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안녕하십니까. 광파전시총국의 국장 쉬린칭입니다.”
쉬린칭은 포갠 두손을 들어올리며 중국식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일단은 저도 차기 프로젝트에 한 발 들인 상황이기에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습니다.”
쉬린칭의 말에 도경우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내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혹시 총국장님을 통해 개발력을 보충하실 계획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거 멋진 일이군요.”
AAA급 개발에 있어 부족한 개발력을 쉬린칭을 통해 극복할 계획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이지, 쉬린칭은 맥베스 입장에서는 요술방망이 같은 존재다.
투자면 투자, 개발이면 개발 거기에 막강한 영향력까지.
내가 괜히 홍켓몬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소환(?)한 것이 아니었다.
“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우, 홍기도가 예의 바르게 쉬린칭에게 질문하자, 나는 양성태에게 놀란 시선을 보냈다.
설마 저 녀석을 저렇게까지 훈육한 겁니까? 하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정작 양성태 조차 놀란 표정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것은 돌발사태가 맞긴 한 모양이었다.
“백차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홍기도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탕비실로 향했다.
그와중에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정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수행비서의 모습이 아닌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겁니까?”
내 질문에 쉬린칭은 슬며시 미소지을 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
트레이너인 나 조차 쉽지 않은 마법같은 조련 스킬이라니!
저거 너무 탐난다.
내가 그간 홍켓몬을 각성시키기 위해 죽어라 자장면만 흡입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홍켓몬 트레이너 자격 반환해야겠네요.”
“네?”
내 말에 고전무가 뭔 소리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이후, 홍기도가 차를 가져온 후에야 우리는 다시금 회의를 재개했다.
그리고 대략적인 논의가 끝난 후, 회의실에는 나와 양성태, 그리고 쉬린칭과 홍기도만이 남았다.
“너 뭐 잘 못 먹었냐?”
“아닙니다. 잘 먹었습니다.”
“뭐 먹었는데?”
“…비밀입니다.”
흠, 역시 이 작전은 더는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다.
하지만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살짝 눈을 내리깔고 쉬린칭 뒤에 서 있는 홍기도와 계속 싱글벙글한 쉬린칭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다른 것은 그렇다치고, 곧 헐리우드로 가시겠군요?”
“네. 그럴 예정입니다.”
“혹시 그쪽과 별도의 채널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미국에 있는 문상훈에게 사전에 워너브라더스와의 미팅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한 것 정도가 현재 진행 상황의 전부.
별다른 연줄도, 무엇도 없는 상황에서 다소 모험에 나서는 기분이다.
“혹시 국장님께서?”
“이런, 제가 다소 오해할만한 말씀을 드렸군요. 아니요. 저도 헐리우드와는 별다른 연고가 없습니다. 그저 질문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쉬린칭 역시 헐리우드에 별로의 인맥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
“뭐 인맥이야, 가서 만들면 되겠지요.”
“하지만 헐리우드도 상당히 텃세가 강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으셔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렇기에 반대로 좋은 인맥 하나만 있다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때였다. 양성태가 뭔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인맥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번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이요?”
미국이라면 내 생각에는 문상훈과 제임스 정도가 내 손에 쥔 유일한 카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성태는 역시나 마법사랄까? 오랜만에 그의 마법이 펼쳐지려는 걸까?
“미국에도 지인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지인이라기 보다는 제 아내쪽 지인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아내?
그러고보니, 양성태의 아내는 종종 해외를 오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제 아내는 미술계에 몸을 담고 있는데, 종종 해외 영화 제작팀의 미술감독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멋지군요.”
“네. 제 아내는 멋진 사람입니다.”
양성태는 부끄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양성태의 아내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높아진다.
“가만, 화가이면서 미술감독?”
쉬린칭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며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다.
“혹시 아내 분 성함이 우선아입니까?”
“네. 들어보셨습니까?”
양성태의 말에 쉬린칭이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들어봤냐고요? 요즘 가장 핫한 화가잖아요. 저는 그녀의 그림을 3점이나 소유하고 있어요. 작년 소더비 경매에서도…….”
잠시 쉬린칭의 열띈 미술 애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이기에 얌전히 듣고있었다.
그러다가 홍기도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미술에 대해 좀 아냐?”
“훗, 어떨 것 같습니까?”
“하긴 네가 뭘 알겠냐.”
“…….”
홍기도는 뭔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딱히 반박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녀석도 나처럼 미술 쪽에는 젬병인 모양.
“굉장히 촉망받는 아티스트입니다. 게다가 미술감독으로서도 역량이 빼어나서 다수의 작품에 참여한 경력이 있지요. 확실히 우선아라면 헐리우드에서 확실한 인맥을 쥐고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양성태는 아내를 칭찬하는 쉬린칭에게 호감가득한 미소로 답례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업무에 아내분을 끌어들여도?”
