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어? 태권도 선수다!”
“발차기 달인이다!”
“TV 나온 사람이다.”
모처럼 집에 와서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가던 길이었다.
동네 꼬맹이들이 나를 보면서 아는 체를 했다.
하지만…….
게임 개발자라는 느낌은 없는 거냐?
다급한 마음에 익스트림 팀이나, 선보일법한 묘기를 보인 것이 실수였을까?
어째 나를 시범단 선수 정도로 인식하는 느낌이다.
“가봐, 가봐. 사인해주세요. 해봐.”
“아니야.”
한 어머니가 아이의 등을 떠밀려고 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어머니.
그냥 두세요.
사인 같은 것 없고, 저도 부끄러워요.
“그래도 TV나왔다고 사람들이 알아보네?”
“그러게요.”
“그래도 볼만은 하더라. 발차기할 때 주변 사람들 호들갑도 열심이고.”
내 게임 홍보영상……. 기억에는 남아있을까?
나름 해외 서브 레딧까지 소개되고 그랬는데…….
“저기…….”
“?”
엄마와 시장에 들어서자, 누군가 내 등뒤로 다가왔다.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나요?”
“어? 저랑요?”
“TV나오신분 맞죠?”
“맞긴 한데…….”
낯선 여성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내가 찍어줄게요.”
엄마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감사합니다.”
다소 어색한 미소로 사진을 찍은 뒤에, 여성들은 고개 숙여 인사했고, 나 역시 마주 고개를 숙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TV까지 출연했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 보는 것 보다야 낫지.”
“그렇긴 한데……”
“너 헛물 들어서 한눈팔면 호적에서 파버린다?”
“한눈을 팔아?”
“연아.”
“엄마…….”
내가 연아를 두고 어딜 한눈을 팝니까. 눈을 뽑아도 그럴 일은 없어요.
나는 피식 웃으면서 어머니의 장보기를 끝마쳤다.
“왔냐?”
마침 일을 끝내고 온 아버지께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여보, 그거 알아요? 아까 여자애들이 세인이하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고는 사진찍고 같다니까?”
“사인이 아니고?”
“에이, 요즘 촌스럽게 누가 사인을 하나요. 사진이지.”
아무래도 엄마는 아까의 일이 좀 즐거우셨던 듯 하다.
“사인은 준비해뒀냐?”
“제가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사인입니까?”
“왜? 요즘 일반인이 스타되는 시대 아니냐?”
“그래. 혹시 아니? 너도 박주부님처럼 인기 스타가 될지?”
“그럼 돈도 많이 벌고 좋잖아?”
저기……. 기둥소프트 가치가 박주부님 회사 10배에 가깝습니다.
저 돈 많아요.
하지만 나는 굳이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전부터 느낀 것인데, 나는 아무래도 돈 자랑하는 것이 무척 부끄러운 것 같다.
“아무튼 얼굴도 알려졌으니, 행실 바로 하고.”
엄마는 아무래도 무언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알겠어.”
“근데 재미하나 없는 너를 방송에 출연시키다니, 니네 회사는 무슨 생각이라냐?”
저희 회사 경영자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연아는 싫은 기색 없고?”
아무래도 며느리로 여기기 때문일까? 부모님은 연아의 입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연아가 저를 방송에 내보낸 장본인입니다만?
“연아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 연아가 원했던 것이니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자, 만두 빚자.”
오늘은 간만에 만두를 만든다고 해서 나도 일손을 보태로 온 참이었다.
잔뜩만들어놓고 냉동해 두었다가, 심심할 때 꺼내 먹는 나의 소중한 간식이다.
“앗, 부장……. 아니, 형님 오셨습니까.”
“오냐.”
세종이 놈이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좋아진 점이라면, 나름 형제의 위계가 바로 섰다는 점?
물론 이게 형제의 위계인지, 회사의 위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발차기 보니까, 밸런스가 많이 깨졌던데? 많이 죽었어.”
방금 한 말 취소해야겠다.
“곧 체육대회 있는 것 알지? 준비는 됐어?”
“준비? 뭔 준비?”
“나한테 깨질 준비?”
“만두나 깨지 마라, 넌 왜 이렇게 손재주가 없냐?”
“똑바로 안 하냐! 내 손자 얼굴 빻을 셈이냐!”
아버지가 결국 세종이에게 한마디를 했다.
“엄마랑 아빠가 만두 잘 빚으시는데……. 세종이 낳으신 것을 보면 딱히…….”
“뭔 소리임!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 비쥬얼 담당이 나라고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 모름?”
“사채업자에게 끌려가는 가족들이라고 수군대는 것 아니냐?”
