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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29화 (229/346)

229.

“소일연 실장님이 찾아오셨었어요.”

“그래? 만나보니 어땠냐?”

“음……. 그냥 평범한 재미 없는 아저씨란 느낌?”

그래.

딱히 네게 인물평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지.

“듣자 하니, 회사 차원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신 것 같던데요.”

“맞아. 스트리밍 서비스 알지?”

“아아, 근데 그거 광고만 요란하고 대부분은 그냥 다운받아야하고…….”

“그래. 아직 기대만큼의 수준은 아니지. 하지만 듣기로 소일연 실장이 개발한 방식은 기존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우수하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정말로 관심 1도 없다는 대답이다.

“막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지?”

“저는 안 그랬죠.”

저는?

“설마 남궁원이랑 한 판 붙었어?”

생각해보니 남궁원이라는 변수도 있었구나.

“아니요. 남궁원이 아니라……. 소일연 실장님이 회장님 계신 곳에서 인디게임 프로젝트를 좀 얕잡아 보는 티를 내신 것이 걸리네요.”

“어쩌다가?”

“일단 회장님을 몰라보는 것 같던데요?”

와…….

이건 나조차 예상 못 한 대형 사고다.

“회장님이 대놓고 갈구실 타입은 아니신데……. 실실 웃으시며 위아래로 훑어보시던 모습은 뭐랄까…….”

“교육 들어가시겠지?”

“그러시겠죠?”

“요즘 소일거리 많이 찾으시네.”

서서히 경영권을 연아에게 인수인계하며 차츰 일선에서 물러나고 계시는 시점에서 오히려 전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는 느낌이다.

“그보다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하지만, 나는 슬쩍 발을 뺐다.

“무슨 이야기인 줄 다 아시면서, 괜히 길게 끌지 마시죠. 며칠이면 됩니까?”

역시 이 녀석이 눈치 하나는 귀신이다.

“일주일?”

“좀 기네요?”

“그렇지?”

소일연을 파악하고 이런저런 상황들을 정리하려면 나에게도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

“그럼 차라리 잘됐네요.”

“뭐가 잘 돼?”

“장소는 제가 정합니다.”

“흐음…….”

과거의 나라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라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이제는 뭐 가격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좋아. 딜! 하지만 소일연 실장님의 기분을 과하게 상하게 하지는 마.”

“걱정마십시오.”

“그리고 나 그냥 ‘일개’부장이다?”

“그럼 뭐 다른 거였어요?”

그래. 그거면 된다.

홍켓몬과의 작은 딜을 성사시킨 나는 오랜만에 아무런 방해 없이 문서작업에 착수했다.

지난번 공중파와 미튜브를 이용해 동시다발적으로 스쿨런의 광고 영상을 송출했다.

게이머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처럼 폭발적이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제대로된 플레이 영상이 아니기 때문.

그러나 문제는 없다.

이번에는 개발 진척상황에 맞춰 2파, 3파의 영상들을 줄지어 전파할 생각이니까.

“오늘은 타자 소리가 좀 다르네요?”

남궁원이 내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도 소일연처럼 타자소리로 무언가를 파악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이건 기획서가 아니라 스토리를 작업하는 중이니까.”

“부장님이 직접 스토리도 쓰세요?”

“나중에 권태인 차장에게 수정, 보완은 부탁해야겠지.”

권태인은 깨비몬 개발 이후로 원래의 소속팀으로 이동한 탓에 요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행전기의 스토리 작업은 성진규 실장이 담당했기에 더더욱 권태인을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부장님이 작성한 스토리문서라면……. 좀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래?”

“네.”

“애초에 세븐메이지. 초기 안도 내가 썼는데?”

“정말요?”

왜 이렇게 놀라실까? 개발 초기에는 내가 거기 에이스였단 것 몰랐나?

물론 혼자 작업한 것은 아니고,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래 봬도 외주 개발을 홀로 처리해내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당시에 내가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었겠나?

그때는 그냥 뭐든 다 해내야 했던 시기다.

“외주팀에 있을 때는 부장님도 종종 스토리 작업 했어.”

“정말로?”

“뭐 전공자들에게 비할바는 아니지만…….”

어차피 대부분 모바일용의 간단하고 단락적인 이야기 구조가 전부이긴 했다.

하지만 이래 봬도 나 역시 골수 게이머다. 표현력이나 문장력 같은 것은 한참 부족하더라도, 뼈대가 되는 이야기 구성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 가는 알고 있다.

“아, 나는 스토리는 안되는데…….”

“각자 특기가 있기 마련이지.”

애초에 남궁원은 시스템 파트가 특기고, 홍기도는 컨텐츠와 이벤트 분야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것을 잘하겠나?

“하지만 부장님은 다 잘하시잖아요.”

“그냥 너희와는 짬차이일 뿐이지.”

애초에 나는 이렇다할 특기가 없다. 그저 살벌한 일정을 처리해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구르다 보니, 이런 저런 잔재주가 늘었다는 느낌?

“짬차이……. 대체 언제 좁힐 수 있을 까요.”

그렇게 쉽게 좁히면……. 내가 너무 불쌍하지 않을까?

“조바심 내지 말고 경험을 쌓다 보면 어련히 다 잘하게 된다. 그리고 너는 이미 충분히 좋은 기획자잖아?”

“저는요?”

내 말에 홍기도가 냉큼 따라붙었다.

“어, 너는……. 웃긴 놈이지.”

“헤헤, 역시 그렇죠?”

다행이네. 재미있는 녀석도 아니고 웃긴 놈이라는 평가에 만족한다니…….

그래. 기대치가 낮으면 인생이 행복한 법이지.

