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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15화 (215/346)

215.

“오래전의 일이야.”

홍기도의 말에 쉬린칭이 귀를 쫑긋 세웠다.

*

*

*

“여기 다 끝났습니다.”

“오냐.”

표세인 대리는 홍기도가 건넨 문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없다.’

홍기도는 살짝 긴장했다.

태도가 달라서 그렇지, 표세인은 은근히 깐깐 대마왕이었다.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서 호통치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틀리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수정해서 다시 전송하고는 한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홍기도의 기안이 한번에 통과된 적이 없었을 정도!

‘이번에는 다르다!’

홍기도는 지금까지 전력을 다해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타고난 눈치와 한 큐에 끝내지 못해,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혐오!

그것이 홍기도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였다.

“많이 좋아졌네?”

표세인은 싱긋 웃었다.

확실히 지난번 술자리 이후, 표세인은 달라졌다.

물론 그들의 관계에 급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뭔가 변했어. 사람이 부드러워졌어.’

뭘까?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연애의 시작 같은 것을 의심하기 마련.

하지만 정작 표세인에게 그런 기류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홍기도의 타고난 감으로도 표세인이라는 남자를 가늠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지금처럼!

“오오! 그러면 통과?”

“일단 고칠것만 고쳐서 보내줄게.”

“……눼.”

홍기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아, 네. 여보세요? 네네. 지금 진행중입니다. 네. 납기일에는 맞출 수 있습니다.”

-타다다다닷!

오늘도 표세인은 핸즈프리를 착용한 채, 고객과 대화하는 한편, 비어있는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노닌다.

멀티테스킹에도 정도가 있지!

간단한 자료 정리 같은 것이라면 모를까, 온 신경이 집중되어야 할 기획서를 쳐내는 와중에도 그는 통화와 문서작업을 전혀 무리 없이 쳐내고 있다.

홍기도는 몰래 표세인을 훔쳐보며 생각했다.

-할거 없으면 이거나 해라.

사내 메신저를 통해 새로운 일감이 주어졌다.

세상에!

통화와 문서작업을 하는 와중에 자신까지 감시(?)하다니!

홍기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인정받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을 잘못했다.

처음에 생각한 대로, 적당히 거리를 두자. 그래! 이게 맞다!

홍기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파일를 오픈했다.

“어? 이거…….”

“그래. 너도 이제 혼자 힘으로 한 번 해봐야지.”

표세인이 토스한 일감은 외주로 들어온 유아 교육용 게임의 일환이었다.

“아, 이거 재미 없어 보이는데…….”

“재미있는 일을 하려면 출세해야지.”

“출세하면 일을 고를 수 있나요?”

“아니. 창업해야지.”

“창업하면 일을 고를 수 있나요?”

“물론이지! 돈 많이 벌면.”

“…….”

게임 회사를 선택한 것이 실수였을까? 좀처럼 흥미가 생길만한 프로젝트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 회사 자체가 홍기도 본인이 흥미를 느낄만한 게임을 개발할 생각이 없다. 물론 그것조차 지금 하고 있는 외주 작업 보다야 재미있겠지만…….

“대리님.”

“응?”

“대리님은 이 일 안 지겨우세요?”

홍기도의 질문에 표세인은 피식 웃었다.

“마, 세상에 자기 즐거운 일 하는 사람은 손에 꼽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표대리님 정도면 타팀으로 옮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여기는 그래도, 여기만의 장점이 있어.”

“뭔데요?”

“윗사람 눈치 덜 보잖아.”

다른 팀이었다면, 파트장에, 팀장에, 부장에…….

기획서 한 장 작업하는 것에도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 반지원정대 영화가 대박이 난 이유는 다름 아닌 동질감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무튼 그거 일정 빠듯하니까. 서둘러라.”

“일정 많이 남았는데요?”

“네가 한 큐에 끝내준다면야 그렇지.”

결국은 아직 자신이 못 미더우니, 표세인 본인 손을 거쳐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태도.

