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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27화 (227/346)

227.

표세인 마저 떠난 자리에는 김대표와 소일연 단 둘 만이 남았다.

“묘하군요. 솔직히 조금 건방지다는 느낌까지 받았는데요.”

소일연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고작 부장 따위가 조건까지 내밀다니?

빠르게 변화하는 IT업계에서 근래 최고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한발 걸칠 수 있는 커다란 기회.

그런 기회를 제안했음에도 먼저 능력을 보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직 그도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거겠지.”

소일연이 실리콘밸리의 작은 스타트업을 이끌며 개발한 신개념의 클라우드 시스템은 초기 투자 가치만으로도 수천억 대의 어마어마한 기대를 모았다.

“NFT 시장에 빠르게 편승하는 그 감각을 높게 평가했는데……. 다소 실망스럽군요.”

소일연은 표세인이 시류를 읽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아니,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지.”

김대표는 생각이 달랐다.

자신이 오랜 해외 출장을 거치는 사이, 맥베스는 무려 두배나 몸집을 키웠다.

물론 이러한 빠른 성장은 다소 거품과 같은 기대감인 경우가 있어서 금방 꺼질 수 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주가가 빠지는 속도가 더디다.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발표한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다수의 인디게임을 개발하며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데도 이런 상황.

“단순히 판데믹으로 인한 호황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세계 전역이 유례없는 판데믹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지만, 몇몇 업계는 다소 묘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게임 업계가 특히 그랬다.

모두가 외출을 삼가고 실내에 틀어박힌 탓에 저마다 게임을 즐기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스트리밍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인데…….”

“일단 그가 무턱대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일견 타당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 결국 정치싸움은 피할 수 없어. 그리고 지금 맥베스는 초유의 혼란사태지. 함전무는 은퇴하고 이상무는 존재감이 흐려진 상태. 여기에 최고 주가를 올리는 양실장과 문이사의 합작. 우리도 이 점을 주목하지 않았던가?”

혼란한 상황이야 말로 신진세력이 대두되기 기장 알맞은 기회다.

“그렇기에 우리도 보여줄 것은 보여줘야지. 비단 표세인 부장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말이지.”

“그런데 고작해야 과장급 인사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그 과장급 인사가 다름 아닌 표세인 부장의 오른팔이지. 홍기도 과장.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드는 친구라네.”

과거 체육대회 당시 홍기도가 족구에서 활약하는 것을 무척 기껍게 여겼던 김대표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홍기도 과장을 언급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표세인 부장이 완전히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군.”

다름 아닌, 자신의 오른팔을 포섭해 보라는 제안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건의였다.

“하지만 양실장과 상의해야 한다는 것은…….”

“상의는 당연히 해야지. 우리도 나름 넌지시 표세인 부장을 통해서 우리의 뜻을 밝히려는 계획도 있지 않았나. 반대로 상의도 없이 넙죽 우리쪽에 붙는다면……. 그런 인물을 신용할 수 있겠나?”

“로열티……. 확실히 그 부분은 중요하죠.”

김대표의 설득에 소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고는 해도, 넙죽 줄을 바꿔 잡는 인물이라면 신뢰가 싹트기는 어렵다.

“표세인 부장에 대해서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우수한 정치력을 가진 인재야. 나는 오히려 그 부분을 더욱 높게 평가해.”

일만 잘하는 인물이라면 의외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수한 업무 수행능력과 정치력을 겸비한 인재라는 것은 매우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작 과장급에 불과한 시점부터, 그 콧대 높은 양실장을 움직이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야. 나는 그 부분이 그의 최대 가치라고 생각하지. 자네도 그 부분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거야.”

“정치력이 지나치게 높은 하급자는 달갑지 않은데…….”

“날카로운 검은 쥐고 있는 사람도 위험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무딘 칼을 고를텐가?”

“결국 사용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김대표는 지금까지 외부 영입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좋은 인재들과 연을 만들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회장이 일선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부회장인 조연아는 아직 연륜이 부족하다.

거기다 회사의 구심점들이 사라진 지금.

김대표는 소일연과 함께 맥베스의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보다 문이사와 만났다고?”

“네. 듣던 대로……. 흉흉한 분위기 더군요.”

“그렇지. 사실 나도 그와는 큰 접점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이 제 발밑에 있다는 양, 안하무인으로 기세를 흩뿌리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지.”

“네. 저도 정확히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장 그 친구는 무시해도 좋아. 오히려 우리가 신경 쓸 곳은 주인을 잃은 전무군단과 방황하고 있는 이상무 파벌의 인재들이야.”

갑작스러운 변화에 구심점을 잃은 인재들을 최대한 포섭하는 것.

김대표는 당장 이름난 핵심인력들 보다는 세력 기반을 다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일연 역시 동의한 바였다.

“그렇다면……. 그 부분은 김대표님께서 맡아주시는 거겠죠?”

당장 굴러들어온 돌인 자신 보다야, 직급으로만 계산해도 김대표가 훨씬 나았다.

더욱이 아직 소일연의 스타트업은 맥베스로 흡수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은 탓에 이사 자리도 받지 못한 상황이 아닌가?

