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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12화 (212/346)

212.

“흠!”

“…….”

전무군단을 이끄는 도경우 이사와 실장 삼인방을 이끄는 문상훈 이사가 복도에서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가벼운 인사가 교차되었다.

“어떻게 일은 잘 진행되고 계시는지?”

문상훈이 먼저 도이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과연 이 작은 돌에 어느정도 파장이 일어날 것인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도경우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안색을 샅샅이 훑었다.

“물론이지요. 저희야 인재풀 하나는 최고 아닙니까?”

함전무의 퇴진이래, 전무군단의 위세는 전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하락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동안 축적되어 있던 인맥의 사슬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직 표세인이 회사 전면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양실장, 문이사, 도이사를 모두 휘하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은 부장이라는 직함 뒤에 숨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성태는 자신의 파벌을 꾸리지 않고, 문상훈 무척 까다롭다.

그렇기에 당장 어딘가에 줄을 대고 싶은 이들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전무군단 뿐이었다.

“어중이 떠중이 몇 명 모여봐야 그나물에 그밥 아닙니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 모르십니까? 게다가 같은 회사 동료인데 어중이떠중이라니요.”

“개인적으로야 능력이 있을 지언정, 그 커다란 파벌에서 눈칫밥 먹는 동안에는 어중이 떠중이일 수 밖에 없겠지요.”

“우리도 이전과는 다릅니다.”

“그러시길 바랍니다.”

문상훈은 그렇게 도경우를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도경우가 문상훈을 붙잡았다.

“양실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네. 들었습니다.”

천하의 문상훈이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만한 소재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양성태의 이름 석자는 언제나 문상훈을 멈추는 것이 가능한 마법주문이었다.

“외부 조력을 끌어들이는 것. 이거 비겁하지 않습니까?”

“…….”

“게다가 끌어들인 상대가 다름아닌 엠씨 소프트라니, 설동은 대표가 오랫동안 양실장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지요.”

“…….”

도경우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문상훈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도경우는 이것을 무언의 긍정이라고 해석했다.

표세인이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갑자기 코가 꿰이기라도 한 듯이 한자리에 서버린 두 사람이지만, 양성태와 문상훈이라고 한다면 오랜 앙숙중의 앙숙이었다.

타고난 기질과 입지. 뭐 하나 맞는 구석이 없는 두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표세인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전무군단의 전화위복을 꿈꾸는 도경우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은 두 사람의 관계를 망가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참 양실장은 매력이 넘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회장님, 다음은 표세인 부장. 이제는 설동은 대표라니요. 성실하게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솔직히……. 좀 그래요.”

“말은 맞는 말이지.”

문상훈의 뒤에 있던 최기환이 도경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미 일전에 문상훈 앞에서도 양성태의 이번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한 전적이 있었다.

“어이, 최기환이…….”

“예?”

너무도 서늘한 음성과 눈빛이었다. 자신 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문상훈의 눈빛에 최기환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너 깃발 하나다. 다음에는 모자 벗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미국지부의 센터장 답게 생소한 미식축구 용어를 사용한 문상훈이었다.

반칙 한번에 깃발을 들고, 두 번 반복되면 심판은 모자를 벗는다.

축구로 치면 옐로우 카드와 레드 카드와 비슷한 개념.

미식축구의 룰은 몰라도 문상훈이 어떤 의도의 경고를 보낸 것인지는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거대한 체격과 의외로 남다른 엘리트 코스를 밟고 맥베스에 입사한 최기환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주눅이 든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문상훈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상훈은 고개를 조아린 최기환에게서 눈을 돌렸다.

“도이사.”

최기환에게 보냈던 서늘한 눈빛과 음성이 그대로 도경우를 향했다.

“아니, 반말? 지금 뭐하자는 거야?”

경어를 뺀 호칭에 도경우의 뒤에 있던 인사들이 불만을 토했다. 하지만 문상훈은 오직 도경우만을 바라볼 뿐 다른 이들에게는 눈길하나 주지 않았다.

“지금 뭐하자는 수작이야?”

“수작?”

“나랑 한판 붙기로 한 것 아니었어?”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경우는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지난번 인디게임 프로젝트 발표 때, 두사람이 경쟁심을 발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양실장을 언급하는 와중에 뜬금없이 그 말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나 문상훈이랑 한판 붙기로 해놓고 딴 데 정신 팔 여력이 있다 이건가? 이거 좀 모욕적이네.”

문상훈은 목을 좌우로 까딱이며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러한 표독스러운 성정 때문에 그간 그는 이상무 파벌 내부에서가 아니라면, 자신의 수족이라 할만한 이들을 키워내질 못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성에 차는 인물이 없어서 손을 내민 적도 거의 없었지만…….

“우리 이렇게 하지.”

문상훈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번에 내가 지면 미국으로 넘어가서 앞으로 본사에는 얼씬도 안하는 것으로 하지.”

“!”

함전무의 은퇴 이후 이사진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 빈자리를 통한 승진경쟁이었다.

당장 전무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없고, 이상무 역시 그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당분간 전무자리는 공석이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상무보에 관한 이야기가 스멀스멀 물망에 오르고 있는 상황.

그리고 현재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이들은 바로 문상훈과 도경우였다.

