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너 얼굴에 그게 뭐냐?”
“뭐긴 방송 출연을 위해 신경 좀 썼지.”
윤현창은 비비크림을 떡칠한 제 얼굴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
“이상하냐?”
“……아니, 신경 안 쓸게.”
“……보통 신경쓰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니냐?”
“신경 안쓸게.”
나는 뾰루퉁한 윤현창을 뒤로하고 김순영이 작업중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뒤를 따르던 카메라 역시 모니터와 김순영을 담았다.
“벌써 작업 이만큼이나 하신 겁니까?”
“예. 열심히 해야지요.”
“역시 우리팀 리더 답습니다.”
“아니, 제발 그건 좀……. 부장님이 리더시죠.”
“에이, 이번 것은 차장님이 리드하시기로 했잖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리더 역할을 떠넘기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그래픽팀과도 연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으로 이루어진 맵의 청사진을 작업 중이던 김순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지금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미 요청문서는 보내놓은 상태였지만, 보다 세세한 조율을 위해서는 그래픽팀과 미팅은 필수였다.
“그럼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래픽팀과 미팅을 다녀오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프로그램팀의 상황을 대강 점검한 뒤에 그래픽팀으로 향했다.
“후후후. 한 발 늦으셨군요.”
때마침 그래픽팀에 있던 홍기도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늦었다고?”
“그럼요. 제가 먼저 안팀장님과 이야기 중이니까요.”
홍기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안문주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내주신 문서는 검토가 끝났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회의실로 가실까요?”
“앗! 제가 먼저 왔잖아요.”
“너는 요청서나 제대로 만들어와.”
“아앗! 설마 문서로 차별하는 건가요?”
이 놈은 대체 뭘 잘 못 먹어서 이런 헛소리를 하는 걸까?
나와 안팀장은 홍기도의 재롱(?)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넌 왜 따라 오냐?”
“신경쓰지 마세요. 적진 염탐중입니다.”
“그러시던지.”
“윽! 무시하는 겁니까?”
“신경쓰지 말라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정말로 그래버리면 살짝 서운하기도 하고…….”
대체 이놈은 뭘 바라는 걸까?
“이것도 오랜만이네요.”
“네? 뭐가요?”
안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분이 만담하시는 거요. 한동안 보지 못했던 것 같아서요.”
안팀장은 뭔가 흐뭇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름 붙어있을 때는 항상 이런 느낌이었는데, 요즘 내가 여러모로 외부 업무로 바쁘거나, 중국 출장을 다녀온 덕분에 안팀장 입장에서는 퍽 오랜만이라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제가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해도 될까요?”
“네.”
안팀장은 타블릿에서 내가 보낸 문서를 열었다.
“일단 서울 그리고 지하철 역과 학교가 있는 장소라고 뭉뚱그려 잡으셨는데, 희망사항은 아래 예시로 잡으신 곳들 맞죠?”
“네. 문서로 말씀드렸다시피, 예시는 예시일 뿐입니다. 그래픽팀 입장에서 그림이 가장 그럴듯한 장소로 정해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홍대가 어떨까했어요. 마침 그곳에는 인근에 부속고등학교가 있으니까요.”
“홍대…….”
나는 잠시 생각했다.
“건물들이 많은데 작업이 가능할까요?”
“네. 요즘 스캔으로 맵 본을 뜨는 기술이 많이 좋아졌잖아요? 디테일은 손을 좀 봐야겠지만, 개발 엔진 자체가 이런 부분은 상당히 조력해줄 테니까요.”
역시 안팀장은 일 처리가 빠르고 언제나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낸다.
오팀장에게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업무를 함께할 파트너로는 안팀장이 최고다.
아마도 맥베스 안에서 그녀와 견줄만한 아트 디렉터는 실장 삼인방 중에 한 명인 보정훈 실장 정도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건물은 대게 부서지거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외벽에는 이끼나 덩굴 등이 만연하다. 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적인 느낌을 상상하면 될까요?”
“네. 다만 황폐함 보다는 오히려 녹음으로 인해서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강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식물들이 메인 몬스터이자, 주요 시스템이라고 하셨죠.”
“네.”
기울어진 빌딩 사이로 빼곡이 돋아난 녹음. 하지만 그 눈부시게 푸른 녹음이야 말로 세계를 위협하는 진정한 적.
이것이 내가 기획한 이야기의 주요 토대였다.
“엔피씨를 최대한 줄이기위한 장치로는 그럴듯하네요. 마침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이미지들도 많아서 참 좋아요.”
“마음에 드시니 다행입니다.”
그래픽이야말로 크레이티브적인 면모가 가장 두드러지는 직군이다.
그렇기에 그래픽이 의욕을 낼만한 기획을 안겨주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서 작업 효율과 퀄리티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법.
다행히도 이번 기획은 안팀장의 마음에 쏙드는 모양이었다.
“잠깐, 이거 리소스 양이 장난 아니잖아요?”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던 홍기도 녀석이 안팀장의 타블릿을 훔쳐보고는 입을 떡 벌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면 우리 프로젝트는요?”
“미안하지만 표세인 부장님이 먼저 요청서를 보내주셨으니, 이쪽이 먼저지.”
“안팀장님, 저를 이렇게 버리실 겁니까?”
