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갑작스러운 판데믹, 그리고 새롭게 시작된 재택근무 열풍.
이 모든 갑작스러운 변화의 타개책으로 연아는 인디게임 프로젝트를 발동시켰다.
각자의 열띤 경쟁의식과는 별개로 인디게임 프로젝트는 조연아의 입장에서는 잠시 숨고르기에 지나지 않았다.
새롭게 부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자 마자, 들이닥친 미증유의 사태로 인한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편.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앰플사의 제안과 자신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슬슬 피치를 올릴 필요가 있었다.
‘앰플사가 아무리 관대한 제안을 하더라도 이대로라면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세컨드 파티 수준을 넘어 설 수 없어.’
게임업계에서는 하드웨어 제조사가 직접 제작하면 퍼스트 파티, 투자 혹은 제휴 등으로 얽힌 관계를 세컨드 파티, 단순한 외부 개발사를 서드 파티라고 부른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무작정 끌려가는 것은 조연아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보다 공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회장님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조연아가 준비한 계획의 신호탄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고생이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그 친구와 함께 왔으니, 곧 만나게 되실 겁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독을 풀 시간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방문하겠다고 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 친구와 함께 곧 방문하겠습니다.
“네. 함께 저녁식사라도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지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이후 조연아는 표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부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회사에서는 철저히 직급에 맞춰 행동한다. 이 모습이 얼마나 듬직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오늘 김대표님이 복귀하셨어요.”
-그렇습니까? 긴 출장이셨네요.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동석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가 끊어졌다.
“후우, 이제 시작이네?”
에머리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준비하기 시작한 플랜이 드디어 첫발을 떼는 순간.
‘절대로 끌려갈 수는 없지.’
상대가 앰플이든 뭐든, 끌려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
*
*
“무슨 전화에요?”
“아이! 깜짝이야. 너 진짜로 그러다 다친다니까?”
내 자동방어기능 발동하면 너 죽어 그러다가.
이 놈은 왜이렇게 등 뒤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혹시 오늘 회사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오늘 저녁 식사 약속 있어.”
“아니, 그런걸 왜 제게 묻지도 않고 정하시는 거에요!”
때릴까? 때릴까? 때릴까?
“주말에 데이트 있으세요?”
“왜 갑자기 그런걸 묻냐?”
“제가 선약 잡으려고요.”
“선약?”
“조만간 우리 홍시 생일이에요.”
“아! 네 조카?”
“네.”
“그런데 네 조카 생일에 왜 나를 초대해?”
“우리가 그정도도 못할 사이인가요?”
대답하기 진짜 애매한데……. 그럼 우리 가족 생일때도 널 불러야 하냐?
아, 왠지 이놈 요즘에 내 동생놈이랑 친해서 진짜 올지도…….
물론 우리 형제가 딱히 집에서 생일축하하는 가풍은 아니지만…….
“일단 무슨 일인지 이야기나 들어보자. 갑자기 왜 조카 생일에 나를 초대해?”
“가보시면 알아요. 암튼 토요일에 봐요.”
“주말까지 너 보는 것은…….”
“주말에 홍과장님 집에 가시나봐요?”
“응.”
아니, 저 아직 대답 안 했어요.
뭘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냐!
“좋겠다. 저도 주말에 약속 없는데.”
“그럼 너도 와.”
“정말요?”
“그럼. 우리 홍시 얼마나 이쁜데. 보면 놀랄걸?”
아니, 조카 이쁜거랑 팀원들 끌고 가는 것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냐.
“조카분 이름이 홍시에요?”
“홍시호야.”
“그런데 홍과장님 누나분들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런데 조카분 성이 홍씨?”
“매형이 자기성이 싫다고 누나 성으로 하자고 했거든.”
“매형 성이 뭐길래?”
“옹씨요.”
묘하게 홍씨랑 비슷하다?
“홍시가 딸이라는 것을 알게된 순간, 본인의 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쁜 조합이 안 나온다고 그렇게 하기로 했대요.”
“그렇구나.”
“그러고보면 부장님 성씨도 좀 특이하시죠.”
“그렇지. 이게 또 특이한 것이, 우리 선조가 표대박이라는 중국인이고 고려로 귀화했다는데, 정작 중국에는 표씨가 없다더라고, 그래서 스타트 지점이 애매한 성씨야. 뭐 어차피 우리 집이 딱히 뼈대 있는 집안도 아니고……. 일단 살면서 같은 성씨를 만난 적은 없네.”
“저도 본 적 없네요.”
“하긴 함씨도 특이하지. 생각해보면 홍기도 이 녀석 제외하면 우리팀은 다 성이 흔치 않지.”
“네. 함씨는 단본이라서 일단은 전부 먼친척이죠.”
“그러고보니 함전무님도…….”
“아마 먼 친척 어른이시겠죠?”
직접적인 관계는 없구나.
사실 혹시라도 친척 관계일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는데…….
“언니는 안 가요?”
“내가 쟤 조카 생일파티에 왜 가?”
“초대 안 했다.”
“어차피 안 갈 거 거든?”
“초대 안했다니까?”
이 두녀석은 또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자자, 이제 그만하고 다들 일 하자. 너희 프로젝트 잘 진행되고 있지?”
“훗, 신경쓰이십니까?”
“일단 내가 부장이다. 임마. 신경써야지.”
“곧 깜짝 놀라게 되실 겁니다.”
“뭐 회장님과 남궁원이 있으니, 어련히 잘 하겠지.”
“제가 리더거든요!”
“……그게 유일한 불안이지.”