지난번 술자리 이후 그들 사이에 떨떠름한 분위기는 많이 가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기도는 여전히 표세인에게 완전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사적 친밀감과 업무역량은 반대지만…….

좋아.

일단 하는데까지는 해본다!

홍기도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저 얄미운 얼굴에 작은 놀람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말리라!

그렇게 생각한 홍기도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나 지금 한국이다.

해외에서 살고 있는 누나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지금?

-응.

-만삭에 제정신이야?

-아이는 한국에서 낳기로 했어. 마침 네 매형도 휴가니까.

-그렇구나.

-아무튼, 오늘은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으로 들어와.

-라져.

오늘은 영락없이 초식초식해야하는 날인 모양이다.

건강보조제 회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홍씨 집안의 식단은 단백질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아니, 영양 밸런스라면 훌륭하다. 다만 고기가 없고 두부나 생선 정도가 전부일 뿐.

“나 잠깐 바이어 미팅하고 올게.”

“네? 아, 저 오늘은 칼퇴근 해야해요.”

“왜?”

“오늘 외국에 살던 누나가 귀국해서…….”

“아니, 그걸 나에게 왜 말하냐고. 너 원래 항상 칼퇴잖아.”

기껏 예의를 지켰는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홍기도는 살짝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표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퇴근 전까지는 돌아 올거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

*

*

“뭐야, 표대리 아직 안 왔어?”

윤현창 대리가 표세인의 자리를 훑어보며 홍기도에게 질문했다.

“네. 퇴근 시간 거의 다 됐는데…….”

홍기도도 마침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자타공인 일벌레인 표세인이 허투루 탱자탱자 농땡이를 피울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이라면, 송부장 정도일까?

“뭐 그녀석이야 별일 없겠지.”

윤현창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확실히 표대리님이 무슨 일이 생겼을 정도라면 국가 재난 사태겠지요.”

지난번 자신을 구타하던 남자를 무슨 장난감 다루듯이 제압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홍기도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아, 늦었다.”

“왜 이렇게 늦……. 너 꼴이 왜 그러냐?”

피칠갑이라고 한다면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온몸에 얼룩덜룩 피가 묻은 상태로 땀에 흠뻑 젖어 돌아온 표세인.

“아, 갈아 입을 옷도 없는데, 골치 아프네.”

“너 설마 사람이라도 죽이고 온 것은 아니지?”

“뭔소리냐?”

“그럼 그 꼴은 뭔데?”

윤현창의 질문에 홍기도 역시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오는 길에 사고가 좀 있었어.”

“차 사고? 너 괜찮냐?”

“나는 괜찮아. 내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 뱅뱅사거리 앞 쪽에서 사고가 났는데, 거기 임산부가 있더라고.”

“임산부?”

“근데 임산부가 양수가 터져서 위급해 보여서, 근처 병원까지 안고 달리다보니…….”

“와! 너 사례금 좀 두둑히 받았겠다?”

“정신 나갔냐? 이런 일에 무슨 사례금이야. 안 그래도 끈질기게 연락처 물어오는 것을 괜찮다, 하고 뛰어오는 길이다. 아, 이거 핏물 어떻게 빼지? 엄마한테 물어보면 알까?”

하지만 엄마에게 핏물 빼는 법을 묻기라도 했다가는 후폭풍이 두려웠다.

운동하는 자식들을 둔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혹시 엄한 곳에서 주먹이라도 쓰고 오는 것이 아닐까,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대뜸 옷에 물든 피빼는 법이라도 물었다가는…….

감당 불가의 사태가 발생한다.

“아무튼 몸은 괜찮으시다는 거죠?”

“그래. 내가 이래봬도 평생 어디 다쳐본 적이 없는 몸이야.”

“운동하다 보면 다들 조금씩 다치지 않나요?”

“안다치게 하면 돼.”

어떻게요? 라고 물으려는 순간, 홍기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디냐.

“회사죠.”

-빨리 와라, 여기 강남에 있는 병원이다.

“병원?”

-너희 누나가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여기 병원 알지?

“네, 네.”

