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도착했습니다.”
“오, 그래도 예상보다는 정상적이네?”
“뭐가요?”
“나는 아침부터 소란스럽기에, 무슨 섬이라도 잡았을까봐 무서웠다.”
홍기도에게 이끌려 온 곳은 호텔 연회장이었다.
물론 아이 생일을 이런 곳에서 하는 것도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상식 선이라는 느낌.
“저희집이 그 정도는 아니죠. 그냥 평범한 집이에요.”
아니, 애초에 아이 생일 파티를 호텔에서 하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는 않지.
“홍기도 과장님!”
“먼저 와있었구나?”
“왜이렇게 늦었어?”
먼저 도착해있던 함송희와 남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장님……. 오늘도 촬영 있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이 녀석이 갑자기 성화라서.”
“오늘은 부장님이 주역이니까.”
“네. 조카 생일인데, 왜 내가 주역이냐.”
“그런게 있어요.”
“그러지 말고 슬슬 뭔지 말해주지?”
“앗! 엄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 세사람은 홍기도의 부모님께 고개숙여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같이 인물이 훤하다고 말해야 할까?
홍기도 녀석을 보고 나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예상대로였다.
특히 아버님은 홍기도와 판박이었다. 그런데 홍기도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가 없는 중후한 분위기였다.
“표세인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은인께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해서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습니다.”
은인?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일단 들어오시죠.”
나는 안내를 받아 들어서기 전에 홍기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건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내가 왜 은인이야?”
“예전에 교통사고 당한 임산부 기억하세요?”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제법 큰 일이었기에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부장님이 구해주신 임산부가 우리 누나고 뱃속의 아이가. 홍시에요.”
“아……. 다행이다. 그때 병원에서 별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었는데…….”
“네. 정말 다행이었죠.”
그래. 그래서 나를 굳이 홍시 생일에 부른 거였구나.
“그런데 그걸 왜 이제 말하냐?”
“부장님 스스로가 굳이 밝히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제 홍시도 잘 자랐으니까. 그 모습을 한 번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있네. 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노라니, 홍기도가 갑자기 넙죽 허리를 숙였다.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닭살스럽다. 갑자기 우리끼리 이런거 하지 말자.”
나는 홍기도의 팔을 툭치며 웃었다.
“네가 부장님을 따르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역시 표세인 부장님……. 완전 영화속 캐릭터.”
지켜보던 남궁원과 함송희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예전일은 정말 감사드려요.”
홍기도의 누나로 보이는 여성분이 나에게 인사했다.
솔직히 얼굴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강 눈치로 이 분이 그때의 임산부였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다리 뒤에 달라붙어 얼굴을 절반만 내밀고 있는 수줍어 하는 아이가 바로 홍시겠지.
“네가 홍시니.”
“네.”
“반가워. 나는 네 삼촌이랑 같이 일하는 아저씨야.”
“홍시야. 인사해야지.”
“앙녕하세요.”
살작 혀짧은 소리로 꾸벅 인사하고는 냉큼 엄마뒤에 숨는 아이.
그런데 복장이 특이하게 태권도 복을 입고 있다.
“아이가 너무 귀엽네요.”
“네. 우리 홍시 귀엽죠.”
아니, 이런건 너의 누나가 대답해야지.
“삼쫀은 나 못생겼다고 했자나!”
“아닌데? 우리 홍시 엄청 이쁜데?”
“아니야! 못생겨따고 했어!”
홍시는 홍기도의 다리를 향해 앙증맞은 발차기를 날렸다.
“생일인데 태권도 복을 입고 있네요?”
보통 이런날은 화사한 아동용 드레스라도 입히지 않나?
“생일날 입을 옷을 준비했는데, 본인이 극구 이 옷을 입겠다고 성화라서요. 얘가 누구를 닮았는지. 태권도를 좋아해요.”
“태권도 좋죠.”
이래봬도 선출이라 태권도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조금 더 흐뭇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저씨.”
“응?”
“발차기 보여주세요.”
“발차기?”
갑자기?
“테레비 나온 아저씨자나요.”
“어?”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홍시가 연회장 벽면에 붙어있는 대형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침 내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미튜브 편집본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니, 연회장에서 보통 이런 프로를 트나?
“아참, 홍시가 부장님 좋아해요. 이것도 틀어달라고 졸라서 튼 거예요.”
그, 그래?
그러고보니 마트에서도 동네 꼬맹이들이 나보고 발차기 아저씨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의외로 그게 아이들에게 어필이 되었던 건가?
“우리 광장님도 아저씨 안대요.”
“니네 관장님이 나를 알아?”
물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운동을 했다면 알 수도 있겠지만…….
“윤상호 관장님 아세요?”
“허! 세상 좁네요. 네 제 친구놈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진짜 내 친구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세상 좁네요.”
홍기도는 홍시의 두 팔을 흔들며 말했다.
이 녀석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과거 이 녀석이 술집에서 웬 녀석에게 얻어맞을 때, 나와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보던 친구들 중에 하나가 윤상호였다.
생각해보니, 그 녀석 유아반 운영도 한다고 했었지…….
뒤늦게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느낌이다.
“관장님이 재미있게 잘 가르쳐주시니?”
“네! 우리 광장님 재미있어요.”
“그래. 그 녀석이 좀 웃기지.”
