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한부장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한명수도 오랜 팀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부장으로 승진했다.
“하하하. 고마워. 그런데 축하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표부장 아니야?”
한명수는 껄껄 웃으며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쳤다.
“제가 축하를 받아요?”
“어제 TV봤어.”
“아……. TV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대체 방송국은 무슨 꿍꿍이인 걸까?”
“거의 화보집 수준이던데? 표부장은 화면 빨도 잘 받고 부러워. 내가 우리 여보에게 얼마나 자랑했는 줄 알아?”
“자랑할 게 있습니까?”
“왜 없어. 저기 나온 표세인과 내가 친하다~ 뭐 이런거?”
한명수의 너스레에 나는 한층 더 부끄러웠다. 단순히 방송 출연을 한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회사 개발자들도 함께 출연하리라 생각했고,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수준의 멘트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거리낌 없이 낯부끄러운 멘트들을 날렸는데…….
막상 나 혼자 출연이라는 어이없는 상황에 닥치고 보니, 뭔가 독박을 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지금 인터넷 댓글도 많아요. 보통 다큐에 이런 댓글 안달리는데…….”
홍기도의 말에 나는 목 뒤를 긁적였다.
“뭐라고 하는데?”
게임 개발자라면 악플에는 도가 트기 마련이다.
좋다. 부모님 소환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맞아준다.
“잘생겼다. 얼굴 보고 뽑냐? 수조원 자산가라니, 개부럽다.”
-딱!
“악! 왜 때려요?”
“아, 미안……. 순간 네가 반말하는 줄 알고…….”
“저는 그대로 읽은 거에요.”
“아, 미안. 내가 요즘 스트레스가 쌓였었나봐.”
그러고 보니, 요 녀석도 요즘 나에게 한 방 먹이네, 마네 하면서 얄미웠지.
대견한 것도 있지만, 얄미운 것도 있다.
“근데 홍기도 과장. 너도 화면빨 좀 받던데?”
“그래요? 제가 원래 좌측뷰로 먹고 사는데, 너무 정면 샷이라서 좀 아니다. 생각했는데…….”
“좌측뷰 같은 소리하고 있네.”
듣고 있던 남궁원이 투덜거렸다.
“너는 진짜 화면발 안 받더라.”
“닥쳐!”
그래. 솔직히 남궁원은 긴장한 탓도 있고, 이래저래 실물이 더 낫다.
이거 보통 칭찬인 것 맞지?
“저도 엄마, 아빠랑 같이 TV 보면서 자랑 엄청 했어요.”
“고맙다.”
“나중에 사인 받아도 되요?”
함송희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얘는 이럴때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간다.
“결제서류에 사인 한가득이잖아. 뭘 새삼스럽게…….”
“이런건 기분이죠! 그리고 부장님은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하지 않나요?”
“준비?”
“방송 타셨으니까, 이제 사인하실 일도 많으실 것 아니에요.”
“무슨 다큐 출연했다고 사인씩이나, 그리고 나 이래 봬도 옛날에 몇 번…….”
내가 예전 선수 시절의 경험담을 말하려는 찰나였다.
“하하하. 맞아요.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니까.”
양실장과 문이사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
이게 무슨 일이지?
두사람이 과거처럼 앙숙은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나름 경쟁한다고 서먹한 줄 알았는데?
“여기있었군.”
“좋은 아침입니다. 표세인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우선 인사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있지! 어제 표세인 부장 브이로그를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 줄 알아?”
“정말 좋았습니다.”
“브이로그라니요. 다큐 아닙니까.”
“다큐 형식이 아니던데? 대놓고 표세인 부장 띄워주겠다는 사심이 물씬 풍기던걸. 곧 예능이라도 출연하라고 연락 오는 것 아니야?”
문이사는 묘하게 촉이 좋을 때가 있다.
“아, 연락을 받기는 했는데…….”
“진짜로?”