그런 상황에서 문상훈이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건 어마어마한 찬스였다.

“반대의 경우는?”

“동남아로 가거나 중국으로 가는 거지. 원래 그쪽 출신이잖아?”

“음!”

도경우의 뒤편에서 짧은 탄성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우리끼리 약속을 한다고 해봤자, 자리 이동이 그리 순탄치는 않을 텐데?”

“그건 간단해. 표세인 부장에게 부탁하면 된다.”

표세인의 이름이 나오자, 도경우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함전무의 후계자로 지목된 이래, 그를 주목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 출시한 오행전기가 차츰 중국시장을 잠식하는 상황. 깨비몬에 이어, 연달아 히트작을 배출하는 표세인은 얼마지 않아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개발자로 우뚝 설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조회장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해명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쉬린칭이라는 거물까지 그에게 의아스러울 정도의 호의를 보이고 있는 상황.

표세인이 나선다면, 정말로 자신들쯤 외부지사로 보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왜? 겁나나?”

“…….”

도경우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망설이는 것 자체가 상당히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지만, 이미 이사급쯤 되는 인물이라면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마스터한 인물인 셈이다.

도경우가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 못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이 정도 강수를 둔다는 것.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물타기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작 문상훈의 휘하에 있는 최기환까지 공공연히 양성태의 행보에 불만을 가질 정도.

그런 상황에 문상훈이 급발진을 하는 이유.

‘양실장을 감싸주려는 것인가?’

도경우는 수를 바꿔보기로 했다.

“이상하군. 왜 그렇게까지 양실장을 감싸주려고 하는 거지? 원래는 앙숙지간 아니었나?”

“…….”

이건 먹혔다.

그 증거로 문상훈의 입이 딱 다물렸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보정훈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뒤편에서 등장한 조연아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조금전까지 숨막히는 기싸움을 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모두가 급히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다소 필요이상으로 활력이 넘치는군요.”

도경우와 문상훈은 동시에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지금 사내에 카메라가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조연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편에서 카메라맨을 대동한 표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쟁은 좋지만. 지나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

“자신들 싸움에 표세인 부장을 들먹이는 것은 지양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존재가 임원회의 밖까지 퍼지는 것은 제 본의가 아닙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문상훈은 다시한번 고개 숙여 사죄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실장 관련으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

거기까지 들었다는 것인가?

문상훈이 표세인 건으로 고개 숙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국 양성태를 언급한 것은 도경우 자신이었다.

도경우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조연아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양실장은 미리 제게 재가를 득한 후에 행동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예! 죄송합니다. 이후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도경우 역시 문상훈과 마찬가지로 납작 업드린 태도로 용서를 구했다.

“알아들으실 만한 분들이시니.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각자의 결과물……. 기대하겠습니다.”

조연아는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후우, 난처하군.”

“난처 한 상황 아직 안끝났어.”

문상훈의 말대로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천천히……. 표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잠시 촬영 중단하시죠.”

내가 걸음을 멈추자 카메라맨 역시 보조를 맞췄다.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오래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일이 익숙한지, 카메라맨은 가타부타 말 없이 그대로 등을 돌려 카페로 향했다.

나는 다시금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연아에게 한 소리를 듣고 있는 문이사와 도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근래 경쟁모드에 돌입한 두 사람이니, 아마도 스파크 좀 튀기다가 연아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된 모양.

이런 것을 카메라에 담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카메라맨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 한 후에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이미 연아는 용무를 멈추고 지나간 상황.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문이사님. 도이사님.”

나는 문이사와 도이사를 향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전에 부회장님께 한소리 들으시는 것 같던데?”

최대한 능글능글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같은 월급쟁이 포지션을 앞세웠다. 그러자 문이사와 도경우는 한층 편안한 얼굴로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저희가 조금 과하게 경쟁심을 불태웠습니다. 부회장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딱히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셨어. 걱정 말라고.”

“그러셨군요. 그런데 두분 어차피 승부를 내실 거라면 제대로된 기준이 있으시면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제대로된 기준?”

문이사와 도이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겨울에 인디게임 페스타가 있습니다. 그때 한번 승부를 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그건 좀 빠른데?”

“쉽지 않은데…….”

도경우의 뒤편과 문이사 뒤의 성진규가 짧게 신음했다.

“이번 프로젝트 참가팀 중에서 두 분께서 보유하신 인재풀이 가장 크지 않습니까? 게다가 속도전이라면 두 분 모두 장기 아닙니까?”

하드 크런치로 대변되는 국내 게임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무군단과 이번 오행전기를 미친 듯한 속도로 일정을 압축시킨 문이사가 아니던가?

“어려우십니까?”

“그, 그럴리가!”

“저희도 가능합니다!”

문이사와 도이사 모두 재빨리 뒤편의 아군들에게 눈빛을 교환하고는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그럼 잘됐네요.”

“그런데 표세인 부장님께서도 거기에 참가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그렇게까지 일정을 줄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모두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고티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1위까진 아니더라도 10위권 안에는 랭크 되고 싶네요.”

“허…….”

“크큭, 정말 못당하겠군.”

죄송하지만 제 경쟁자는 여러분이 아니라서요.

우리 다른 리그에서 각자 활약해 보죠!

다음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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