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이거 표세인 팀장님이 작업하셨다고요?”
“네. 문제가 많은가요?”
다른 파트라면 몰라도, 스토리 파트는 스스로 퀄리티를 보장할 수가 없어서 난감하다.
“정말 화나네요.”
“네?”
화가날 정도라고? 나름 열심히 작업했는데?
“배경도 플롯도……. 뭐하나 문제가 없네요.”
“다행이네요.”
“스토리 파트가 전문인 사람들은 어쩌라고…….”
권태인의 장난기 가득한 하소연을 뒤로하고 나는 잽싸게 일을 부탁했다.
“이 부분만 좀 가다듬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퀘스트 작업도 저희가 진행하면 되나요?”
“예. 부탁드립니다.”
이미 퀘스트 동선과 시간, 목표량들의 세부기획은 모두 기획서에 담겨있었다.
남은 것은 거기에 맞는 대사 채우기뿐.
“그런데 이정도까지 작업해 놓으셨으면, 본인 손으로 하는 편이 낫지 않으시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 모두 설계를 끝마친 상태라면 이후 수정이 귀찮아서라도 내 손으로 처리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요즘 내 상황이 상황이라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긴 한데……. 요즘 제가 여기저기 불러 다니는 형편이라서요.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권태인에게 스토리 파트의 마무리를 부탁했다.
이것만 완성되면 이제 마무리 작업을 거쳐 프로토타입 완성이다.
*
*
*
그리고 주말.
나는 연락을 받고 회장님 댁을 방문했다.
“왔냐?”
“네. 설마 낚시 가십니까?”
“그래. 너도 저거 챙겨라.”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조회장은 낚시 도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리얼 낚시도 다니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너는 경험 없냐?”
“어릴때는 종종했죠.”
“잘 됐네.”
“?”
“난 처음이야.”
“…….”
갑자기 대차게 불안해지는데?
“갑자기 왜 낚시를 하시려고요?”
“함전무가 생각 정리에는 낚시가 최고라고 하더군.”
“혹시 함전무님도 함께 가십니까?”
“응. 그 녀석이 소집한거야.”
소집?
어쩐지 굉장히 불길한 단어인데?
“소집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불길한데……. 혹시 오늘 멤버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함전무, 이상무, 양실장.”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지 않습니다만?”
“넌 그냥 내 짐꾼이지.”
조회장은 진심으로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말했다.
내가 한 말이긴 한데……. 정말로 그렇다고 하니까 좀 그렇긴 하네.
“그런데 무슨 생각 정리가 필요하신 거에요?”
나는 낚시 도구를 자동차 트렁크에 실으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조회장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짖궂게 미소지었다.
아니, 그보다는 짚이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 중에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느낌에 가깝다.
“만약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고민상담 하셔도 됩니다.”
“네가 요술주머니라 이거냐?”
“그보다는 그냥 들으면서 맞장구는 쳐드릴 수 있다는 거죠. 예비 사위 아닙니까.”
“클클, 그렇지.”
조회장은 킬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운전은 맡겨도 되겠지?”
“예.”
“너는 어쩐지 난폭운전 할 것 같은 이미지라서 불안한데…….”
“전혀요. 저는 몸은 막 굴려도 기계는 섬세하게 다루는 편입니다.”
나름 마우스 클릭조차도 섬세하게 한다니까요?
“퍽이나……. 하지만 운전대 잡고 있으니, 믿는 척해주마.”
“…….”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시동을 걸었다.
나는 네비에 찍혀있는 대로 춘천의 한 민물 낚싯터로 향했다.
“늦으셨습니다?”
“늦긴 이 녀석이 늦었지. 운전은 축구할 때와는 영 다르구만…….”
“헉!”
나는 정말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조회장을 바라보았다.
운전 거칠게 할까봐 걱정이라고 하셔서 최대한 천천히 몬 것 아닙니까? 그리고 네비 도착 예정 시간은 지켰는데요?
“표부장이 운전쪽에 약한 줄은 몰랐네?”
딱히 강하다고는 못하겠는데, 약하단 소리는 들은 적 없거든요?
그런데 이 말이 입밖으로 안나온다.
그래.
임원급 레벨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그냥 짐꾼 노릇이나 해야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일단 짐을 옮겼다.
“너도 이 조끼 입고.”
“저도 낚시 함께 하는 겁니까?”
“그럼 여기까지 와서 뭐하게?”
“그……. 왜 있잖습니까?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 총수 뒤에서 뒷짐지고…….”
“푸하하하! 우리 IT기업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냐?”
함전무가 웃겨 죽겠다는 듯이 배를 잡고 몸을 비틀었다.
“얘도 가만보면……. 좀 특이해.”
“아니, 애초에 짐꾼이라고…….”
“그래. 짐 날랐잖아. 알겠으니, 가서 조끼입고 낚싯대나 들어.”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이것저것 다 억울하다.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낚시 조끼를 입고 낚싯대를 챙겼다.
“자, 내 옆에 앉아라. 거기 미끼통도 챙기고.”
“네.”
“풋.”
내가 조회장 옆에 안자, 함전무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또 뭔데?
내가 얼빵한 표정으로 함전무를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타겟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님. 아직도 갯지렁이 못 만지십니까?”
“못 만지는 것이 아니라, 안 만지는 거다.”
설마…….
회장님…….
아니죠? 저 그거 시키려고 데려오신 것 아니죠?
“너는 문제 없지?”
아……. 이거였구나.
“문제없습니다. 낚싯바늘 주세요.”
“오냐.”
나는 낚싯 바늘에 미끼를 끼워서 조회장에게 내밀었다.
“……주지 말고 던져.”
