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투자자들이란 의외로 한정적이고 특히 IT업계의 큰손이라 불리는 투자자들은 대개 어느 정도 겹치는 법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백회장의 말에 김영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김영주 역시 맥슨의 주가 하락 덕분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맥베스가 있다는 백회장의 주장에 상당히 분개한 상황.
“경쟁사를 공격해서 제 배를 불리는 행동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요.”
맥베스 측이 들었다면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김영주는 오랫동안 함께해온 백회장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대리인 자격은 누구에게?”
“강남 산신령이라는 인물입니다.”
“아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주총꾼들은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이름값이 알려지기 마련이다.
이따금 참석한 총회의 시간을 질질 끌거나 질문세례와 고성등으로 총회를 방해하는 덕분에 주주들의 총회 참석 의지를 꺾어 버리기도 한다.
그 덕분에 몇몇 이름들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
“그런데 총회 방해 정도로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텐데요?”
“총회를 어떻게 방해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
“뭐 기대해보십시오.”
백회장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
*
“흐흐흐흐. 이게 웬 횡재냐.”
장영철은 통장에 입금된 목돈을 확인하며 웃음을 흘렸다.
이른바 강남 산신령이라 불리며 20년 넘게 프로 주총꾼으로 활약(?)하는 그였지만, 한 번에 큰 목돈을 쥐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간만에 힘 좀 써야겠는데?”
이번에는 용역업체를 경호원으로 붙여준다고 한다.
드러눕거나 지나친 난동을 피울 경우, 회사 경비원들이 끌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는 그럴 염려도 없다.
더 화려하게!
더 소란스럽게!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몸값은 한층 더 껑충 뛸 것이라는 기대에 장영철은 기쁨의 몸부림을 쳤다.
-우우웅!
“응?”
마침 용역업체 측과의 미팅장소가 도착했다.
“하남시 물류창고?”
미팅장소 치고는 참으로 독특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돈에 눈이 먼 장영철은 아무 생각 없이 콧노래와 함께 자신의 두루마기를 걸쳤다.
그리고 차를 몰아 전달받은 물류창고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상상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오셨습니까?”
“어? 이, 이게 대체…….”
한켠에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들…….
그들이 입고 있는 작업복에는 자신과 약속했던 용역업체의 회사 로고가 박혀있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먼저 저희를 위협했기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사고입니다. 딱히 장영철씨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딱히 인상을 쓰는 것도 아닌데도 묘하게 사람을 주늑들게 하는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염종수였다.
“의자 하나 내드려라.”
“…….”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미 염종수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호명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무리들.
이른바 조폭이라 불리며 커다란 몸뚱이로 거들먹거리는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하나 같이 잘 다져진 몸에 눈에는 묘한 그늘이 내려 앉아 있다.
양지에서는 활동하는 일이 없는 진짜배기 음지의 주민들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 같은 것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염종수의 화법은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일에 특화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딱히 무례한 행동이나 말투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듣는 이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장영철. 63세. 맞습니까?”
“네, 네.”
“부인은 사별했고 슬하에 자식이 셋. 손자가 다섯.”
자신의 가족 명단을 줄줄 읊어대자, 장영철의 등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별명은 강남 산신령 맞습니까?”
“네.”
흡사 경찰 취조를 연상케 하는 질문 내용이었다. 물론 느낌상으로는 과거에 사라졌던 남영동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장영철의 생각은 옳았다. 염종수는 과거 남영동 취조실의 담당자였던 인물에게서 이러한 방식들을 교육 받았다.
조폭이 구시대의 공권력 취조 방식을 답습한다는 아이러니…….
하지만 장영철은 지금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잠깐 내 이야기 좀 들어보시오. 나는 아무 잘 못도 한 적이 없소.”
“네. 그렇습니다. 아직은 없으시시죠.”
아직이라는 말에 장영철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된통 걸렸구나.’
앞뒤 안가리는 것 같은 총꾼들도 나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법이었다.
특히 정경유착이 강력한 유서 깊은 재벌가의 총회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고, 용돈 벌이에 그쳐야 했다.
특히 건설 쪽은 더욱 심각했다.
물론 그쪽은 자신들이 낄 여력도 없이 툭하면 몸싸움이 벌어지는 통에 건져 먹을 것도 없거니와 건설사와 연계된 용역깡패들에게 잡히기라도 했다가는…….
‘그렇게 조심했거늘…….’
IT업계 관련이라고 방심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다. 애초에 이 정도 금액을 약속받으면 건설사라도 이 악물고 방문했을 것이었다.
그냥 재수가 옴붙은 것이다.
한눈에봐도 어중간한 이들이 아니었다.
자신과 한배를 탄 용역업체의 떡대들이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만 봐도 상황은 명백했다.
“맥슨에 사주를 받고 대리인 자격으로 맥베스의 총회에 분탕질을 계획하던 것 맞습니까?”
“…….”
상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장영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연배를 고려해서 신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제 판단 착오였군요. 가서 질소통 가져와.”
연장에도 레벨이 있다. 그런데 앞뒤 안가리고 질소통?
노쇠한 장영철은 질소통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흉흉한 물건과 마주하면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잠시나마 주주를 핍박하다니! 이건 불법 행위야! 라는 등의 객기를 부려볼까 고민하던 장영철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만! 말하려던 참이었어!”