“오팀장님쪽에 요청하면 되잖아.”
“으음……. 오팀장님은 좀…….”
홍기도는 입맛을 다시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회장님이 팀원인데, 오팀장이 영혼을 불살라서 작업을 쳐내지 않겠어?”
팀구성을 따져보면 오히려 이번에는 안팀장 보다 오팀장이 더 나을 거다.
“그렇긴한데…….”
“?”
“오팀장님은 재미가 없어서…….”
“본인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안팀장 역시 오팀장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쁜사람은 아닌데, 확실히 재미있는 캐릭터는 아니지.
“아시잖아요. 재미 없는데, 본인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던지는 유머가 이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뭘 사회에 영향씩이나…….
누가 들으면 오팀장이 국회의원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런데 확실히 좀 부담스럽기는 하네요.”
안팀장이 내 뒤에 붙어있는 카메라맨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무리겠죠?”
카메라맨은 정작 우리의 대화에 반응조차 하지 않고 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같은 일반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동요하지 않기는 힘들잖아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던데.”
홍기도가 턱을 괸 채, 코와 입술 사이에 펜을 끼웠다.
“은근히 크게 될 느낌이라니까?”
안팀장은 홍기도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크게 될 놈이죠.”
“오오오! 드디어 이 몸을 인정하는 건가?”
“자, 커지자.”
“이이익!”
나는 홍켓몬의 귀를 잡고 쭉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쩍 일어났다.
“크크큭.”
순간 돌부처 같던 카메라맨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돌부처로 돌아갔다.
“지금, 이 영상 찍었죠? 직장 내 폭력 현장! 이거 속보로 다뤄주세요.”
“이거 뉴스 아니다. 그리고 뭐 그런식으로 나오겠다면…….”
“기, 기억 제거술은 안돼!”
나와 홍켓몬은 다시금 짧은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데 홍기도 과장에게 이렇게 전부 오픈하셔도 되는 거에요? 듣자 하니, 이번 인디 프로젝트는 나름 각자 경쟁체제라고 들었는데?”
안팀장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경쟁이라…….”
“저는 경쟁 상대도 못 된다 이겁니까?”
“잘 보고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 그래서 잘 해봐.”
“……갑자기 왜 그렇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그러세요. 무섭게.”
“이 상태로는 게임이 너무 재미없잖아?”
“이익!”
우리는 다시금 카메라 앞에서 투닥거렸다.
*
*
*
-표세인 부장이 방송에 출연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번의 통화 이후, 쉬린칭은 이따금 조연아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모니터 속에서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쉬린칭을 향해 조연아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우리 회사의 간판이니, 방송 정도 출연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죠.”
근래, 비연예인 출신의 방송인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 시대 첨단이라 할 수 있는 IT업계 종사자들에게 방송사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드디어 대형 개발사들의 간판 개발자, 혹은 오너들을 포섭하여 다큐를 기획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쩐지 다큐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으신 것 같다는 느낌인데요?
히죽, 웃는 모습에서 두 사람 사이에 차츰 호감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연아 역시 또 한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쉬린칭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빙고! 저는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꽌시와 합자회사로 뭉친 인연과 국적이 다르기 때문일까, 조연아는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았다.
-표세인 부장……. 확실히 이미지가 괜찮지요. 미남에 장신. 일론 머스크 같은 잘생긴 남자들이 자신의 호감가는 이미지를 이용해, 미디어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이제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긴 하죠.
일론 머스크 수준까지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표세인을 향한 칭찬에 조연아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다른 여성이 표세인을 언급하는 상황이었다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쉬린칭은 홍기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기에,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조연아가 쉬린칭에게 쉽게 마음을 열게된 이유 중에 하나 일 것이었다.
-표세인 부장이 방송에 나선다……. 한국 방송의 캐릭터 메이킹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요. 표세인 부장은 스타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여성 팬덤도 기대해 볼 만 하겠는데요? 그러고 보니, 표세인 부장. 결혼할 상대가 있다고 들었는데,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네요.
쉬린칭의 말에 조연아가 멈칫 굳어버렸다.
-왜 그러세요?
“쉬린칭.”
-네?
“우리는 서서히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너무 기쁘네요.
비슷한 연배에 높은 지위를 지닌 젊은 여성이라는 동질감 덕분에 두 사람은 근래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순한 업무 파트너를 넘어 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것은 쉬린칭 쪽이 더욱 바라는 일이었다.
홍기도 주변에 든든한 인맥을 만들어 두고 싶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쉬린칭은 조연아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비밀 하나 말해줄게요. 이거 지켜주실거죠?”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때때로 관계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죠. 제 이름을 걸로 반드시 지키도록 할게요.
쉬린칭의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조연아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녀의 비밀을 입에 담았다.
“전에 제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고 했던 것 기억하죠?”
-네.
“표세인 부장도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것 알고 있죠.”
-맙소사……. 그런거였군요!
쉬린칭은 그제야 조연아와 표세인의 관계를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찌릿한 전류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 한 느낌.
“전 불안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는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요.
쉬린칭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저도 비밀 하나를 말씀드릴까요?
쉬린칭의 말에 조연아는 살짝 당황했다.
“혹시 홍기도 과장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어? 어떻게 아셨죠?
이것이 중국 특유의 불공정 거래 방식인가?
리그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