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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21화 (221/346)

221.

“오랜만이군.”

이상무의 방에는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은퇴한 함성준 전 전무가 함께 있었다.

“잘 지내고 말고, 요즘 시간이 남아서 운동을 좀 하고 있는데 살 빠진 것 보이지?”

“네. 정말로 좋아보이십니다.”

요즘 들어 부쩍 살이 붙은 이상무 곁에 있기 때문일까? 군살을 훌쩍 덜어낸 함전무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보기 좋아 보인다. 이상무도 나와 같은 느낌인지, 슬쩍 본인의 뱃살을 어루만지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형님을 부를 거였으면 왜 나에게 연락을 안한거야?”

“하하, 서프라이즈?”

내 가벼운 농담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상무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정말로 무슨 일로 형님까지 호출한거야?”

이상무는 함전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정작 함전무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저 친구에게 들어야지. 나도 자세한 이야기는 못들었어.”

“자세한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온 겁니까?”

“그럼! 한가하거든.”

“뭘 또 자랑스럽게…….”

“부끄러울 것은 또 뭐야?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이런 때도 있어야지.”

“백번 천번 옳은 말씀이십니다.”

나는 함전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어쨌든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이상무님 말씀을 듣고 하나 깨달은 것이 있지요.”

“깨달은 것?”

“마왕……. 아니, 회장님께 빚을 갚고 싶은 사람은 비단 이상무님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호오……. 그런 거였군.”

이상무와 함전무가 넌지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교환했다.

“일단 용건은 알겠어. 난데없이 자신이 개발하는 게임의 기획서를 내게 보낸 이유가 그거였군.”

“예. 그런겁니다.”

내 말에 함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맥베스에서 퇴사한 사람이야. 내가 이제와 이런 일에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지 않나?”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째서?”

“맥베스가 아니라 기둥소프트에서 자문으로 모실 테니까요. 물론 기간제입니다만.”

“하하하! 자문이라, 그거 그럴 듯 하군.”

함전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우리쪽 아이템은 그렇다 치고, 다른쪽 아이템은 어떤 상황이지?”

다른 팀들도 궁금하지만 내심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전무군단의 현주소가 궁금한 것이겠지.

“그쪽은 신경쓰실 것이 없습니다.”

“으음……. 물론 자네만한 인재는 없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친구들도 나름…….”

함전무가 내 말을 곡해하고 전무군단을 두둔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그들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미 그들에게 선언했듯이 우리는 현재 속한 리그가 다르다.

“경쟁 상대가 다릅니다. 전무군단 측은 문이사, 양실장 진영과 한판 승부를 내게 될 것입니다.”

“오호, 그거 흥미롭군.”

“저 보실 필요 없습니다. 문이사는 이제 제 사람 아닌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이제는 그들의 시대지.”

어쨌건 회사라는 정글에서 삼엄한 서열 다툼은 빠질 수가 없다.

함전무도 이상무도 그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문이사와 도이사, 양실장 세대의 인물들이 맥베스의 중핵이 되어 회사를 이끌어갈 차례.

이와 같은 진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틀림 없다.

“이래저래 재미있게 돌아가는 군.”

“네. 요즘 지켜보는 맛이 쏠쏠합니다.”

이상무도 동의한 다는 듯이 웃으며 곁에 있던 과자를 입에 넣었다.

“……넌 이제 좀 그만 먹어. 아까부터 왜 그렇게 많이 먹는 거야? 아침 안먹었냐?”

“마누라 잔소리로도 충분합니다. 형님은 신경 끄시죠.”

“오는데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다. 우리는 당뇨 조심해야할 나이라는 것을 명심해.”

“나도 안다니까요. 거참!”

이상무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생각해보면 넌 어릴 때부터 운동 지지리도 안 했지. 대학 때도 맨날 구석에 처박혀서…….”

“지금 우리 나이가 몇인데 대학시절 이야기입니까?”

이상무는 툴툴거렸다.

“이런, 표세인 부장 앞에서 늙은이 들이 괜한 과거담을 늘어놨구만.”

“아니요. 저 이런 이야기 좋아합니다.”

겉치레 인사가 아니다. 나는 정말로 어른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 한다.

그때였다.

“뭐야? 이렇게 모일거였으면서 왜 나한테는 연락 안했어?”

조회장 등판!

“아니, 일단 이쪽 용건 끝내고 형님께 인사드리러 가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 놈 살찐거 보고 뭐 하실 말씀 없습니까?”

“있지.”

“에이……. 진짜.”

“넌 요즘 뭐 믿고 그렇게 뒤룩뒤룩 찌냐? 제수씨가 생명보험 좀 크게 들어놨다든?”

“형님 보다 더 큰걸 들어놨나 봅니다. 이렇게 찌울 정도면…….”

현재 오너일가를 제외하고는 사내 최고 어른인 이상무가 이렇게 갈굼을 당한다는 것이 무척 우습다.

어쩐지 내가 낄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지?

“일단 그럼 먼저 이야기 나누십시오.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왜? 그럴필요 없어. 앉아.”

조회장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어른들 이야기 중이시니…….”

“이상무 눈치 볼 것 없어. 살은 제가 찌웠으니 책임도 제 몫이지.”

“아니, 본인은 언제부터 운동하셨다고?”

“난 그래도 대학시절때도 이따금 공도 차고 그랬어.”

“클클, 차기야 찼지. 개발이라서 문제지.”

“형님도 운동은 눈으로만 하시는 타입아닙니까.”

서로의 공격에 서로가 데미지를 입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분명한 것은, 세분 모두 운동에 조예가 없으시다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이제 슬슬 체육대회 시즌 아닙니까?”

