 갑자기 그만뒀다고 하더군요.”
“저런, 안타깝네.”
“그런데 이 친구 캐릭터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캐릭터가 왜?”
“국장님, 이 친구 재산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재산? 글쎄? 요즘 IT쪽 월급이 세긴하지?”
“자그마치 배주부의 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배주부라고 한다면 요즘 방송계 최고의 블루칩으로 통화는 요식업계의 황제였다.
방송에 출연한 이래로 압도적인 인지도를 거머쥐며, 기존 연예인들의 인기를 발아래에 둔 최고의 인기인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추정 자산 2000억대의 거부다.
“무슨 헛소리야. 배주부님 재산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게다가 여기 자막에는 부장이라고 되어 있잖아. 아니, 혹시 회장 아들 뭐 그런 거야?”
배주부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국내 정상급 IT기업 총수에 비견할 수는 없다.
“아닙니다.”
“아니야?”
“따로 비상장회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회사가 작년에만 2조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어?”
너무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유정현이 굳어버렸다.
“요식업이든 농구선수든, 굉장한 자산가 캐릭터들이 얼마나 잘나가고 있는지는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말해 뭐하겠나?
“그거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이미 게임 업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맥베스 자회사고 그가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있지만……. 솔직히 거기까지는 저희와는 관계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림 하나 나오는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좋아. 일단 그 다큐부터 잘 마무리해봐. 그리고 조사 좀 하고 나중을 위해 기름칠도 좀 잘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국장과 피디.
시청률의 노예인 그들에게 있어 유망한 블루칩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화면 속 표세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이 빛났다.
불공정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