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43화 (243/346)

243.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렇습니다. 조금 더 좋은 일로 만났다면 좋겠습니다만…….”

설동은은 어색한 미소로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뻔히 무슨 일로 왔는지는 안 들어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양성태는 예의상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어조로 질문했다.

“우선 승진 축하드립니다. 부사장님.”

설동은은 양성태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축하드립니다. 표세인 대표님.”

“감사합니다.”

나와 양성태는 동시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번 총회의 결과로 승진 고과에 대한 결의가 확정되었다.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대표이사 표세인.

부사장 양성태

전무이사 고학현

상무이사 문상훈

상무보 도경우

그 밖에도 소소한 변화가 있었지만 당장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이것들이었다.

상무이사 자리를 두고 문상훈과 도경우. 두 사람 중에 누가 올라가느냐를 두고 다소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결국은 저렇게 결정되었다.

덕분에 문상훈은 현재 미국으로 건너가 센터장 자리를 후임에게 물려주는 작업에 착수했다.

반면 양성태의 부사장 취임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미 오랫동안 회장님을 보필하기 위해, 실장 직위에 묶여 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측면에서도 모두는 납득했다.

애초에 능력적인 면에서야, 양성태를 흠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예상은 했었지만……. 솔직히 빠르군요. 맥베스의 사내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IT기업이라고는 해도 맥베스 정도로 성장한 기업들은 그 체급만큼이나 이런저런면에서 속도를 내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근래 연아가 부회장에 취임한 이후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번 일에는 내 의사가 크게 반영된 탓이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일입니다. 여러 가지면에서 맥베스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고, 거기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니까요.”

“새로운 바람……. 확실히 그렇습니다. 표세인 대표님.”

“네.”

“이번 게임은 솔직히 좀 무섭더군요.”

“그렇습니까?”

“깨비몬까지만해도 시류를 잘 탔다는 느낌이었는데……. 스쿨런은 정말이지…….”

설동은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스스로 뒤처지고 있음을 느끼는 중인 것 같다.

우리가 앞서나가는 만큼 경쟁자들이 느끼는 조바심은 점점 더 거세질 것이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신겁니까?”

설동은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직은 체험판 정도만 풀린 상태라서 스쿨런의 진면모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거듭 말했듯이 스쿨런도 완벽한 게임은 아니다.

개발여건과 시간상 플레이 타임은 짧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다회차 & 멀티 엔딩 요소로 포장했다.

물론 단순히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유동적 피드백 알고리즘을 구성하여, NPC들의 상호작용 역시 변화시켰다.

덕분에 계속 새로운 상호작용으로 유저들의 눈을 속일 것이다.

물론 이것에 속지 않는 유저들은 짧은 플레이타임에 염증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정도 플레이타임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지 않은 적합한 시간일 수도 있다.

반대로 파고들고 싶은 이들은 더욱 파고들겠지.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고 개발여건은 언제나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 스쿨런의 완성도에 만족한다.

이것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테니까.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슬쩍 발을 뺐다. 경쟁사 대표에게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떠들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이만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내 생각을 읽은 설동은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들었다.

“백회장님의 전언입니다. 완전한 항복선언. 백기를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역시 빠르군요.”

공격도 후퇴도 빠르다.

불같은 성정 만큼이나 식는 속도도 빠르다는 느낌.

“백회장님은 곧장 은퇴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이 정도 선에서 그간의 앙금이 가라앉기를 바란다는 것이겠지요.”

적국의 왕을 쓰러트렸다.

나라고 이 이상의 싸움을 원치는 않는다.

이걸로 업계 내부에는 상당한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다.

이제 국내 게임 시장은 맥베스가 주도한다.

모두가 이점을 깨닫고 그저 순순히 우리의 발자취를 쫓기 바랄뿐.

“하지만 그 후속조치는 진행해야겠지요.”

“후속조치?”

양성태의 말에 설동은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항복선언 자체는 솔직히 우리에게 딱히 이득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백회장님께서 쥐고 있던 정계와의 파이프라인. 그것을 원합니다.”

“!”

양성태의 말에 설동은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역시 예상대로다.

이미 양성태와 이 점에 대해서는 논의를 끝마친 상황.

설동은은 아마도 이 기회를 노려 어부지리를 노릴 것.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그냥 두고볼 생각이 없었다.

“이거, 이거……. 제 속을 다 들여다보고 계셨군요.”

설동은은 난처하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물론 완전히 설대표님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이 부분도 예상은 하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갑작스럽게 맥베스의 대표가 된 나를 정계의 노회한 능구렁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신고식이라는 의미에서라도 가혹하게 독니를 드러낼 것이다.

특히나 한국은 게임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학부모들은 자다가도 게거품을 물고,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군침을 흘리지 않는가.

“이 부분에 한정해서 파트너쉽을 맺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설동은 대표는 나와는 달리, 오랫동안 이름값을 날린 기업인이다.