홍기도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누나가 병원에 입원했대요. 저 급 퇴근하겠습니다.”

“큰일이야? 괜찮으신 거야?”

지금 표세인 꼴이 남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홍기도는 가방을 손에 들며 말했다.

“조카 나올 것 같아요.”

“오! 축하한다.”

“네. 그럼 가볼게요!”

홍기도는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야.”

“왜?”

“너 핏물 빼는 법 아냐?”

“내가 어떻게 아냐.”

“에이, 도움 안되는 놈.”

“뭐 임마!”

표세인과 윤현창은 잠시 투닥거렸다.

*

*

*

“누나는 괜찮아?”

누나만 네명인 덕분에 매형들과 조카들까지 포함해 10명도 넘는 대 식구가 병원 로비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대. 교통사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간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교통사고?”

“그래. 저기 뱅뱅사거리에서 사고가 나서…….”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혹시 누가 누나를 여기까지…….”

“맞아! 아까 키 훤칠한 청년이 네 누나를 안고 여기까지 데려왔다지 뭐야. 김서방도 정신이 없어서 연락처도 못 묻고……. 이걸 어째.”

“저도 여쭈어봤는데, 한사코 아니라며 도망치듯이 가버리시더라고요.”

“세상에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 또 있을까. 어떻게든 찾아서 사례해야지.”

“그럼. 그럼. 이런거 그냥 넘어가면 안 돼.”

홍기도의 아버지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반드시 은인을 찾아서 사례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 사위가 몇 명입니까! 게다가 둘째가 검사 아닙니까? 사람 찾는 것쯤은…….”

“형님. 저는 검사지. 탐정이 아닙니다.”

“병원장에게 부탁해서 CCTV 보자고 하면 되겠지.”

마침 홍기도의 아버지는 병원장과 친분이 있었다.

나름 제약회사의 인맥이라는 것!

“매형. 그사람 오늘 니트입고 있었어? 베이지색?”

“어? 너 그걸 어떻게 아냐?”

홍기도의 질문에 막내 매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맙소사.”

홍기도는 이제 오싹함을 넘어, 소름이 돋는 심정이었다.

“이럴때가 아니다. 병원장에게 가서…….”

“아버지.”

“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

“어차피 돈 준다고 받을 사람도 아니고……. 괜히 불러내봐야, 바쁜 사람 피곤하게 하는 격이거든요.”

“아는 사람이야? 누군데?”

“일단……. 지금은 누나랑 애기한테 집중하죠.”

홍기도는 어딘지 착잡한 심정이었다.

갑자기 너무 큰 은혜를 입어버린 셈이 아닌가?

조금씩 싹트던 호감이……. 이제는 숨막힐 정도의 은혜가 되어 버렸다.

*

*

*

“역시 퇴근 안 하셨네요?”

“어? 너 왔냐? 잠깐, 왜 왔어?”

이미 밤 9시.

이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꼴이 그게 뭐에요?”

“뭐가? 아, 이거?”

표세인은 대충 누군가에게 빌려입은 허름한 셔츠와 반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원래는 나도 철야용으로 여벌 옷을 준비하는데, 하필 지난주에 집에 가져가서……. 심각하냐?”

“네. 심각하네요.”

홍기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쇼핑백을 표세인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일단 제가 대충 골라왔어요.”

“야……. 이거 섣불리 포장 벗기면 안 되는 브랜드가……. 아니, 넌 무슨 속옷이랑 양말까지 이런 비싼 걸 입어? 그런데 이걸 왜 가져온 거야?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채무자랑 채권자죠.”

“뭐?”

표세인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 했대요. 잘은 모르는데 거꾸로 서서 질식할 위험이 있었대요.”

“아! 괜찮은거냐?”

“네. 덕분에요.”

“덕분에?”

“이 빚 꼭 갚겠습니다. 아무튼 이건 그냥 입으세요.”

홍기도는 그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아니……. 왔으면 야근 좀 하다가지…….”

이미 홍기도는 사라진 후였다.

출생의 비밀 같은 분위기는 만들지 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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