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소일연은 생각했다.
‘인디게임 같은 비주력 프로젝트에 묶여 있는 것 보다야, 당연히 차기 주력 사업인 내 쪽에 붙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지사.’
더군다나 상대는 일개 과장급에 불과하다.
회사에 의리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승진과 급여뿐.
애초에 그것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생각해보면 곧장 양실장을 배반할 수는 없으니, 내심 손을 내민 것이 아닐까?’
소일연은 표세인의 의도를 멋대로 착각하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군.’
라고 생각하며 소일연은 마침 홍기도팀이 사용하던 회의실을 방문했다.
“누구시죠?”
낯선 인물의 등장에 홍기도와 팀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오늘 저희가 사용하기로 했는데요.”
홍기도는 순간 소일연이 회의실을 잘 못 방문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게 아니야. 난 이번에 새로 개발 4실의 실장으로 부임한 소일연이라고 한다.”
“4실?”
“우리 3실까지만 있는 거 아니었어?”
“혹시 우리가 4실인가?”
“그 이전에 우리 개발실 실장 양실장님 아니었어?”
하도 자주 얼굴을 비추는 탓에 비서실장임에도 불구하고 양실장이 자신들의 실장이 아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할 지경.
“4실은 현재 조직 중으로 새롭게 구성중에 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자신에게 하고 있냐는 표정.
‘뭔가 시작부터 대화가 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군.’
소일연은 묘하게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실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자네가 홍기도 과장인가?”
“네.”
“잠깐 시간 좀 내주지. 할 이야기가 있네.”
소일연은 밖으로 나가자는 듯이 엄지로 문밖을 가리키고는, 등을 돌렸다. 하지만…….
“안 됩니다.”
“뭐라고?”
“안 된다고요.”
일언지하의 거절.
예측한 적 없는 돌발사태에 소일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안된다는 거지?”
“회의 해야 하니까요.”
산뜻할 정도로 단호한 태도에 소일연의 머릿속은 잠시 하얗게 탈색되었다.
“……자네가 이 팀의 리더라고 했지?”
“예.”
과장급 인사가 리더가 되어 진행하는 프로젝트.
애초에 사내에서도 큰 개편과 재택근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한 쉬어가는 프로젝트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본인이 리더라도……. 보통 실장급이 잠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는데, 이렇게 단칼에 거절을 하나?
실리콘밸리를 거쳐, 일본에서 상당한 기간을 보낸 것이 문제였을까?
한국의 기업문화가 자신의 생각과는 완전 다르게 변해버린 것일까?
소일연은 혼란스러웠다.
“자네가 리더이기에 프로젝트에 애착을 갖는 것은 알겠네. 나도 딱히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저 나는 오후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그래도 안 돼요. 게다가 곧 마지막 팀원도 와야하고, 전달사항 전해야 해요.”
“으음…….”
소일연은 짧게 신음했다.
“클클, 내가 늦었구만.”
잠시후 젊은 팀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늙은 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요즘 이래저래 만날 사람이 많군. 차를 하도 마셔서, 화장실이 급해서 말이지. 미안하네.”
말년과장이라도 정도가 있지!
홍기도와 남궁원이 모두 과장급이기에 소일연은 늦게 도착한 마지막 팀원 역시 같은 급이라고 착각했다.
더군다나, 홍기도와 남궁원 조차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인디프로젝트에 한해서 직급을 폐기하자는 지령을 소일연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물론 이 팀의 구성원들이 다소 유별난 탓이기도 했지만…….
“은퇴할 시기가 가까워지니, 오히려 바빠지는 것 같군.”
“이 프로젝트는 마무리하고 은퇴하셔야 해요. 중간에 발빼시면 곤란해요. 서버는 마무리 지으셔야죠.”
“그래야지. 그래도 내 코딩 솜씨가 아직은 쓸만하지?”
“군더더기가 조금 많긴 하지만요.”
함송희의 말에 조양길은 멋쩍게 목을 긁적였다.
“나때는 그 방식이면 충분했는데 말이지…….”
저 나이에 코딩까지 한다? 이제는 확실하다.
대체 어떻게 저 나이까지 회사에서 버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년, 아니, 노년 과장은 그리 높은 직급의 인물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뉘신가?”
조양길이 힐끔 눈을 돌려 소일연을 올려다 보았다.
“새로 부임한 실장 소일연입니다.”
가급적 회사에서는 직급에 맞게 행동하자는 주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와의 나이차이가 이정도나 벌어지니, 소일연도 무턱대고 하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신가?”
조양길은 마치 물건이라도 품평하듯, 소일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소일연은 관심을 끊었다.
이 정도 연륜에 과장급 인사들과 함께 개발 일선을 뛰는 인물이라면 다소 호기심이 생기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시간에 여유가 없어서 그러니, 홍기도 과장. 잠깐만 시간 내지.”
“네. 안됩니다.”
“프로젝트에 애착이 있다는 것은 알겠네. 하지만 이건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프로젝트야.”
“프로젝트의 크기가 중요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내가 표현을 잘 못한 것 같군. 하지만 보다 비전이 있는 프로젝트에…….”
“그 비전의 판단 기준도 다른 것 같은데요?”
아! 순간 소일연은 한방 맞은 표정을 지었다.
과거 실리콘밸리에서 무수히 달려드는 투자자들을 뿌리치고 일본의 콘솔게임 회사의 문을 두드렸던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이 개발한 신 개념 스트리밍 시스템은 용량이 크고 높은 사양의 하드웨어가 필요한 게임 업계에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루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일본 콘솔기업은 자신의 비전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꽉 막힌 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에 소일연은 부끄러웠다.