그런 인물과 함께하는 것 만으로도 쓸데없는 체력소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했다.

“네. 저도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동은의 입장에서도, 현재 기세등등한 우리와 한 배를 타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설동은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맥베스와는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설동은은 내 손을 마주잡았다.

*

*

*

“후우…….”

“피곤하세요?”

홍기도의 말에 나는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진이 빠지네.”

내 스스로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일정이 잡힌 미팅들을 방문하러 다녔기 때문일까?

아직은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몸에 붙지 않았기 때문인지,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소 피로가 밀려왔다.

“안타깝지만 빨리 숨 돌리셔야 할 겁니다. 곧 다음 미팅이 있어요.”

홍기도가 테블렛에 있는 일정표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 이렇게 바로 시작해도 괜찮겠냐? 부사장님 말대로 연수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낫지 않겠어?”

남궁원과 홍기도.

개발 파트에서 내 오른팔과 왼팔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소중한 부하들.

나는 이들을 나의 승진과 보조를 맞춰 팀장으로 승진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양성태의 반대는 정말로 의외였다.

‘홍기도 과장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홍기도를요?’

갑작스러운 양성태의 요청에 나는 당황했다.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홍기도는 남에게 맡기기가……. 참으로 민망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홍기도 과장의 개발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어쩐지 그의 포텐셜은 다른 쪽에 있지 않을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습니까?’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제게 맡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자마자, 홍기도는 보직변경으로 내 수행비서로 붙어버렸다.

듣기로는 양성태가 연수원을 제안했다는데, 홍기도가 극구 싫다면서 양성태가 대안으로 제시한 어마무시한 교육자료들을 하루만에 달달 외워버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게 머리 좋게는 안 생겼는데…….”

“암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죠.”

“그럼 뭘로 하는데?”

“욕망.”

“뭐?”

갑자기 이게 무슨 헛소리야?

욕망이 왜나와?

“대개 이걸 외우기만 하면 싫은 상황을 피할 수 있다라는 확신이 생기면, 대충 해결이 되죠. 반대로 이런 확신이 없으면 하나도 머리에 안 들어오죠.”

이걸 머리가 좋다고 해야하나, 머리가 이상하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네 욕망이 연수원 가기 싫다였어?”

“아니요. 밀리기 싫다?”

“누구한테 밀리는데?”

“비밀입니다.”

“그래. 알겠다.”

“어? 왜 안물어봐요?”

“네가 물어보길 원하는 것 같아서.”

“…….”

그렇게 홍기도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음 미팅 시간이 다가왔다.

“그럼 가시죠.”

“그래.”

나는 홍기도와 함께 다음 미팅 장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도경우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이사진들, 이른바 전무군단이라 불리는 멤버들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일이 하나 생겨서.”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새롭게 대표이사에 취임하셨으니, 다망하시겠지요.”

도경우와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네.”

내가 자리에 앉자, 홍기도가 잽싸게 준비해온 회의 자료들을 모두의 앞에 배치했다.

“이건?”

“우선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가 사전에 준비한 자료였다.

그리고 자료를 읽던 임원들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저희의 용건을 아시고…….”

어차피 이들이 나를 만나자고 할 이유는 뻔했다.

우선 그들이 개발하는 인디게임의 개발 기간이 점차 늘어지고 있다는 것.

아무래도 문상훈과의 경쟁심리가 제대로 발동한 탓에 규모를 너무 크게 잡은 것이 첫 번째 문제였고, 둘째로는 막상 싸움의 결과가 나버리니, 텐션 자체가 늘어진 것이다.

“상무보님.”

“네.”

내 부름에 도경우는 바짝 긴장했다. 그도 당연히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 파벌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문제는 그가 책임져야할 몫이다.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으음…….”

도경우를 포함한 전무군단 전원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신음을 흘렸다.

직책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과거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던 질문을 내 스스로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무턱대고 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압니다. 이제부터 함께 논의를 시작해보죠. 제가 드린 자료를 우선 함께 보시죠.”

라고 말하면서 홍기도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홍기도는 사전에 준비해 놓은 프레젠테이션을 출력했다.

“우선 현재 70% 정도 진행상황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테스트 빌드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70%라고 확정 짓는 것 부터가 문제입니다. 우선 이 부분을 보시죠…….”

홍기도는 제법 유창하게 발표를 시작했다.

내가 준비해온 자료에 따라서 현재 개발상황과 앞으로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나누고 그 해결책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서버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 서버는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대안이 있죠. 굳이 우리 쪽 서버를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디젤엔진 쪽에 준비된 시스템을 활용해보는 쪽이 더 수월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수수료 배분에서…….”

“그 부분은 감수해야겠지요.”

결국, 임원들의 제 밥그릇 챙기기 때문에 사내 인력들을 무한정 그쪽에 붙여 둘 수는 없다.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고, 해결할 부분은 해결합시다. 이대로 그냥 무작정 늘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이 부분을 지적했다.

진짜 연수 한 번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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