본인도 애가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고 아이들을 원체 좋아하는 녀석이라서 잘 가르칠 것 같다.
뭐 내 주변서 태권도장 운영하는 이들 중에서는 나름 성공한 편이기도 하고 말이지.
“아빠!”
마침 홍시의 아버지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옹기주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빠 왜 그래.”
내 앞에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옹기주의 눈가는 축축했다.
아마도 과거의 일이 떠오른 것이리라…….
당시 아내가 양수가 터진 상태로 교통사고까지 맞이한 탓에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병원 응급실로 호송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 나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공치사를 듣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렇게 냉큼 달아나듯 자리를 벗어났으니, 남아있던 사람들 심정도 편치는 않았으리라.
“저도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의사가 말하길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장님 덕분에 우리 아내도 홍시도 모두 건강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감사가 배어나온다. 절로 겸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의외로 세상에는 감사의 한마디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홍기도 녀석도 천성이 밝고 올곧은 면이 있다. 어쩌면 이런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겠지.
“정말로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급기야 부모님을 포함해 홍기도 가족 일동이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세상에, 한참 어린 나에게까지 이런 태도라니…….
이정도면 생각을 다시 해야겠다.
역시 홍기도 이녀석은 별종이다.
“감싸합니다.”
상황을 이해도 못하면서 홍시까지 통통한 배를 누르며 배꼽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제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군요.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때, 좀 더 자세한 정황을 설명드렸어야 했는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훌쩍 사라져 버린 것. 정말로 죄송합니다.”
때로는 감사를 전달할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한 예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아직 한참 멀었다.
만약 양실장이나 조회장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배워가는 것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식사하시죠. 오늘 제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준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홍기도의 아버지가 나에게 따라오라며 음식들이 놓인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정작 홍기도는 인상을 팍 구겼다.
“으윽…….”
“갑자기 왜그러냐?”
“미리 사과드립니다.”
“?”
잠시 후 나는 홍기도의 말을 이해했다.
“모두가 강원도에 무공해 농장에서 특별한 농법으로 재배한 신선한 야채들입니다.”
지금 내가 뭘 잘 못 들은 건가?
아니, 대체 어떻게 한민족의 잔치상에…….
육류는 고사하고 생선도 보기 힘들 수가 있지? 오직 신선한 야채들로만 이렇게까지 진수성찬을 차릴 수가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뭐 단백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이게 우리집의 문제에요. 아버지가 원래도 채식파신데, 예전에 대장에 종기가 발견된 이후로는 엄마까지 합세해서 주방을 아예 초식동물 농장처럼 운영하고 계시죠.”
“이 연회장에도 원래 기본 메뉴가 있었을 것 아냐?”
“그런걸 또 그냥 못넘어가고 굳이 웃돈을 주고 메뉴까지 변경하는 것이 우리집 스타일이죠.”
이거……. 정말로 만만치 않군.
푸릇푸릇한 샐러드 그릇을 내밀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버님 앞에서 고기 없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인간이란 원래 잡식성이고, 채식주의자들도 굶어죽지는 않지 않는가!
“이 두부로 말할 것 같으면…….”
편중된 식단을 추구하면서 나름의 미식감각까지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그러네. 야채들이 어쩜 이렇게 달지?”
의외로 남궁원과 함송희는 이 식단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스마트폰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윤상호 녀석이었다.
“상호냐?”
-너 지금 홍시네 생일파티 갔다면서?
“어. 세상 참 좁지?”
-그러게 말이다. 나도 홍시랑 홍시 부모님께 생일 축하 메시지 보냈다가 너 왔다는 말 듣고 깜짝 놀랐다. 그보다……. 힘내라.
원생들 생일 축하 메시지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이 녀석도 의외로 건실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힘내라니?
“힘내? 뭔소리냐?”
-그 집 식습관이…….
“뭐 한끼정도 채식이 뭔 문제라고…….”
-난 분명 전했다. 그럼 이만. 나도 초대받을 까봐 무섭다.
“?”
윤상호는 그 말을 끝으로 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대체 뭔데 이러지?
“일단 전체는 끝났고 메인이 나오기 전에 일단 이것 좀 드시죠.”
“에?”
나는 기도 아버님이 내민 접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대체……”
접시에는 수많은 알약들이 빼곡이 담겨있었다.
“유산균이나 소화제, 그리고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이죠.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초에 종합비타민 보다는 특정 함량이 높은 제품 몇 가지를 겸용하는 변이 좋습니다.”
에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어서 드십시오. 혹시 알약이 힘드십니까? 드링크제로 바꿔드릴까요?”
밥 먹는데 드링크요? 저, 저기……. 이거 뭔가…….
‘죄송합니다. 이래서 그동안 미뤄왔는데…….’
홍기도는 아련한 눈빛으로 나에게 사죄를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 이 녀석에게 이런 진심 어린 사과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자, 어서. 힘드시면 여기 쌈에 싸서 드셔도 좋습니다.”
“아저씨, 이거 못 먹어요? 나는 잘 먹는데.”
이 와중에 홍시까지 배틀을 걸어온다.
“자, 사양하실 필요 없습니다. 받으시죠.”
더이상 홍기도 아버님의 손을 무안하게 할 수는 없다.
“감사합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알약 쌈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았다.
이제는 수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