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쌈쫀! 이러나!”
홍기도는 조카의 채근에 눈을 떴다.
어젯밤 본가로 불려와 잠을 잤기에 조카 알람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애기들은 잘 시간인데?”
시간을 확인한 홍기도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나 애기 아니야!”
“우리 못생긴 홍시! 이뻐 죽겠네.”
홍기도는 자신의 조카를 와락 품에 안았다. 그러자 조카 홍시오는 발버둥을 쳤다.
“엄마! 삼쫀이 나보고 못생겨 때!”
“야! 너 왜 맨날 우리 홍시한테 못생겼다고 하냐?”
“토실토실! 못생긴 뺨~ 깨물어 주고 싶네!”
“깨물지마! 엄마 나 못생겨 써?”
“걱정마. 홍시야. 우리 집에 못생긴 사람 없어요.”
그 말대로, 홍씨 집안은 너나 할 것 없이 준수한 외모가 자랑이었다.
“누님.”
“응?”
“언제나 시작은 있는 법이죠. 홍시 네가 우리 집안의 못난이 스타트를 아얏!”
“매를 벌어 아주! 퍼뜩 씻고 밥이나 먹어!”
홍기도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샤워를 끝내고 출근준비를 마쳤다.
“후우, 오늘도 고기 한점 없군요.”
“단백질은 충분하거든?”
누나도 부모님을 닮은 것인지. 육류를 즐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시는 고기 먹여야지!”
“삼쫀! 나 고기 안 좋아해. 두부랑 달걀 먹어.”
“……이 못난이……. 히잉.”
홍기도는 울상으로 푸르른 식탁 위로 젓가락을 옮겼다.
“그래서 그때 그분 TV출연 하신다고?”
“응.”
“요즘에는 게임 개발자도 TV 출연을 하는 구나.”
“항상 있는 일은 아니야. 솔직히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 아, 그렇지. 여친이 까라면 까야지.”
순간 조연아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홍기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 분께 뭔가 보답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은혜.
그 당시 위태로웠던 홍시가 벌써 훌쩍 자라서 하루 종일 종알거리며 건강하게 뛰어다닐 정도로 자랐다.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금전적인 답례 따위는 절대로 받지 않을 타입이다. 게다가 이제는 어마어마한 부까지 손에 넣었다.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어.”
“네가?”
누나는 상당히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 하고 있다니까.”
“아니, 솔직히 나도 몇 년동안이나 찜찜하던 참이다. 네 말만 듣고 언제까지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
“가만히 안 있으면요?”
“뭐라도 해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야!”
“그래. 맞아. 우리 덕분에 우리 홍시 이렇게 이쁘게 자랐는데…….”
아버지는 더는 물러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어머니는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상기하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할무니 우러?”
“아니야. 아니야. 자, 우리 홍시 밥먹자.”
“일단 그거나 들어보자, 네가 뭘 알아서 하고 있다는 거냐?”
“그런게 있어요.”
아직 완벽하지 않다.
표세인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심정으로 곁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스스로 표세인의 곁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얻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이번 인디게임 개발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식사라도 초대하라니까! 일단 얼굴 보고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야 할 것 아니냐?”
“나중에. 나중에.”
자신의 속내가 너무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홍기도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섬세한 편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나 가요!”
“이거 먹어야지!”
“나 잘 먹고 있어!”
영양제도 질릴 수 있다. 홍기도는 그 점을 자신했다.
홍기도는 후다닥 집을 벗어났다.
*
*
*
“좋은 아침!”
이 놈은 뭘 잘 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힘이 넘친다.
“뭐 좋은 거 먹었냐? 아침이면 골골대던 녀석이 힘이 넘치네?”
내 말에 홍기도의 얼굴이 금새 헬쓱해졌다.
“좋은 걸 먹긴요. 풀떼기만 먹었는데…….”
“아, 너희 집 식단이……. 무척 초록초록 하다고 했지?”
“예.”
“우리집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네.”
“부장님은 낙원 출신이세요.”
“어릴 땐 그런 생각 자주 했지. 쌀은 없어도, 고기가 없던 날은 없었으니까.”
내 말에 홍기도는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커피나 사줘요!”
“그래. 그래. 들러 붙지는 말고…….”