“꺄아! 아, 죄, 죄송합니다.”
함송희가 갑자기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비명을 지르고는 이내 입을 막았다.
“와, 농담처럼 스타개발자, 스타개발자하긴 했는데, 진짜로 ‘스타’ 개발자가 될 줄은 몰랐네.”
“아직 출연 확답도 안 했습니다. 스타라니요.”
“그런데 출연하면 신작 게임 홍보 하는 것 아닙니까?”
양실장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신규 앨범, 신작 출연 같은 홍보성 방문으로 생각해도 된다고는 하는데…….”
“엇! 비겁하다!”
홍기도가 흠칫 놀라며 외쳤다.
“네가 비겁하다고 하니까. 살짝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네.”
“원래도 사기캐인데, 방송까지 끌어들이기 있나요!”
“있지!”
“왜요!”
“네가 싫어하잖아!”
홍켓몬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개발자가 예능이다. 아무리 다각화 시대라지만, 이건 정말 기쁜 일입니다. 맥베스의 위상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뭔가 내가 예능에 출연하는 것이 점차 확정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사실 연아의 압력에 심청이처럼 팔려가는 느낌도 들긴 했었는데…….
“그러고보니 운동선수 출신이잖아. 원래 선출이 예능계에서 블루칩 아닌가?”
“에이, 금메달 리스트도 즐비한걸요. 저따위가 거기서 선출입네 하는 것도 우습죠.”
이것은 진심이다.
방송에서 활약하는 선수 출신들은 각 분야에 정점을 찍은 이들이 대부분이지 않나.
“표세인 부장님은 이 업계에서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최고의 주가씩이나…….”
“아니 맞지. 솔직히 돈 좀 벌었다는 사업가들도 종종 방송에 출연하지만……. 표세인 부장은 급이 다르잖아?”
“아이고, 이런 곳에서 돈 이야기는 그만 하시죠.”
기둥소프트의 매출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어쩐지 낯이 뜨겁다.
이건 방송 출연보다도 더 부끄럽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출연은 할 모양이군.”
“사실 그렇습니다. 공짜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인데, 포기하긴 아깝잖아요?”
방송에 출연해서 한번 부끄러워 하는 대가가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아낄 찬스라는 것은…….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쨌든 축하해.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라고.”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표세인 부장님의 평소 모습만 보여주셔도 별 무리는 없을 겁니다.”
문이사와 양실장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격려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소 요란스러운 축하가 끝나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일 좀 해볼까.”
인디게임 프로젝트 관련 기획을 쳐내며 오전을 보내는 사이, 스마트폰이 울렸다.
놀랍게도 조연준이었다.
-TV봤다.
-네가 그런 것도 볼 줄은 몰랐네.
-투자자 동향은 주시해야지.
-그래. 놀리려면 어서 시작해. 이미 각오는 되어 있다.
조연준이 굳이 방송 출연을 축하하기 위해 연락을 취했을 리는 없지.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 다소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놀리다니. 걱정돼서 연락한 거다.
-걱정?
-그……. 한국 마피아는 방송에 출연해도 괜찮은 건가?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미국에서는 오메르타라고 해서, 마피아 멤버가 방송에 출연하면, 배신의 댓가로 눈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대체 이 녀석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나 법적으로 청렴결백한 사람이다.
-그래. 잘하고 있군. 부디 계속 그렇게…….
나는 조연준의 메시지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
에머리였다.
“안녕하십니까.”
-하이~ 방송 잘 봤어. 멋지던데?
“감사합니다.”
-우리 지난번에 식사 약속했던 것 기억하지?
안그래도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 싶었다.
“물론입니다. 언제가 편하십니까?”
-오늘 점심 어때? 내가 회사로 갈게.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케이~ 멋진 에스코트를 기대하라고!
뭔가 미국식 유머인 것 같은데 반응하기가 다소 애매하다.
나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연아에게 보고했다.
-에머리가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네.