“그렇습니까? 일단 가져와. 제가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손주들 머리를 쓰다듬어줄 손이 아닙니까. 잘 간수하시기 바랍니다.”
“소, 손?”
질소통이란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손가락 정도를 가지고 위협할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맥슨 백회장에게 사주를 받은 것 맞습니까?”
“마, 맞습니다.”
“김영주 주주의 대리인이고요?”
“네.”
“금액은?”
“2천만원.”
금액이 예상보다 컷던 것일까? 염종수가 피식 웃었다.
“건당 단가가 우리보다 훨씬 센데? 우리도 주총꾼이나 해볼까?”
염종수는 뒤에 있던 부하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금세 웃음기를 제거하고 다시금 장영철을 바라보았다.
“그거 당신 퇴직금이야. 내 말 알아듣지?”
“……네.”
“다시는 이 바닥에 발 들이지 말아야 할 거야.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때는 당신 혼자의 문제는 아닐거라고 약속하지.”
부들부들…….
장영철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이거 받아.”
염종수는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그대로 읽어.”
그와 함께 내밀어진 녹음기.
장영철은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내심 은퇴할 나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그것이 조금 빨리 온 것뿐이다.
어차피 뒷돈으로 받은 돈이니, 탈날 염려도 없다.
염종수의 말대로 퇴직금이라고 생각하고 죽은 듯이 잠적하면 그만이다.
“나 강남 산신령 장영철은 맥슨 회장 백회장에게…….”
그렇게 강남 산신령이라 불린 주총꾼 하나가 오늘 은퇴했다.
*
*
*
-일단 사전에 자를 수 있는 선은 최대한 잘랐습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그리고 해당 자료는 꼬리가 잡힐 염려가 있으니, 차후에 오사장 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염종수의 마지막 인사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녀석들은 왜 항상 이렇게 끼니 걱정을 하는 걸까.
“양실장님.”
“네.”
“일단 1차 거름망 작업은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군요.”
내 말에 양실장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뭔가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사실 이런 부분까지도 완벽하게 처리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고 진행은 모두 용역업체 측에서 진행한 덕분에 얼떨떨한 심정입니다.”
“진행 상황을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좋은 파트너를 손에 넣으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종수 녀석이 이번일에서 선보인 일처리는 놀랄 정도였다.
단번에 맥베스의 주주 명부를 분석하고 백회장과 선이 닿을 만한 주주들을 측정하더니, 완벽하게 일을 끝내버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겠지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잔챙이들이 더 남아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백회장 본인에게는 아무런 탈이 없으니…….”
“그 부분은 총회가 끝난 뒤에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당장은 총회를 무사히 끝마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양실장이 싱긋 웃었다.
“정확하십니다.”
“그보다 곧 있으면 저와 양실장님도 임원이 되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느낌이네요.”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 밀도는 다른 법이지요. 표세인 부장님께서 맥베스에서 보내신 시간은 일반 회사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였지요.”
“제가 잘하고 있는 걸까요?”
“예. 물론입니다. 우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염려가 되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
“저 양성태에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일 저 혼자서 처리한 것이 마땅치 않으셨던 모양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양실장이 내 일처리에 불만을 드러냈다.
“예전에 쌍두마차를 언급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네. 그럼요.”
사실 처음에는 다소 다른 의미로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어느샌가 그 마차에 내가 타고 있었다.
“저에게도 일거리가 필요합니다. 기억해주십시오. 앞으로 양지는 문이사에게, 음지는 저에게. 저희도 표세인 부장님께 쓸모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양실장과 대화할 때마다 송구스럽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솔직히 가끔 생각합니다.”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제가 양실장님의 기대에 부응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요.”
물론 양실장만이 아닌 다른 모두의 기대도 마찬가지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 표세인 부장님이 그리시는 그림은 저희의 바람이자, 목표입니다. 너무 혼자 짊어지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건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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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총회날의 아침이 밝았다.
맥베스 사옥 정문에서 용역업체 직원들과 함께 서있던 홍기도는 이른 아침부터 헐레벌떡 달려오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헉헉……. 너 나 알지?”
“모르는데요?”
“에잇, 진짜 바빠죽겠는데. 지금 빨리 주면 깎아 줄게. 5만줘.”
“5?”
“너 진짜로 나 몰라? 아니, 뭐 이런 초짜를 배치했어? 실장 어디 있어?”
“양실장님 지금 위에서 총회 준비하고 계세요.”
양실장이 없다는 말에 노인은 인상을 팍 구겼다.
“마, 빨리 전화해 역삼동 호랭이 왔다고.”
노인은 겉옷을 젖히고 안에 있던 호피무늬 티셔트를 보여주었다.
“신사동 호랭이는 들어봤는데……. 역삼동 호랭이는 처음 들어봤네요. 원로 뮤지션이신가요?”
“뭐래 이 미친…….”
“어? 욕했다.”
“뭐?”
“규정에 따라 출입을 불허합니다. 모시고 가주세요.”
“어?”
홍기도의 지시가 떨어지자, 용역업체 직원들이 노인을 좌우에서 붙잡았다.
“잘가세요~”
홍기도는 증거용 녹음기를 흔들며 역삼동 호랭이를 배웅했다.
욕하거나 행패를 부리면 출입 금지.
모든 총회규정에 적혀있는 문구. 그리고 그것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끌어낼 수 있는 남자!
“이거 생각 보다 재미있네. 다들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
홍기도는 이번 일이 자신의 적성과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빠른 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