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이상무님. 어쩐 일이십니까?”
김대표와 소일연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이상무를 맞이했다.
김대표에게 있어, 현재 이상무야 말로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다.
은퇴한 함전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결국 그를 제외하면 한때 가장 강력한 파벌의 수장이지 않던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고 은둔하는 상황.
암암리에 은퇴에 관한 이야기까지 오가는 상황이지만, 과연 사실일까?
새롭게 맥베스 내부 패권에 도전할 야심을 품은 김대표였기에 이상무의 속내가 몹시 궁금했다.
“너무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저 곧 은퇴할 계획입니다.”
“!”
시작부터 은퇴를 들먹인다?
순간 머리를 망치로 두들긴 것 같은 충격에 김대표는 아찔한 심정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보십시오. 속이 편해져서 이렇게 뒤룩뒤룩 살이 찌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조금 많이 찌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요즘 입맛이 너무 돌아서요.”
이상무는 털털하게 웃으며 제 배를 두드렸다.
“그런데 굳이 그 말씀을 하러 여기까지 방문하신 것은 아닐테고…….”
“하하하. 그렇지요. 마침 겸사겸사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경청하겠습니다.”
김대표는 물론이고 소일연까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자신들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움직인 상황에서 이상무씩이나 되는 인물이 별것 아닐 리가 없다.
“소일연 실장.”
“예.”
“자네의 비전이 우리 맥베스의 차세대 프로젝트라고 들었네. 부디 애써주시기 바라네.”
“예.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미안하지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김대표님과 나의 개인적인 대화이니,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나?”
“예.”
소일연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
“그 길로 임원회의실로 가보게. 그곳에서 표세인 부장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표세인의 이름이 언급되자, 소일연의 눈가에 기대와 긴장의 기색이 순차적으로 스쳐갔다.
“알겠습니다.”
소일연이 떠나고 자리에 남은 김대표와 이상무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전무님도 퇴사하시고 저도 퇴사합니다. 이제 곧 회장님도 은퇴하실 계획이시고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연아 부회장의 시대입니다. 연로한 장수들도 젊은 장수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하는 시점이 왔다 싶더군요.”
“으음…….”
김대표는 낮게 신음했다. 이제야 이상무가 자신을 방문한 이유를 깨달았다.
함께 물러나자.
우리의 시대는 저물었다.
김대표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회장님의 뜻입니까?”
“예.”
“부회장님도 동의하시고요?”
“예.”
“소일연, 그 친구는 그저 제 장단에 보조를 맞추었을 뿐, 심성이 악한 친구는 아닙니다.”
“그럼요. 그럼요. 다 알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함전무와 이상무에게 밀려, 대표라는 직함을 쥐고도 언제 자리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했더랬다.
그런데 입사후 최고의 실적을 낸 이 시점에, 그리고 앞으로 더욱 큰 실적을 낼 수 있는 이 시점에…….
‘내가 너무 늦었군.’
연륜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젊음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받아들이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김대표 정도되는 연륜이다. 상황이 이지경까지 흘러왔음에야, 자신의 처지를 오판하지는 않는다.
“조금만 빨랐다면 기회가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저도 함전무님이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입니다.”
“두분까지도요?”
거진 회사를 양분하고 있던 사람들 조차 무리다? 대체 이건 무슨 말인가?
“조연하 부회장의 입지가 그정도입니까?”
“부족한 나이를 걱정했던 것에 비해 무척 잘해주고 계십니다만, 아직 그정도 영향력을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다른 요인입니다.”
“대체 무슨?”
차기 회장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사람이 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표세인 부장.”
“네?”
“표세인 부장은 현재……. 음, 마땅한 단어를 찾기 어렵군요. 막후의 실력자라고나 할까요?”
“표세인 부장이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다못해 양실장이나, 문이사라 해도 그게 가능한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판인데…….
난데없이 부장급 인사라니?
게다가 표세인이라면 얼마 전까지 일개 과장으로 체육대회의 활약으로 자신의 귀에 들어온 이름이었다.
“놀라실만한 이야기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장 없는 사실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됩니다. 양실장은? 문이사는? 하다 못해 전무군단의 구심점인 도이사는요?”
김대표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표세인의 주가가 물이 올랐다고는 해도, 앞서 말한 이들의 이름값에 댈 바는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상무는 그저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 모두 표세인 부장의 사람입니다.”
“허! ……허허허.”
김대표는 넋이나간 사람처럼 실소를 흘렸다.
“……저는 광대였군요.”
김대표의 자조섞인 한마디에 이상무는 그저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한편, 이상무의 말에 따라 임원회의실로 향하는 소일연은 무척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뭔가 찜찜하군.’
굳이 자신을 빼고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가 뭔가 불안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와중에 표세인 부장이, 다른 장소도 아닌 임원회의실로 자신을 호출했다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그리고 임원회의실에 발을 들인 순간, 자신의 불안한 직감이 옳았음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이 인원 구성은 뭐지?’
