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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49화 (249/346)

249.

예전처럼 쓸데없는 가혹행위 따위는 다소 줄었다고는 해도, 엘리트 체육계는 아직도 선후배 관계가 강력한 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었다.

배구 국가대표 출신의 주원호는 운동선수 시절의 스타 대접이 아직도 몸에 밴 남자였다.

팔꿈치 부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도 국가대표와 프로팀의 주장이었던 그였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번에 새로 출연하게 된 표세인은 공격수인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참아. 참아. 왜 그러는 거야?”

연예인과 연예계 진출을 바라는 체육인들이 반씩 섞인 구성이기 때문일까?

주원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몇몇이 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주원호 선수……. 지금까지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니들은 연예인이니까. 저 녀석 저거……. 아직도 성질머리 못 고쳤구나.’

모두의 걱정 섞인 눈빛에도 주원호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급기야.

“씨발, 상비군이 무슨 벼슬이라고.”

결국 주원호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게임회사 대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상비군 출신임을 내세워 예능계에 발을 들이려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국대 출신 이하는 방송 출연 금지 같은 제도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냐? 죽어라. 운동한 사람들은 뭐가 돼?”

본인도 국가대표지만, 그의 부모님은 예능제작사의 대표였다.

그래서 다른 선출 방송 꿈나무들과는 다르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제작진들도 내심 주원호의 눈치를 살필 정도.

애초에 그 모든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190이 넘는 장신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면 누구라도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표세인과 홍기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대표님, 우리 홍시가 답장 보낸 것 좀 보세요.”

“걔가 한글을 알아?”

“뜨문뜨문 알아요. 그냥 제멋대로 막 쳐요.”

“아……. 그렇구나.”

주원호가 눈알을 부라리건 말건, 표세인과 홍기도는 저들끼리 낄낄거릴 뿐이었다.

“어이, 내 말 안들…….”

-흠칫.

표세인의 팔을 붙잡으려던 주원호는 흠칫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 뭐지?’

그저 힐끔 돌아본 표세인과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묘하게 서늘하면서 감정이 없는 눈빛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듯한 그런 눈빛.

주원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도 모르는 채로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표세인씨. 홍기도씨. 잠시 이쪽으로 와주세요.”

“네.”

“넷!”

한 제작진의 부름에 표세인과 홍기도는 굳어있는 주원호를 지나쳐 자리를 옮겼다.

“너 왜 그러고 서 있냐?”

다른 출연자의 말에 주원호는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자신이 겁을 먹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표세인도 상당한 장신이지만, 자신 보다는 머리 하나가 작다.

살면서 같은 배구 선수가 아니라면 자신 보다 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이 익숙했기에, 겁을 먹은 경험 자체가 생소한 것이었다.

“광고는 이 타이밍에 나갈 예정인데, 괜찮으시죠?”

“제가 방송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요. 그저 잘 부탁드립니다.”

표세인과 홍기도는 그저 제작진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오늘 공격수로 나가도 되는 겁니까?”

새로 온 데다가 오늘 하루 반짝 출연에 불과한 자신들이 주전 공격수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 살짝 신경 쓰이는 표세인이었다.

“그러게요. 벤치도 괜찮은데…….”

반면 홍기도는 부담이 아닌 귀찮음에 비중이 높았다.

“게스트시니 더욱 신경을 써드려야죠. 무엇보다 국장님 지시도 있었고…….”

아무래도 제작진 역시 이번 편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나 걱정이 있는데…….”

“네?”

“제 주변에 같은 편은 가급적 거리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표세인의 말에 제작진이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주원호 선수 때문이신가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주의를…….”

주원호가 조금 전부터 묘한 눈빛을 보내며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의외로 방송 중에 사고는 출연진끼리의 마찰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누구라도요.”

“?”

“걸리적거리면 곤란하거든요.”

주원호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표세인이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10골……. 넣어야 하니까.’

*

*

*

“바로 주전이라니…….”

“이건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이니까요.”

“국장님 지시인 것은 저도 압니다.”

라고 말하면서 윤감독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예능이든 뭐든 윤감독은 감독의 지휘에 참견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패전 속에서도 조금씩 발을 맞춰가고 있는데, 이제 와 새로운 게스트를…….

그것도 두명이나 주전 공격수로 기용하라는 지시라니…….

“게다가 표세인씨는 나이도……”

삼심대 후반이 훌쩍 지난 나이.

이미, 다른 젊은 출연자들에 비해 나이로도 문제였다.

“풀타임 출전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상대팀도 나이 많은 인원들이 있지 않습니까?”

“조기축구팀 원로들은 나름 요령껏 뛰는 겁니다. 풀타임을 전력으로 소화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윤감독은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보시다가 정 안 되면 교체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전반은 맡겨 주셔야 합니다.”

“허.”

결국, 전반은 무조건 맡기고 지켜보라는 말이 아닌가?

윤감독은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이거 단순히 국장님 이야기 아닙니다.”

“에?”

“사장님 선까지 올라가는 이야기에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상대는 맥베스 대표잖습니까. 일반 출연자 아닙니다.”

“그거 참…….”

국대 선출이라고는 해도 이미 예능인이 다된 윤감독이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제작진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디 반사람 몫이라도 해주길 바랍시다.”

윤감독은 내심 이번 경기를 포기했다.

상대는 과거 자신들을 7:2로 맹타했던 강력한 팀이 아니던가?

“그래도 지난번 중학교 팀과 붙는 것 보다는 나은 그림이 그려지겠죠?”

“그러길 바라야지요.”