공과 사를 구별하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내 우려 섞인 질문에 양성태는 나직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그보다는 효용성이 있는 인맥이 있을지가 관건이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쯤 대표님께 아내를 소개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영광이지요.”
“앗! 저도 소개받고 싶습니다.”
“넌 빠……. 죄송합니다.”
결국 매너모드(?)가 끝난 홍기도가 쉬린칭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리 길게는 못 가는군.”
나는 홍기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시간 문제지요.”
오오! 쉬린칭의 자신만만한 미소라니? 정말로 홍켓몬 트레이너 자격을 쉬린칭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아내는 조만간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그때 식사자리라도 한 번 마련해 보겠습니다.”
“넵! 제가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대접은 제가 해드려야지요.”
“에이, 유명한 화가님을 뵙는 자리인데 그럴 수야 없지요.”
“역시…….”
“왜 그러시죠?”
“제 아내가 아닌, 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대표님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작은 요소들이 대표님의 매력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딱히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양성태는 곧바로 그것을 캐치해서 칭찬으로 돌려준다.
정말로 사람을 기쁘게 할 줄 아는 남자라는 느낌이다.
우선아.
양성태의 아내이자, 유명한 화가. 그리고 미술감독.
정말로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
*
*
그리고 주말.
양성태는 자신의 아내, 우선아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국 게이트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 속에서 선글라스와 코트 차림의 여성의 모습을 양성태는 포착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 여성 역시 양성태를 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여성은 바로 우선아였다.
“피곤하진 않아?”
양성태는 아내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물었다.
“내 남자를 보고 피곤하면 되나?”
우선아의 농담에 양성태는 또 한 번 미소지으며 슬며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머? 어쩐 일이야?”
밖에서 이런 종류의 스킨쉽을 그리 즐기지 않는 양성태였다.
그렇기에 우선아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양성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예쁘다 싶어서.”
“흐음, 보통 이런 상황이면 남편의 외도를 의심해야 한다던데?”
“내가 그렇게나 멋없는 사람이었나? 반성해야 겠네.”
“반성하지마. 좋았으니까.”
우선아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양성태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넣었다.
“이번 전시회는 어땟어?”
한국인 화가 중에서 해외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는 많지 않고, 우선아 정도의 나이라면 더더욱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감독으로 활약하던 중에 알음알음 준비한 작품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녀의 이력은 무척이나 독특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스캐쥴로 인해,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야 했기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각별한 반가움이 샘솟았다.
“뭐 항상 그렇지. 다행히 이번에는 에이전시 측과 별 다른 문제가 없었어.”
“다행이네.”
화가들은 종종 에이전시와 마찰을 겪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그보다 대표님과의 식사 이야기는 뭐야? 헐리우드 쪽 인맥을 소개해 달라고 했었나?”
“맞아. 하지만 메인은 그저 식사야. 나머지는 사족에 가깝지.”
양성태는 표세인에게 우선아를 소개하는 것이 못내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우선아 역시 남편의 표정에 깃든 즐거움과 기대감을 놓치지 않았다.
“흐음~”
“왜 그래?”
양성태 역시 곧바로 아내의 표정에 떠오른 미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내 남자를 홀린 사람에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까 싶어서.”
“멋진 분이야. 당신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야. 그나저나 당신이 회사 동료를 소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지?”
“그렇지.”
조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동분서주하던 양성태에게는 딱히 친한 동료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표세인이 등장한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문상무도 소개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상훈은 현재 소일연에게 센터장 직위를 인수인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상황.
그를 함께 소개할 기회를 놓친것이 양성태로서는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요즘 회사 일이 퍽 즐거운 가봐?”
“그렇지. 그리고 점점 더 즐거워지고 있어.”
표세인의 마력이랄까?
그와 함께 이런 저런 일들을 도모하는 것은 업무라기 보다는 친한 친구들과의 작당모의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기대를 뛰어넘는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나에게 집중해야지.”
“내가 그러지 않을 때도 있었나?”
“없지. 당신은 완벽한 남편이니까.”
“당신은 그 이상이지.”
“하하하.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우선아는 보는 사람이 시원할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나도 전부터 너무 궁금했어.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우리 남편이 그렇게나 호감을 보내는지.”
“당신도 틀림 없이 마음에 들어 할 거야.”
표세인뿐만이 아니었다.
문상훈이나, 제임스 등등, 근래 본인과 가깝게 지내는 동료들 모두를 우선아는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었다.
“북적이는 자리를 좋아한 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게스트 목록을 작성하게 되더군.”
“헤에~ 정말 별일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양성태, 본인부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대되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퍽 우스울 정도로 기대가 되고 있었다.
청심환을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