잠시동안 우리는 잡담을 나눈 후에 막바지 업무 마무리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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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표세인 팀장이라고 했던가요?”
소일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몰랐는데 벌써 부장으로 승진했다더군.”
체육대회 이후로 김대표는 모종의 임무를 받고 일본과 대만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외부영입인사 답게, 본사내에 딱히 연결고리가 없던 탓에 정보가 늦었다.
“차장, 팀장, 부장. 예상은했었지만, 너무 빠르군.”
양성태가 표세인을 추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쓸만한 인재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오랫동안 본사를 비운 탓에 김대표는 그동안 너무나 달라진 표세인의 입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 업계에서 벼락 출세야, 흔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소일연 역시 그런 케이스였다. 그런 그를 영입하기 위해 김대표는 상당한 공을 들어야했다.
다행히 처음에는 조회장, 이후에는 조연아의 전폭적인 지원과 강력한 비전 덕분에 무사히 소일연을 영입할 수 있었다.
‘선물이 많이 늦어 버렸군.’
소일연이라면 표세인에게 날개를 달아주기에 충분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시간은 너무 늦어버렸다.
김대표가 그리는 양실장 휘하에 소일연 그리고 표세인으로 이어지는 구도는…….
이미 첫발부터 완전히 어긋나있다.
이미 표세인은 양실장과 문이사라는 쌍두마차와 함께 전무군단 마저 배후에 두고 있는 상황.
“일단은 실장부터 시작이라고 했던가요?”
“그래. 하지만 약속한 대로 머지않아, 이사 자리가 주어질 거야.”
임원은 오너라고 해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름의 절차를 거쳐야하기에 일단은 실장과 굉장한 연봉과 인센티브로 우선적으로 협의를 보았다.
물론 얼마후 그는 자연스럽게 임원으로 올릴 수 밖에 없다.
소일연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한가지 걱정스러운 점이라면…….
“아무튼 표세인이라는 친구를 당장 제 오른팔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문제였다.
처음봤을 당시만해도 표세인은 일개 과장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날개를 달아줄 요량으로 소일연이라는 상사를 붙여주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렇기에 선물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했건만…….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른 뒤에 김대표는 약간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양실장이라는 친구의 오른팔……. 하루빨리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군요.”
이 남자는 예상 외로 너무도 공격적이었다.
“양실장은 적이 아니라니까.”
“글쎄요. 지인에게 듣기로는 딱히 저와 잘 맞을 것 같지는 않더군요.”
소일연의 지인이라면 아마도 MC소프트의 설동은 대표일 것이다.
인재욕심이 많은 설대표는 소일연과 양성태에게 오랜 공을 들였다.
하지만 양성태는 본인이 거절했고, 소일연쪽은 MC소프트 이사회의 반대를 꺾을 수 없어서 무산되었다.
소일연이 요구한 조건은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아마도 현재의 맥베스를 제외하거서는 어떤 회사도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려울 것이다.
초기 투자금만해도 수조원 대가 예상되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함부로 재가할 만한 자금력과 배포 그리고 비전을 지닌 인물은 조연아를 제외하면 찾기 어렵다.
그렇기에 모두가 탐내는 인재를 영입할 수 있었다.
‘부디 크게 부딪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김대표는 찜찜한 기분으로 부디 별탈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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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부회장님을 먼저 뵈러가지.”
본사 앞에 도착하자 김대표는 조연아를 먼저 만날 생각이었다.
이미 조회장이 먼저 앞으로의 일은 자신이 아닌 조연아를 통해 진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황.
“아니요. 어차피 식사 자리에서 뵙게 되겠지요. 일단은 제 수족이 되어줄 사람들부터 보고 싶습니다.”
수족이라는 말이 걸린다. 하지만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조연아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들끼리 첫단추를 끼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알겠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예.”
소일연은 짧은 대답과 함께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처음 방문한 것임에도 소일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길을 잘 찾는 사람이 있다. 소일연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여기로군.’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발3실에서 분리해 나온 독립 개발실. 아직은 구성도 마무리되지 못한 탓에 정식 넘버링도 부여받지 못한 상황.
하지만 이제 곧 개발 4실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을 것이며, 그곳의 실장은 다름 아닌 소일연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덕분에 아직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들이 많았고, 그것이 오히려 소일연에게는 달갑게 여겨졌다.
자신의 희망대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이렇게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 더 좋지 않겠나?
“키가 크다더니, 딱 알겠군.”
소일연은 곧장 표세인을 발견했다. 큰 키에 반듯한 이목구비.
듣던 그대로의 인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경쾌한 키보드 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우스를 안 잡는 군. 다행히 기본기는 되어 있는 모양이야.’
다소 오래된 기준이지만, 숙련된 사무직 인력일수록 마우스를 잡지 않는 법이었다.
모든 것은 단축키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때로는 배 이상의 업무시간 단축을 이룰 수 있다.
“표세인 부장?”
소일연이 접근하자, 표세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죠?”
“소일연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맥베스의 실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곳 개발 4실을 담당하게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표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표세인 부장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
소일연은 표세인이 내민 손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손을 뻗거나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잠깐의 어색한 분위기.
“악수는 상급자가 청하는 겁니다. 표세인 부장.”
“이런, 죄송합니다.”
표세인은 순순히 손을 거두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다행히 쓸데없이 뻣대는 스타일은 아니군요. 그건 좋습니다.”
뻣대?
멘트가 뭔가 묘하다?
“좋긴 뭐가 좋아?”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려온 퉁명스러운 한 마디.
“?”
“문이사님?”
맥베스의 미친개 문상훈의 등장이었다.
오케이……. 일단 물어!
누가 누구 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