물론 홍기도가 말한 비전과 중요도는 표세인에게 한방 먹인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실수를 범하게 되는 군.”
“네. 그렇네요.”
그렇다고?
“아무튼 밖으로 나갈 시간은 없다는 거지?”
“네.”
“좋아. 그럼 그냥 이 자리에서 말하지.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내 쪽으로 오게. 나는 곧 스트리밍 사업을 총괄할 예정이며, 조만간 정식으로 이사가 될거야.”
“그리고 나는 어중간한 이사에서 멈출 생각은 없어. 게다가 자네도 개발자라면 알겠지만, 스트리밍 사업의 비전은 어마어마하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고 이 이상의 보상을 약속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장담하지.”
소일연은 모두 앞에서 자신의 목적과 포부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더군다나, 실수를 범했다고는 하지만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어차피 과장급에……. 이런 만년과장이라고 하기에는 정말로 이 나이까지도 별볼일 직책없이 현장 실무를 담당하는 노인까지도 끼어있는 프로젝트가 아닌가?
이건 미안하지만 비교가 안된다.
이해할 것이다. 소일연은 확신했다.
“그렇군요.”
알아주는가? 그래! 개발자라면 모를 리가 없다!
쉽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렇기에 호기심이 샘솟는 캐릭터다.
소일연은 홍기도가 관심을 보인 것이 무척 기뻤다.
그렇게 소일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려는 순간!
“어제 왜 한우 먹을거라는 촉이 드는가 했더니, 이거였구나.”
“?”
뜬금없이 한우?
“이거 표세인 부장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죠?”
“……맞아.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별개로 자네에게 진지하게…….”
“사양하겠습니다.”
“뭐?”
“죄송……. 하진 않구나. 딱히. 아무튼 거절한다고요.”
“거절한다고?”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는 말아주세요.”
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거절 횟수에 따라서 한우 키로수가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소일연은 홍기도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어땠나? 이야기는 잘 진행됐나?”
“표세인 부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김대표의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뒤묻는 소일연.
“글세? 나도 딱히 그와 오래 알고지낸 것은 아니라서 말이지.”
표정을 보니 딱히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잘 안됐나?”
“잘 안됐다기 보다……. 전혀 안됐다고 해야겠지요.”
“전혀?”
“네. 홍기도 과장……. 아무래도 다소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대표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매력이 무엇인지는 저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호오, 그런가?”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에 김대표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물론 그 둘은 홍기도의 전혀 다른 면모를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하고 지금은 회장님과의 첫대면에 집중하자고.”
“예.”
“명심해. 아무리 회장님이 부회장님께 경영권을 물려주고 계시다고는 하나……. 결국 현재 회장은 회장님 본인이야.”
“당연하지요.”
처음부터 소일연은 맥베스에 대한 조연아의 지배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맥베스는 조양길 본인이 제 손으로 일궈낸 기업이었으며, 조연아는 아직 한참 연륜이 부족했다.
결국 조회장으로부터의 확답이 필요했다.
-똑똑.
“회장님. 김태영입니다.”
“들어오시게.”
조회장의 허락을 득한 김대표는 소일연과 함께 회장실에 들어섰다.
“헉!”
“왜, 왜 그러나?”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질린 소일연의 행동에 김대표는 당황했다.
“반갑구만, 우리 구면이지?”
고작 2시간 전에 만나버렸으니, 구면이라 하기에도 뭣했지만…….
“몰라뵈어 죄송했습니다.”
“클클, 아니지.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자네 잘못이 아니야.”
자신이 용서받은 것에 안도하는 한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변명의 여지는 있단 느낌이었다.
대체 홍기도를 비롯한 이들의 태도는 뭐란 말인가?
그게 어떻게 회장을 대하는 태도란 말인가?
미국에서도 이만한 규모의 기업에서 회장과 직원들이 그렇게까지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아니라니까? 그게 아니야.”
“?”
“자네가 사과할 일은 그게 아니야.”
결국, 사과할 일은 있다는 건가?
“나를 몰라본 것은 괜찮아.”
“…….”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느낌.
“그런데 뭘 믿고 내가 개발하는 게임을 무시하나?”
“!”
순간 심장이 아주 잠깐!
멈춰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조양길이야. 이래봬도 내 이름은 나름 해외시장에서도 통하거든?”
국내 게임 업계 1세대 개발자 출신에 맥베스라는 거대 기업을 일궈내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혼신의 힘을 다해, 코딩 소스까지 뒤져가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소일연이 그런 자신의 막내손자 같은 게임을 무시한다?
“소일연 실장.”
“네?”
“자네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겠어.”
“네?”
“내가 마침 이런 공부에 필요한 교재와 강사를 아주 빠삭하게 꿰고 있지.”
이제는 머리 조차 돌아가지 않는다.
“회장님 뭔가 제가 모르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친구가 아직 맥베스에 온지가 얼마 안되었고, 저도 한동안 떨어져있던 탓에 제가 정보 전달을 제대로 못한 것 같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김대표는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까스로 소일연을 두둔하며 조회장의 노여움을 풀고자 애썼다.
“나 화난 것 아니야.”
“그, 그러면…….”
“그래도 교육은 해야겠어. 앞으로 오래 함께 할 친구니까.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겠지?”
조회장의 한 마디에 소일연은 그저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관심병사…….
딱 그런 취급이었다.
응원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