양실장과 문이사 거기에 도이사를 비롯해, 독립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재무팀을 손에 쥔 고이사까지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그 밖에도 몇몇 이사들과 실장급들도 즐비해있었지만…….
‘중앙 상석에 표세인이 앉아 있다?’
쟁쟁한 임원들을 제치고 무척 자연스럽게 제 자리라는 듯이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표세인을 보며 소일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셨군요. 앉으시죠.”
양실장이 먼저 소일연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일연이 앉은 자리 맞은편에는 실장 삼인방이 있었고 그들은 소일연을 모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견제인가?’
듣기로 저들은 임원 승진을 위한 경쟁노선을 걷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곧 약속 받은대로 이사로 올라갈 것이니, 그들과 같은 눈높이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표세인이 상석에 앉아 있는 것 만큼은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럼 모두 오셨으니, 시작하겠습니다.”
표세인의 말에 제임스가 조금 전 조회장 앞에서 시연했던 프레젠테이션을 띄웠다.
“아니, 일단 그전에 한가지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표세인의 말에 모두가 소일연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설마 표세인이 조회장의 숨겨둔 아들이라도 된다는 건가?’
과거 누구나 한번쯤 범했던 착각을 소일연 역시 그대로 답습했다.
“소일연 실장님.”
“예.”
“사실 김대표님께서 오랜 출장업무를 보시는 중에 맥베스 내부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변화가 있던 것은 알고 있다. 함전무의 은퇴와 조연아의 부회장 취임 같은 커다란 변화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격변의 상황이기에 김대표와 자신이 패권을 노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기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 계신분들은 모두 한 파벌에 속해계신 상황입니다.”
“흠흠.”
표세인의 말에 유독 도이사가 기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일연은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표세인의 말은 진실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것을 고작 부장급 인사가 소개하는 것이 맞나?
“그리고 이 파벌의 수장은…….”
“조연아 부회장님이십니까?”
소일연이 다소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크큭.”
“크크크큭.”
저마다 소리죽여 웃거나, 옆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미소를 짓는다.
“아닙니다. 물론 크게 보면 맥베스의 직원 전체가 부회장님의 사람이지요.”
“그, 그렇다면?”
자신이 조롱 받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이정도 인사들이 한자리에 있는 파벌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과 김대표의 야망은 끝났다.
그렇다면 앞으로라도 좋은 관계를 개선해 나가야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파벌의 수장이 누구인지는 너무도 중요했다.
“소일연 실장님.”
“…….”
“궁금해 하시는 사람은 바로 접니다.”
“마, 말도 안돼.”
소일연은 입을 떡 벌린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지만, 모두는 무언의 긍정을 뜻하는 침묵을 고수할 뿐.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직급상으로도……. 혹시 회장님과 혈연관계라도 있으십니까?”
소일연의 질문에 몇몇이 제임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혈연관계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래. 표세인이 어떻게 수장이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것.
“제가 다소 결례를 범했다면…….”
소일연은 발빠르게 사과하려했으나, 내심은 억울했다.
애초에 자신은 실장으로 부장급 인사를 자연스럽게 대우했을 뿐이지 않나?
“사과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소일연 실장님께서는 제게 아무런 무례도 범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손바닥 안쪽이 축축해지는 기분.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
“소일연 실장님도 저희와 함께 하시지요.”
“네?”
“제가 소일연 실장님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홍기도 과장. 포섭에 실패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크크큭.”
홍기도라는 이름에 벙찐 표정을 짓는 소일연을 보고 다시금 몇몇 인물들이 웃었다. 홍기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인물들이라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대답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향후 맥베스 내부에 저희 외에 다른 파벌이 생기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이미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한 이상 쓸데없는 신경전은 사양이다.
자신이 꿈꾸는 AAA급 게임과 차세대 게임 시장 장악을 위해서는 그저 박차를 가할 것이다.
돌부리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럼 시작하시죠.”
표세인의 말에 진짜 조회장의 혈육인 제임스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우선 가장 큰 안건인 대표, 전무, 상무직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과 부회장이 없는 자리에서 최정상급 임원 승진에 관한 논의를 한다?
그것도 일개 부장급 인사가 주도하는 자리에서?
그러나 소일연의 당혹스러움과는 별개로 모두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표 자리는 정해진 셈이니, 논의할 것 없고…….”
문이사가 슬쩍 양실장과 도이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전무자리는 어쩌면 좋을까?”
입에는 분명 미소가 걸려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가 않다.
문이사의 시선 끝에 있는 도이사는 다소 격양된 표정이고, 양실장은 여전히 평온했다.
삼인삼색.
묘한 신경전의 한 가운데, 지켜보던 표세인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세 분께서는 상무직을 두고 겨루셔야겠습니다. 전무 자리는 이미 임자가 있는 상황이라서요.”
“누, 누구를?”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문이사와 도이사가 다급히 되물었다.
“그건 바로…….”
표세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황금 고블린…….
아니, 고이사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마음 아시죠?’
‘고블! 고블!’
표세인은 환청을 들었다.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