“그렇군. 벌써 그렇게 됐군.”

“시간 참 빠르네요.”

“그러고보니 체육대회라고 하면…….”

갑자기 세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넌 금지야.”

“자넨 빠져야해.”

“출전 금지.”

이럴때는 또 궁합이 척척 맞는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저도 이제 부장 아닙니까. 부장급이 그런 자리에 끼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저도 얌전히 구경하겠습니다.”

“끄응……. 저렇게 말하니 뭔가 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인데…….”

“좀 건방지지 않습니까?”

“차라리 뭔가 빡쎈 것을 준비해서 굴리는 편이…….”

저기요? 다들 왜 그러시는거죠?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니까요?

저기요?

“그래, 아이디어를 한번 짜 보자고.”

“예. 분명 묘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죠. 이거 뭔가 좀 그러니까…….”

더이상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쩐 일이야?”

한참 체육대회에 대한 음모(?)를 설계하고는 이제와 함전무에게 방문 목적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표세인 부장에게 들으시는 편이 좋겠지요. 저도 불러낸 이유를 듣던 참입니다.”

“이상무가 아니라, 네가 불렀다고?”

“네.”

“전 전무까지 호출하고, 표세인이 많이 컸구만.”

“전 전무면 전무 아니니까. 하하.”

함전무가 호방하게 웃으며 나를 두둔해주었다.

“함전무를 호출하는 것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은퇴한 노인네가 뭐에 필요해서?”

“회장님께 빚을 갚는단 느낌?”

“뭘 말을 돌려, 한방 먹여주려는 거지! 킬킬킬.”

함전무는 낄낄 웃으면서 안 그렇냐는 듯이 이상무의 팔을 툭 쳤고, 이상무는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쭈? 그런 꿍꿍이가 있었다 이거지? 갑자기 이상무가 왜 표세인 부장하고 붙어먹나 싶었더니…….”

“하하, 솔직히 개발자로서는 제가 제일 낫지 않습니까?”

이상무의 말에 조회장과 함전무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당분 과다 섭취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아니냐?”

오우, 이쪽은 이쪽대로 경쟁구도가 강력하구나.

“그래서 작당모의는 잘 되어가고 있으신가?”

“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무야 그렇다치더라도 함전무는 너무 늦게 발을 들인 것 아니야?”

“안 그래도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어. 이미 기본 골격은 나왔자나. 내 역할은 뭐지? 솔직히 코딩 정도야 어물어물 할 수 있겠지만, 현역들 정도는 아니야.”

함전무의 말은 타당하다. 하지만 내가 설마 그 정도 고려도 하지 않았겠는가?

“간단히 말씀드리죠. 저희 프로젝트는 콘솔먼저 출시할 예정입니다.”

“콘솔?”

피씨도 아닌 콘솔로 먼저 출발하겠다는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갑자기 왜?”

“굳이 콘솔일 필요가 있나? 피씨여도 충분한 것 아니야?”

“피씨로도 출시할 겁니다. 기간독점 이후가 되겠지만요.”

“클클클. 뭔가 꿍꿍이가 있구만…….”

“네. 있습니다.”

그럼요.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이미 내가 줄만한 어드바이스는 홍켓몬을 통해 모두 전달했다.

그러니 본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마왕 퇴치에 주력해야겠지.

“정보 공개는 여기까지라 이거구만. 야박하긴. 클클.”

“야박한 것이 아니죠. 저희 경쟁체제 아닙니까.”

“그렇지.”

“애초에 지금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회장실로 돌아가시죠?”

함전무와 이상무도 나를 거들며 조회장을 압박했다.

“클클클, 아주 흥이 나게 해주는 구만. 좋아. 어디 제대로 붙어보자고, 자네들 우리 작품 아직 못봤지? 기대해도 좋아.”

조회장은 그러면서도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쨌든 콘솔쪽을 맡아 달라 이거군.”

“네. 그렇습니다. 함전무님 인맥 넓으시지 않습니까? 일본쪽과 컨택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바쁠때는 코딩도 좀 해주시고요.”

“나 비싼 사람이야.”

“은퇴후에는 보통 반값이라고 하던데…….”

“돈도 줘?”

조회장이 기가차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 몸값 깎으셔봐야 누워서 침뱉는 꼴입니다. 저 맥베스 전무 출신입니다.”

“……많이 챙겨줘라.”

뭐 이래저래 말들은 많았지만 결국 내 마지막 포석까지 끝났다.

아직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콘솔을 거쳐 피씨시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광의 루트라고 인식 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지금 우리가 만드는 게임의 볼륨은 그리 길지 않지만…….

작품성은 상당할 예정이니까.

그런거라면 콘솔에서 먼저 유명세를 얻고 PC 시장에 도전하는 편이 낫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

*

*

“함전무님이 표세인 부장쪽에 섰다고요?”

도이사는 아찔한 심정이었다.

다른 팀이라면 몰라도 전무군단의 입장에서 함전무의 위상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당장 이름부터가 전무군단인 것.

“애초에 실수였던 것 아닙니까? 그냥 처음부터 표세인 부장쪽에 섰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차피 저희는 홀로서기를 해야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장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문이사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서 물러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 대로였다.

은혜는 은혜일뿐. 어찌되었건 함전무는 은퇴한 사람이다.

이제 자신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다져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뭐가요?”

“표세인 부장의 말대로……. 리그가 달라서…….”

“……그건 그렇지요.”

임원으로서 부장급 인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떨까 싶지만…….

표세인과 다른 리그에 속해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안심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어? 진짜 가져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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