“아빠!”
“내가 그때 몸이 좀 안 좋았어…….”
“엄마!”
사랑하는 동생놈아. 아무리 사랑해도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잖니.
넌 얼굴은 아니야.
뭐, 다른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근데 형네 팀 곧 프로토타입 나온다면서?”
“응. 왜?”
“아니, 그냥…….”
“너희는 아직인가 보구나.”
“여, 열심히 하고 있거든!”
“신경 쓸 것 없어. 우리는 그래픽 리소스 돌려막기가 가능해서 좀 빠른 것뿐이고, 원래 크래프팅 쪽이 손이 많이 가.”
기획 일이 많아지면, 자연히 다른 파트 작업시간은 배로 불어나는 법이다.
홍기도와 조회장의 아이디어를 고스란히 뭉뚱그려 담아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 과정에서 남궁원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출시 이후 기대치는 높아질 것이다.
“조바심내거나, 남들 신경 쓰지 말고 느긋하게 해.”
“본인은 미친 듯이 속도 내면서?”
“미친 듯이?”
“윤과장님과 김차장님 난리도 아니잖아.”
“그 사람들은 너랑 입장이 다르잖냐.”
본인들의 고가를 위해 혼을 불태우는 이들과 천지분간도 못하는 신입은 입장이 다르지.
“이번에 우리 게임……. 만만치 않아.”
“그러냐?”
그래. 그래주면 좋겠다.
너무 쉬우면 게임이 재미없으니까.
*
*
*
“지난번 방송에 대한 평가는 아주 긍정적입니다.”
김피디는 살짝 들뜬 목소리였다.
좋은 프로를 만드는 일만큼이나, 블루칩이라고 할만한 방송인을 발굴하고 키우는 것은 피디의 중요한 평가점 중에 하나였다.
만약 표세인이라는 아이템이 박주부의 절반만 성공해도 훗날 국장 승진 심사에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었다.
더군다나 국장 본인부터가 표세인이라는 캐릭터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지난번 특집 편성부터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니, 본격적으로 여러 예능에 게스트로 출연시키고 싶은 눈치였다.
“예능이라…….”
하지만 정작 맥베스의 담당자라며 나타난 김인숙 실장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지난번 부회장님께서는 상당히 긍정적이시지 않았습니까?”
“네. 그랬었죠.”
김인숙은 간단한 과거형으로 상황이 바뀌었음을 넌지시 전달했다.
“혹시 무언가 다른 요구사항이 있으십니까? 그런 것이 있다면, 저희는 적극적으로 검토할 의사가 있습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요구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김인숙은 넌지시 자신이 전달받은 사항을 꺼내 들었다.
“……아, 이건…….”
“당황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건을 받아 들여주신다면, 저희 쪽도 반대로 그쪽에 도움이 되는 제안을 드릴까합니다.”
“저희 쪽에 도움이 되는 제안이요?”
“광고와 투자. 이 두 가지를 모두 제안할 생각입니다.”
방송국의 가장 큰 매출 중에 하나는 광고이며, 피디의 업무 중에는 제작투자 유치 등이 있다. 더욱이 근래 들어 외부 투자들이 상당 부분 외주제작 스튜디오 쪽으로 눈을 돌리는 가운데, 투자금을 확보하는 것은 김피디에게 더없이 달가운 제안이었다.
“그거라면……. 저희 쪽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을 수가 없군요.”
“네. 다행이군요.”
김피디와 김인숙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가만보면 부회장님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조연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투자에 거침이 없고 공격적이다. 지금만 해도 상대에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않던가?
게다가 그 제안에 맥베스가 손해 볼 일은 없다.
광고는 말 그대로 광고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투자란 리스크를 동반하지만, 성공하면 말 그대로 투자수익을 얻게 된다.
‘다만 의문인 것은 대체 왜 이런 조건을 제안하는 걸까?’
김인숙은 자신이 제안한 안건을 떠올리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제안은 자신이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연아의 지시사항을 따른것에 불과했다.
‘홍기도 과장도 함께 출연하게 해주세요.’
표세인과 홍기도가 가깝다는 것은 알겠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맡은 일만 잘 해내면 된다.
상사의 의중을 읽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부여받은 업무를 깔끔하게 완수하는 것.
-요구사항은 전달했고 김피디쪽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저 결과를 보고할 뿐, 추측은 그 후에 하면 그만이다.
*
*
*
“만족합니까?”
조연아는 모니터 너머에 있는 쉬린칭을 향해 말했다.
“네. 만족합니다.”
“하지만 저도 다소 의문이네요. 굳이 홍기도 과장을 방송에 출연시키려는 의도가 뭐죠?”