나는 자꾸 들러붙으려는 홍켓몬을 슬쩍 밀어냈다. 그런데 이 놈이 오늘따라 자꾸 들러 붙는다.
“어허! 남남칠세부동석 모르냐?”
“남녀 아니에요?”
“남자끼리 붙으면 원래 주먹 날아가는 법이야. 적정 거리 유지는 평화의 필수 요소지!”
“제가 단백질이 부족해서 잠깐 미쳤었나 보네요.”
그래. 정신 차렸구나.
홍기도가 남자에게 들러붙다니, 이 녀석이 정말로 단백질이든 뭐든 부족했던 모양이다.
“참, 이거 보세요.”
“뭔데?”
“제 조카 홍시요! 귀엽죠?”
“진짜네? 눈도 크고, 이목구비도 또렷하네? 애기가 어쩜 이렇지?”
“나중에 젖살빠지면 진짜 이쁘게 자랄거에요.”
홍기도는 헤헤헤 웃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조카도 많으면서 왜 맨날 홍시만 자랑하냐?”
“얘가 젤 이쁘거든요. 막내니까.”
이따금 홍기도는 나에게 자신의 막내 조카 사진을 들이밀며 자랑하곤 했다.
“아무튼 잘 봐두세요. 홍시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요!”
“그, 그래.”
묘한 박력에 나도 모르게 열심히 홍기도의 조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카페에 도착했다.
“잠깐 앉으시죠.”
“앉아? 임마, 곧 업무시간이야.”
“아직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혹시 우리 가족들이 밥 한 번 먹자고 하면 생각 있으세요?”
“밥? 너희 가족과? 갑자기?”
“갑자기는 아닌데…….”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어쨌든 인디게임 개발 끝나면 밥 한번 먹어요! 고깃집으로 예약할 테니, 저희 가족에게 고기 맛도 좀 알려주시고요!”
“목적이 고기 맛 전도냐?”
“꼭 그건 아닌데…….”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고깃집 아들로서 고기맛 전파라면야 사양할 수 없지!
“일단 알겠다. 그런 일이라면야, 내가 집도하지 않을 수 없지.”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홍기도는 넙죽 고개 숙였다.
“그보다 너…….”
내가 홍기도의 개발진척 상황을 물으려던 참이었다.
“표부장!”
“문이사님?”
갑자기 문이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진짜 이러기야?”
“네? 왜요?”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미국지사는 내가 먼저 이용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이용하게 해주다니? 문이사님……. 문이사님이 센터장이세요.
“일단 진정하시고 앉으세요. 침착하게 무슨 일인지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미국지사에 우리 게임 조력을 요청했는데, 제다이의 귀환을 기다린다는 헛소리와 함께 자네 요청서 먼저 검토하겠다더군.”
“제 요청서요?”
“그래. 제프리 이 녀석이 정말……. 어휴 잘라 버릴 수도 없고.”
“그런데 저 요청서 안 보냈는데요?”
“그, 그래? 그럼 이번에 미국지사는…….”
“당연히! 보내야죠. 제가 거기 말고 외부조력 받을 곳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사실 제프리팀에 손을 빌릴 생각은 없다. 나에게는 좀비로얄팀이 있으니까.
“표세인 부장. 내 체면 좀 살려줘. 센터장이, 2순위로 밀리는 것이 말이나 돼?”
미국지부 센터장이 나에게 센터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이라니……. 누가 볼까 무섭군.
“제프리팀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센터에 내 인맥이라고 해봐야, 제프리팀 외에는 딱히 없다.
거기 상주 인력이 얼마인데, 고작 팀 하나가 날 기다린다고 문이사가 이렇게까지 애걸한단 말인가?
“그놈들 제외하면 다른 업무로 손이 빈 곳이 없어.”
“그런 거였군요. 그런데 솔직히 문이사님 쪽 인재풀이면 인디게임 하나 정도 껌이지 않습니까? 그 많은 인력들은 어쩌고요?”
“기, 기밀이야.”
“우리 사이에 뭘 또 그렇게까지…….”
“으음, 양실장과 도이사에게는 비밀로 해주겠지?”
“물론이죠.”
“대규모 PVP기반 게임을 제작하고 있어. 그래서 서버쪽 지원이 필요해. 이 이상은 묻지 말아달라고!”
“그렇군요.”