“자, 그럼 일합시다.”

나는 다시금 게임의 플롯 작성에 돌입했다.

*

*

*

“오셨습니까. 대표님.”

도이사는 공손히 고개숙여 인사했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요즘 바쁘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군요.”

“무슨 말씀을요. 여기 앉으시죠.”

도이사는 김대표에게 상석을 양보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소일연이라는 친구를 영입해 오셨다고요.”

“예. 회장님께서 눈여겨 보시던 차세대 사업 아이템의 핵심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니까요.”

은연중에 조회장을 언급하며 소일연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김대표는 도이사의 눈치를 살폈다.

‘반응이 없군.’

도이사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이만한 아이템에 신경을 곤두세우리라 생각했다.

자신들의 파벌이 아닌 곳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닐터.

하지만 그럼에도 도이사의 표정은 무척 평온했다.

‘관심이 없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신경이 다른 쪽에 쏠려있다는 것인가?’

김대표의 짐작대로 도이사는 현재 문이사와의 경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평온한 얼굴 뒤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소일연이라는 분에 대해 들었습니다. 표세인 부장을 방문했었다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오랬동안 회사 밖에 있던 탓에 정보 전달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소일연에게 약속한 개발4실이 표세인 부장의 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밑에 두게 될 사람이니, 한번 얼굴이나 보면 좋을 것 같았는데…….”

“하하하. 밑에 두게 되다니……. 그건 불가능하지요.”

“네?”

도이사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김대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발4실에 관한 부분이야 착오가 있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장이 부장을 아래에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아니, 양실장을 염두에 둔 말인가? 그러고보면 문이사 조차 표세인을 두둔했다고 했었지?’

확실히 표세인의 입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김대표는 표세인의 진면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뭐…….”

도이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누가봐도 난처해보이는 표정.

이미 양실장을 통해 표세인의 정체에 대해 더더욱 은폐하라는 연락을 받은 상황이었다.

“일단 나름은 기둥소프트 대표이기도 하고…….”

“어차피 스튜디오 대표자리야…….”

실장 삼인방이 그렇듯이, 기둥소프트 역시 작은 지분 정도로 위탁경영에 불과한 시스템이라고…….

김대표는 생각했다.

“그건 또 그렇긴한데…….”

이 부분은 정작 도이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 그는 또 한 번 말꼬리를 늘이며 불안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 친구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묘하군. 뭔가 숨기고 싶어하는데? 아! 설마 전무군단도 표세인을 노리고 있나?’

김대표의 사고가 다소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함전무님이 은퇴한 후에 전무군단의 실권을 잡으셨다 들었습니다.”

“실권이라니요. 그저 조율자 정도 위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겸양이 아닌, 반쯤 진심이었다.

함전무가 공언한 그의 후계자는 표세인이고…….

그는 머지 않아, 정말로 전무자리를 손에 넣거나, 그 이상의 지위로 비상할 것이 분명하다.

그저, 왜 아직도 부장 정도에 머무는 것인지가 이해가 안되는 상황.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그보다 의외입니다. 솔직히 연륜과 경력으로는 천이사, 그 친구를 예상했었습니다. 동남아로 갔다지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자충수를 너무 쎄게 두셨지요.”

자충수라는 말에 김대표는 나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천이사가 조회장의 눈밖에 났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다.

물론 도이사는 표세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제 시작하시는 겁니까?”

“예. 숨길 일이 아니니, 속 시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저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간 외부영입 인사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김대표였다.

직급 상은 대표라도 함전무와 이상무와 나란히 하기에는 세력이 형편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소일연과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차세대 핵심 사업을 손에 쥐고 있다.

이제는 해볼만하다.

그리 생각했으니, 어물쩍 눈치를 보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눈치를 살피며 처세를 고민하는 것은 이미 질리도록 해왔던 일!

“하지만 현시점에 대표님과 소일연 실장 단 둘 뿐이라는 것이 문제겠군요.”

정치는 결국 인원수에서 나온다.

과거 양실장과 표세인 콤비의 비약적인 존재감은 그저 이레귤러적인 상황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김대표와 소일연의 등장은 도이사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개발4실이 완성되고 스트리밍 프로젝트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표세인 부장은 저희 측에게도 꼭 필요한 인재인바,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표세인과 양보라는 단어에 도이사는 하마터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릴뻔했다.

표세인을 양보한다니?

그런 것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응원하겠습니다.”

“프로젝트의 성과를? 아니면 표세인의 영입을?”

“두가지 모두입니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지금 제가 거기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군요.”

“문이사입니까?”

김대표의 말에 도이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무보 경쟁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도이사는 순순히 시인했다.

비어있는 자리들을 향한 레이스가 시작된 상황.

표세인 휘하에서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물밑 경쟁은 오래전부터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

“별 탈 없이 임원회의에 들어가면 상당히 유리하신 것 아닙니까?”

임원들의 역향력 만이라면 도이사는 현재 이상무와도 겨룰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표세인 부장이 허락해 줬을 때의 이야기지요.’

까딱 잘못하면 자신들은 통째로 쓸려나갈 수도 있다.

더욱이 양실장과 문이사가 한 파벌에 속한 직계 라인이라면, 전무군단은 좋게 평가해도 결국은 방계 라인이라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실력으로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정체를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표세인의 심중일 터.

뭔가 괴로우면서도 안도감이 든다.

부장급 인사의 눈치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니?

“김대표님.”

“예?”

“힘내시기 바랍니다.”

“예?”

“응원합니다.”

표세인을 영입해서 소일연 밑에 두겠다?

이런 안타까운 광대 놀음에…….

응원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 허락을 받으라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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