표세인을 방송에 출연시키는 것은 차후 스타개발자로서 맥베스의 얼굴이 되어주길 바라는 의미에서였다.
연인으로서의 내심은 표세인 같은 훈훈한 외모의 남성이 방송국을 들락거리며 여성 연예인들과 연을 맺는 것이 탐탁지 않다.
자신도 그럴 정도인데, 쉬린칭은 어떨까?
저쪽은 아예 연인관계도 아니다.
여성에 호감을 숨기지도 않는 홍기도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것은 표세인과는 비교도 안되는 리스크가 아닌가?
“네. 다소 의문스러우실 거라는 것은 이해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반대였지만, 무빙의 말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쉬린칭의 말에 연아는 그녀의 뒤에 다소곳이 서 있는 쉬무빙을 바라보았다. 맥베스에서 지낼 때와는 180도 다른 분위기.
조용하고 행동거지 하나에도 조심스러움이 배어 나오는 모습.
표세인과 홍기도가 보았다면 깜짝 놀랄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오히려 첫 만남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그녀의 평소 모습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홍기도는 일반적인 잣대로는 판단도 불가하고, 구속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지요.”
쉬린칭의 말에 연아는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가까스로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사랑스러울까?
대학 시절의 짧은 연애에 불과하건만, 그녀는 단 한 번의 연애경험만으로 자신의 인생 동반자를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렬한 애정을 보내고 있다.
요즘 세상에는 정말로 흔치 않은 지고지순한 순애보가 아닌가?
물론 어딘가 조금 엇나가 있다는 느낌이지만.
‘나보다 언니인데…….’
나이는 쉬린칭이 한 살 많은데도 연아는 언제나 쉬린칭을 연하처럼 느끼고 있다. 물론 비즈니스적인 입지와 커리어에서 쉬린칭에게 부족한 점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연애에 관한 대화를 종종 나누는 탓에 스스로가 가진 여유 덕분이라고나 할까?
표세인과 자신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신뢰 덕분에 언제나 다소 높은 위치에서 보게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표세인 부장님과 함께 있을 때는 의외로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디 게임 프로젝트 말씀이시죠?”
그거라면 연아도 잘 알고 있다. 홍기도가 직접 쉬린칭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하늘이라도 찌를 듯한 기세로 치고 나가는 표세인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홍기도의 본심을 이 두 사람은 모른다.
그저 표세인을 쫓을 때의 홍기도는 다소 공략의 기회가 엿보인다는 것이 핵심.
“다행히 지금은 표세인 부장님이 고작 부장급에 머물고 있지만, 얼마나 더 오래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오래는 아니겠죠.”
이미 독을 가득 채우고도 넘칠 지경이다. 표세인이라는 남자를 부장급에 묶어두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당장은 여러 문제를 먼저 처리하기 위해 뜻대로 내버려 두고는 있지만,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서라도 그는 더 높은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가끔 회사를 관두고 집에서 집안일을 하겠다는 농담을 하고는 하는데…….”
“풋, 표세인 부장님이 집안일을 한다고요?”
“네. 뭐 사실 저보다 훨씬 나은 편이기도 하고요.”
“예전에 배운 것인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그거 이럴 때 쓰는 표현이죠?”
“네. 정확하세요.”
할계우도는 논어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속담을 풀어서 쓰는 한국식 방식은 중국인들에게는 낯선 개념일 터.
수년간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옛 남자친구와의 재회를 기다리며 틈틈이 한국어 공부를 멈추지 않은 쉬린칭이었다.
정말로 쉬린칭은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연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번 투자건은 합자회사를 통해 진행하기로 해주세요. 그리고 제 무리한 부탁을 드러주신 것은 나중에 제 개인적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애초에 쉬린칭이 바란다면 방송 제작사를 사들이는 것이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네?”
“그렇게나 홍기도씨가 좋으세요?”
“......네.”
쉬린칭은 발그레한 얼굴로 슬쩍 눈을 돌렸다.
“오케이! 언니가 도와줄게!”
쉬린칭의 사랑스러운 반응에 연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언니? 제가 한 살 많지 않나요?”
“이, 이런 건 도와주는 사람이 언니에요. 그냥 관용어랄까?”
연아는 머쓱함에 되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쨌든 홍기도가 표세인 부장을 쫓아서 올라갈수록 그는 저와 가까워지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서 다소 과감한 투자를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중국 게임 업계의 거물인 쉬린칭이 과감한 투자를 결심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냥 승진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네.’
이건 연아조차 당황할만한 중대사안이었다.
너 중국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