“…….”
그정도로 무서우십니까?
나는 굳이 이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고 낚싯바늘을 던졌다.
그렇게 우리 세사람은 말 없이 낚싯대를 드리운채, 침묵을 즐겼다.
“표부장.”
침묵을 깬 것은 조회장이었다.
“예.”
“김대표와 소실장이 아직 천지분간을 못하고 있다.”
“두 분 모두 아직 회사 사정을 파악하시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셨죠.”
“소실장은 네가 잘 챙겨줘라.”
조회장은 소일연이 이끌 스트리밍 프로젝트가 맥베스의 차기 핵심 사업 분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
하지만 굳이 그것을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 다소 불편했다.
“회장님.”
“응?”
“그렇게 빨리는 은퇴 못하십니다.”
“푸하하하!”
대화를 듣고 있던 함전무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클클클, 내 은퇴를 네 허락 받고 해라 이거냐?”
“예.”
“많이 컸구만, 표세인이……. 클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되는 무례한 어투일 수 있지만, 조회장은 그저 클클 웃으며 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 입지가 높아졌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회장님.”
“응?”
“제가 처음 회장님을 뵈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나?”
연아와 함께 살짝 긴장한 상태로 넓은 저택 안에 발을 들였을 때.
게임 패드를 쥐고 있던 조회장의 첫 모습이 떠오른다.
무척 인상적인 만남이었지.
“그때, 회장님께서 제게 게임을 제안하셨었지요.”
“그래. 그랬지. 예상보다 훨씬 잘해서, 내가 밸런스 조절을 실수했다고 몇 번이나 한탄했었지.”
조회장은 즐겁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나오나?”
“회장님.”
“응?”
“게임 아직 안 끝났습니다.”
“뭐?”
조회장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돌렸다.
“TRPG 좋아하신다면서요?”
“아! 맞아! 대체 그거 언제까지 준비중이신 겁니까?”
“하, 하고 있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자네! 내 주사위는 언제 주는 거야?”
아…….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사람들이 아주 시간을 무작정 끄는데!”
함전무의 샤우팅에 나와 조회장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연설이 기시네요.’
‘냅둬라, 시간 남아도니, 심심해서 저러는 거야. 백수랑 만나면 이래서 피곤해.’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간 쌓인 것이 많았던 함전무의 일장연설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게임이 안끝났다는 말은 무슨 소리냐?”
함전무가 제풀에 지쳐 자리에 앉자, 조회장은 냉큼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그동안 마스터하셨으니, 이번에는 플레이어도 한 번 해보셔야죠.”
“나에게 퀘스트라도 주겠다 이거냐?”
“보상도 섭섭지 않게 챙겨드릴게요.”
“크흐흐흐……. 이거 정말로 웃긴 놈이었구만?”
또 한번 조회장은 킬킬대며 웃었다. 그리고 그 주름진 표정 속에 불쾌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소실장은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닥쳐올 큰 프로젝트들을 위해 기반이 될 시스템이니까요.”
“기반?”
조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조회장님은 연아의 본래 목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어쩌면 앰플쪽의 제의가 에머리를 통해 들어온 것이기에, 연아가 공유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세한 것은 부회장에게 들으시면 될거고, 제 개인적인 건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네 개인적인 것?”
“저도 나름 기둥소프트 대표 아닙니까? 나름의 계획 쯤은 있지요.”
“맥베스 회장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계획이시다?”
“제가 다음에 드리는 퀘스트 클리어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게임 아직 안 끝났습니다?
시작은 회장님이 하셨으니, 끝은 제가 내야지요.
“그리고 소실장은 걱정 마십시오.”
“걱정 안해도 되나?”
“예. 튜터를 붙여놨습니다.”
“제발 그게 홍기도 과장이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홍켓몬 부탁한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양성태입니다.”
“소일연입니다.”
소일연은 김대표에게 지시를 받고 양성태를 방문했다.
일단 맥베스에서 세력을 일구기로 한 이상 양성태를 경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만치 않은 인물로, 조회장의 최측근이자, 임원들 조차 눈치를 살피는 인물.’
애초에 같은 실장이라 하더라도, 비서실장의 위세는 남다른 법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상냥하고 정중하다.
그러면서도 비굴함은 없고 은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태도.
이상적인 샐러리맨의 표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양실장님에 대해서는 일전에 설대표님께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양성태와 소일연 모두 설동은이 탐내던 인재가 아니었던가?
그런 두사람이 묘한 인연으로 맥베스에서 만났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분명 의문문인데도, 마치 답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첫만남에서 기싸움에서 질 수는 없지.’
소일연은 언변으로는 자신이 양성태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정면승부.
속임수나 우회 없이 정면으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 것.
“근래 맥베스 내부에서 양실장님의 파벌이 가장 돋보인다고 들었습니다.”
“흠……. ‘제 파벌’ 말씀이시군요.”
양성태는 커피를 홀짝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아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문이사님과도 손을 잡으셨다지요? 양실장님 파벌이든, 문이사님 파벌이든, 그런 것은 제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신경쓰지 마시고 편하신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제가 누구보다 표세인 부장이 꼭 필요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를 제쪽으로 끌어들여도 괜찮겠습니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맥베스 내부에 팽배한 묘한 분위기. 그리고 그 중심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표세인이라는 이름 석자.
“만약 표세인 부장이 스스로 소실장님 곁으로 가신다면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확실합니까?”
“하지만 그 전에…….”
“…….”
“홍기도 과장이 먼저 아닙니까?”
“으으음…….”
홍기도의 이름 앞에, 소일연은 그저 신음할 뿐이었다.
언니가 도와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