“그렇지. 자네는 일단 홍기도 과장에게 집중해주게. 나는 그 친구 정말로 마음에 들거든?”

“예. 알겠습니다.”

소일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과장급 인사다.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고 다른 곳에서는 받을 수 없는 큰 보상을 제시한다면 어렵지 않게 포섭이 가능할 것이다.

*

*

*

다음날.

나는 회사에 출근과 동시에 곧장 양실장을 방문했다.

“오셨습니까?”

“뭔가 묘한 분위기입니다?”

양실장은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네. 아무래도 이 방을 곧 넘겨줘야 할 것 같아서요.”

조회장이 서서히 경영일선에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 현시점에 양실장의 역할 역시 다소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디게임 프로젝트까지 참여하게 되지 않았던가?

“혹시 인사이동에 관한 이야기라도 나온 것입니까?”

“아직은 아무런 이야기도 없지만……. 얼마 후에는 시작되겠지요. 그래서 겸사겸사 조금씩 준비중입니다.”

확실히 당장 전무자리도 비어있고, 여러모로 임원진 구성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씁쓸하십니까?”

“사실은 그럴 줄 알았는데……. 조금은 홀가분하다는 느낌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말에 양실장은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면서 피식 웃었다.

“김대표님과 소일연 실장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양실장은 뭐든 다 알고 있다.

짐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일까? 묘하게 초연한 분위기가 곁들여지니, 이제는 마법사를 넘어 한적한 숲속에서 고요하게 지내는 현자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김대표님과의 공조는 어려워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체육대회 당시라면 모를까……. 어쩌면 조회장님은 그 당시 저희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싶으셨던 걸지도 모르지요.”

굳이 김대표에게 장기 해외 출장을 지시한 것은 다소 묘한 일이기는 했다.

물론 소일연과 그의 비전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굳이 그것이 대표에게 주어져야할 일일까?

“소일연 실장은 어떻던가요? 실리콘밸리의 기린아로 소문난 친구라고는 알고 있습니다만…….”

“자신감 넘치고, 업무능력도 우수한 것 같습니다. 맥베스에 딱 필요한 인재라는 느낌이랄까요?”

“인간적인 매력은?”

“그 부분만큼은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해서요.”

“그렇군요.”

양실장은 싱긋 웃으며 내게 커피를 건네주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커피를 받았다.

“일단 들은 이야기로는 저를 포섭하려는 계획이신 것 같습니다. 일단 주체는 김대표님이지만, 어쨌든 플레이어는 소일연 실장이겠지요.”

“네. 좋은 조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쪽 입장에서는 일선에서 움직여줄 인재들이 절실하겠지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보 통제입니까?”

역시……. 양실장은 때때로 무서울 정도다.

“예. 제 사내 입지에 대해서 확실한 단속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맥베스의 부장급 직원임과 동시에 기둥소프트의 대표, 게다가 뒤로는 최대 파벌의 수장이라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요상망측한 자리에 앉아있다.

“지금도 충분히 잘 단속해주고 계시지만, 이참에 재점검 한 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이사님과 문이사님께 확실히 당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그들도 표세인 부장님의 현재 운신에 무척 감사한 상황이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

“저쪽에서 포섭제의를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먼저 정치력을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치력이요?”

양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우선 홍기도 과장을 포섭…….”

“으음…….”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신음까지 흘리는 양실장의 행동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아무런 정보도 대책도 없이 무작정 홍기도 과장을 상대해야 한다니……. 비록 일면식도 없는 상대입니다만……. 소일연 실장을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하하, 뭐 살짝 약오르긴 하겠지만…….”

뭘 동정씩이나…….

“산 정상에 올라있는 사람은 의외로 등산로를 오르는 이들의 고충을 잘 모를 때가 있는 법이지요.”

“네?”

“홍기도 과장은 표세인 부장님 정도가 아니라면……. 정말로 대하기 어려운 타입입니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그 녀석이 누군가에게 날을 세우거나, 의도적으로 액션을 취하는 일은 없는 타입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무섭다?”

“표세인 부장님도 그렇지만, 홍기도 과장도 그 부분에서는 똑같지요. 눈에 보이는 송곳니와 손톱은 의외로 예측이 가능한 위협이라서 대비가 되기 마련이지만……. 두 분은 마치 키메라 같은 느낌이지 않습니까?”

개발자가 아닌, 양실장의 입에서 키메라 같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꼬리에는 독사의 머리가 돋아있고, 머리는 하나가 아니죠. 당최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을 만드는 타입. 이거 정말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소일연 실장 같은 철저한 이공계 타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럴수록 좋은 일이죠. 어차피 시간 벌기 용이니까요.”

시간 벌이에 더해 홍켓몬의 특기인 디버프 효과까지 걸어버린다면야…….

뭐 나쁠 것은 없지?

분발해라 홍켓몬!

잘 해내면 톡톡히 보상해주마!

*

*

*

“삐까?”

“갑자기 무슨 헛짓거리냐?”

남궁원은 인상을 찌푸르며 홍기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홍기도는 그저 주변을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치켜 들었다.

“삐까, 삐까!”

띠링!

[홍켓몬은 한우(보상)의 냄새를 감지했다!]

노년과장 조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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