제작진과 윤감독 모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여기 표세인씨는 그렇다치고……. 이 홍기도씨라는 분은…….”

이미 방송에 출연하고 독특한 발차기 밈까지 만들 표세인은 이해하겠다.

그런데 그 비서라는 홍기도라는 남자는 대체 왜 함께 출연한단 말인가?

“그게 문제입니다.”

“?”

“그분 출연 안 시키면 저희 프로 중국 진출 못 한답니다.”

“?”

윤감독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

*

“자, 오늘 특별한 게스트가 있습니다.”

이미 얼굴을 확인한 상황이지만, 늘 그렇듯이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출연자들.

“국내 최고의 게임 개발사, 맥베스의 CEO 표세인씨와 그의 오른팔 홍기도씨를 소개합니다!”

오른팔?

출연진들은 당황했다. 무슨 이런 소개가 다 있단 말인가?

오죽하면 표세인 조차 황당한 얼굴로 옆에선 홍기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홍기도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이것은 그가 직접 부탁한 소개 멘트였으니까.

“오오오!”

박수갈채 속에서 등장한 표세인과 홍기도는 여러 방향으로 인사한 후, 윤감독 앞에 섰다.

“그런데 지난번 방송에서는 부장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역시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표세인은 멋쩍게 웃었다.

“그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요즘 게임계에 화제가 된 스쿨런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스쿨런을 개발하신 것도 표세인씨라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스쿨런 진짜 재미있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즐기고 있습니다.”

“어? 오기석씨도 게임 좋아하세요?”

“그럼요! 스케쥴 없을 때는 집에 틀어박혀서 게임만 즐기는 연예인 많잖아요.”

저마다 게임 이야기로 한창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데 홍기도씨는 굳이 본인의 소개를 표세인씨의 오른팔이라고 부탁한 이유가 있나요?”

진행자의 말에 홍기도는 씩 웃었다.

“이제 슬슬 홍보할 필요가 있어서요.”

“홍보요?”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홍보도 아니고 굳이 오른팔이라는 것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모두는 의아했지만 홍기도는 천연덕스러웠다. 아마도 이 방송이 나갈 때쯤, 맥베스의 몇몇 인사들은 주먹을 불끈 쥘 것이 틀림 없다.

“하지만 대표님의 오른팔을 자처하시다니, 홍기도씨도 굉장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축구 경험은 어떻게 되시나요?”

무조건 띄워주라는 말에 진행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홍기도에게 집중 조명했으나…….

“축구 별로 해본 적 없는데요.”

“아, 그, 그러시군요.”

없어도 있다고 해야지! 진행자는 눈빛으로 홍기도를 채근했으나, 홍기도는 진행자를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른팔임을 홍보했으니, 이제는 관심이 없어진 것.

“흠흠, 표세인씨의 축구 실력은 회사뿐만 아니라, 과거 선수 시절에도 유명했다던데요.”

“하하, 어려서부터 제대로 축구해 볼 생각 없냐는 말을 많이 들었었죠.”

“그런데도 태권도를 선택하신 것은 역시 태권도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것보다는 태권도가 더 싸게 먹혀서요.”

“아…….”

“그렇죠. 구기 종목이나, 몇몇 종목들은 특히 돈이 많이 들죠.”

윤감독도 익히 잘 아는 주제였기에 말을 보탰다.

그렇게 표세인의 가벼운 과거사까지 살짝 다루고 난 후에야 소개가 전부 끝났다.

“그럼 개인기 검증을 한번 시작해 볼까요? 리프팅 한 번 보여주시죠.”

윤감독의 지시에 따라 스텝들이 표세인과 홍기도 앞에 공을 비치했다.

“그럼, 시작.”

윤감독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다들 그저 예능으로 느끼는 프로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 패배만 거듭하는 프로가 살아남을 수가 있겠는가?

윤감독은 한 경기, 한 경기에 나름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단 한 번뿐이라도 주전 공격수로 기용할 선수들의 폼을 확실히 점검하고 싶었다.

-툭, 툭.

‘어라? 제법?’

리프팅은 개수도 중요하지만, 볼에 대한 친숙함 자체가 더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볼에 손도 대지 않고 발끝으로 들어 올려 툭, 툭 리프팅을 시작한 표세인과 홍기도의 발재간은 예사롭지 않았다.

“잘하네?”

“홍기도 씨도 잘하시네요.”

그냥 곁다리 정도로 생각했던 홍기도 조차 발재간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오케이. 그만 됐습니다.”

“벌써요?”

“저 정도면 더 볼 필요도 없어요. 저 수준이면 밥만 주면 온종일도 차겠죠. 이제 드리블 한 번 봅시다. 수비해 보실 분?”

윤감독의 말에 출연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제가 하죠. 체격도 비슷하니까요.”

주원호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럼 앞으로.”

주원호와 표세인 일행 간의 마찰을 알지 못한 윤감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콘을 돌아 마지막 수비를 제치고 골을 넣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표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삑!

호각소리와 함께 표세인이 가벼운 발놀림으로 안정적으로 콘사이를 지나쳤다.

‘이상하게 자연스러운데?’

그저 대수롭지 않게 툭툭 볼을 움직이는데,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프로의 발놀림을 보는 듯한 느낌.

‘만약 여기에 개인기까지 뒷받침된다면…….’

윤감독의 눈동자에 옅은 기대가 어렸다.

‘와라! 발라주마.’

콘을 모두 지나친 표세인을 바라보며 주원호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콘을 모두 통과한 표세인이 주원호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출연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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