-응. 비싼 것 얻어먹어!
-예비 장모님인데, 내가 사드려야 하지 않나.
-아니야.
-아니야?
-지금 오빠에게 잘 보여야 할 사람은 에머리거든.
아! 지난번에 얼핏 들었던 엠플의 게임업계 진출 이야기가 떠올랐다.
-흐음, 그렇네. 맛있는 것 얻어먹어야 겠네.
-정답!
좋아. 그러면 뭘 얻어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에스코트 기대하라고 하셨으니, 한껏 기대해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가시죠.”
“어딜가?”
“식사하러요.”
“아, 미안한데 나 오늘 약속이 있어.”
“저도 있어요.”
“?”
“?”
대체 이 녀석은 뭔소리를…….
“설마 에머리가 너도 불렀어?”
“네. 분위기 좀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향신료가 되어 달라고 했어요.”
“너 같은 MSG까지 필요하다고 할 정도면…….”
“잠깐!”
“응?”
“MSG라니!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는 이야기 군요!”
“그럼 네가 뭐라고 생각했냐?”
“저야 순도 100% 천연 조미료 같은 타입이죠!”
그래. 어쨌든 조미료를 넘지는 않는구나. 선은 잘 지키네.
“알겠다. 가자. 라면스프.”
“라면스프의 효능을 모름? 죽어가는 우리 누나 찌개 맛도 살리는……. 독일에 있는 큰 매형이 매번 얼마나 성화인데요! 라면 스프 좀 보내달라고!”
MSG는 안 돼도, 라면 스프는 괜찮은 거냐? 이걸 까탈스럽다고 해야 할지, 무던하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우리는 투닥거리며 회사 정문에 도착했다.
“하이~”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에머리가 살갑게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흔들었다.
“우리 둘만 있으면 분위기가 조금 딱딱할지도 몰라서 미스터 홍도 불렀어요. 괜찮죠?”
“네. 뭐.”
나 역시도 예비장모이자, 비즈니스 상대인 에머리는 쉽지 않은 상대다. 그리고 어차피 홍기도는 이미 나와 연아의 관계도 알고 있다.
딱히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럼 가시죠.”
홍기도가 앞장서 차문을 열었다.
*
*
*
에머리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한적한 외각에 위치한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스테이크군요.”
“고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좋아합니다. 스테이크 나쁘지 않지요. 하지만 역시 한우를 숯불에 구워 먹는 것이…….”
이 놈은 정말 언제까지 한우 타령을 할 생각인 걸까?
“사실 저도 이곳은 잘 몰라요. 평소에는 육류를 크게 즐기지 않아서…….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아!”
평소 육류를 즐기지 않는데, 나를 위해서 배려했다는 말인가?
이건 살짝 뭉클해진다.
“할 수 없군요. 최대한 만족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놈은 분위기 못읽나? 지금 네가 대답할 차례가 맞아?
살짝 도끼눈을 치켜뜨는데, 이 녀석은 이미 고기에 온 정신이 팔린 것인지, 양손에 각각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묵묵히 테이블만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럴때의 홍켓몬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잘 됐다. 무시하자.
“그런데 생각보다 한국에 오래 계시는군요.”
“그러게요. 갑자기 팬데믹이다 뭐다, 일 처리가 늦어지는 탓에 이렇게 됐네요.”
“요즘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대체 앰플의 부사장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은 한국의 여러 회사들과 의사조율을 하고 있는 단계에요.”
“그러시군요.”
VR기기부터 컨트롤러에 이르기까지, 앰플은 자신들이 개발중인 프로젝트에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맥베스에게도 나쁠 것은 없다. 아니, 솔직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한 기회다.
“물론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죠. 특히 표세인 부장님……. 크큭.”
갑자기 웃어?
“본인 가치가 지금 얼마나 상승하고 있는 지 모르시죠?”
“제 가치요?”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이지?
내 카드가 제일 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