확실히 문이사 팀에서 나올법한 아이디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문이사님 체면 살려드려야지요. 제프리에겐 이번건에 한해 요청할 일 없다고 말해두겠습니다.”
“오케이! 역시 표세인 부장이야! 하하하. 커피 내가 살까?”
이미 계산 끝낸 커피를 굳이?
“괜찮습니다. 문이사님도 커피 필요하신가요?”
“아니야. 나는 바로 회의 참석해야지. 그러고보니, 표세인 부장.”
“네?”
“곧 있으면 TV 데뷔로군. 기대하겠어.”
“하하, 뭐 기대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나를 졸졸 쫓아다니던 카메라맨도 사라졌다. 이제 영상편집을 거쳐 TV로 방영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부모님께 말씀도 못드렸네.”
“아니, TV 첫 출연인데 아직도?”
“첫 출연은 아니라서요.”
이래 봬도 선출입니다. 가끔 나왔다고요?
*
*
*
“엄마! 나왔어!”
“연아는?”
“나 혼자 왔는데?”
“에잉…….”
뒤에 있던 아버지가 고무장갑을 벗어서 내게 건네 주었다.
그래. 뭐 항상 이랬지.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에 앉았다.
“밥은?”
“먹었어.”
“다행이네. 또 차리기 귀찮았는데.”
“요즘 일은 잘 하고 있냐?”
“그럭저럭. 참, 나 이번에 TV 출연해.”
“네가? 왜?”
“게임 개발자들 다큐인지 뭔지 만든다고 하더라고.”
“니네 회사에 인물이 그렇게 없냐? 왜 너야?”
“훗, 제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표씨집안 장남이 얼굴로는 나름 어디서 안빠지죠.”
“그래봐야. 세종이 형이지.”
그 이전에 아버님 아들이기도 합죠.
“내가 왜!”
아버지의 말에 세종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왔다.
“왔어?”
“부장님께 인사가 그게 뭐냐. 똑바로 다시 해봐.”
“왔냐?”
“아주 확……. 아니다. 일어나기도 귀찮다. 네 맘대로 해라.”
“나도 어디가서 못생겼다는 말 안듣거든?”
“잘생겼다는 말은 듣냐?”
“사, 살빼면…….”
“저 말을 평생 들은 것 같은데.”
아버지가 귀를 휘적휘적 후비며 말했다.
“이게 다, 아빠 탓이잖아!”
“왜 내 탓이야?”
“나 아빠 닮았잖아!”
“지금부터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닮아?”
“붕어빵끼리 싸우긴. 너도 앉아서 이거나 먹어!”
엄마의 핀잔에 세종이는 냉큼 앉아서 사과를 앙 물었다.
“니네쪽은 잘 되가냐?”
“지금 염탐하는 건가? 훗. 그럴만하지. 자그마치 업계의 전설 조양길과 크게 될 남자 홍기도 페어의 프로젝트인데,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딱!
“악!”
“마! 장인어른 성함을 함부로 부르냐! 죽으려고.”
아버지의 손찌검에 세종이는 뒤통수를 잡고 도끼눈을 떴다.
“눈 깔아. 이게 감히 건물주에게…….”
“건물주? 뭔소리야. 우리 전세잖아.”
“니 형이 지난번에 샀다더라. 사도 왜 이런 낡은 집을 사냐.”
“이사가기 싫으시다면서요? 새로 집 하나 사드려요.”
“아, 아드님……. 저, 저는 한강뷰를…….”
“고소공포증 있으시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마! 그런건 돈이면 다 고쳐져!”
“고쳐지긴…….”
엄마가 듣기 싫다는 듯이 아버지 입에 사과를 밀어 넣으셨다.
“이참에 회장님께 많이 배워라. 네 말대로 업계 전설이니까.”
공든탑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천하의 조양길이 소매를 걷어 부치고 오랜만에 최전선에 섰다.
마왕의 포효 한번쯤 날려주지 않겠는가?
나는 정말로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걸 깨부수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겠나?’
나도 모르게 킬킬 웃음이 난다.
“엄마, 형 이상해.”
“쟤 원래 이상해. 네 형이잖아.”
“아버지 아들이죠.”
“으음……. 네 엄마 아들이지.”
갑자기 출생의 비밀 같은 분위기 만들지 마시죠.
이번에는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