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미국 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양성태가 준비해온 일정표를 검토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용이 부실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인데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을 수는 없지요.”
우선아를 통해 제작자를 소개 받는 것만이 현재 단계에서 결정된 유일한 것이었다.
대략적인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로 두루뭉술하게 짜인 일정은, 솔직히 일이 이대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미국지부에 방문하는 것은 그대로 진행 될테니 별 문제는 없겠지요.”
“그거야 그렇기는 하지요.”
양성태는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가급적 제가 보필하고 싶었습니다만…….”
아! 아쉬운 것이 이쪽있나?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부사장님께서 회사를 맡아주셔야지요.”
그것을 위한 부사장이 아닌가?
그리고 양성태라면 내가 자리를 비운 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출장 막바지에 제임스의 처가가 있는 텍사스를 방문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때는 연아까지 이쪽으로 합류한다.
이래저래, 양성태가 본사에 남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어제는 많이 놀라셨지요?”
“하하……. 솔직히 지금도 긴가민가한 상황입니다.”
다소 힘빠진 미소.
아마도 그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었다는 거다.
“그래도 어제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제 아내도 무척 즐거웠다고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저야말로 그랬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제는 참 묘한 기분이었지요. 홍기도 과장도 평소와는 다르게 젊잖은 모습이었고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일반인 코스프레라고 해야 할까요? 저도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잠자코 듣고 있던 홍기도가 울컥했다.
“가만히 있는 사람 공격하지 마시죠!”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냐. 뭐 할 이야기 없어?”
오늘은 쉬린칭이 본사에 방문할 예정이 없는 탓에 홍기도는 본연의 업무인, 내 비서 역할로 돌아왔다.
“있는데, 없어요.”
“그게 무슨?”
양성태는 홍기도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명색이 트레이너인 나는 금방 이해했다.
“……지난번 술자리때, 쉬린칭 호텔에 바래다주고 곧장 집에 간게 아니었구나.”
“아앗!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냥 떠본거였는데 맞았냐?”
“……제가 미쳤었나 봐요. 크흑…….”
홍기도는 정말로 통탄스럽다는 듯이 벽을 잡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나와 양성태는 잠시 황당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사장님.”
“네.”
“플랜 B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플랜 B……. 그렇군요. 만약 쉬린칭과 홍기도 과장이 헤어지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후우, 이거 상상만으로도 만만치 않군요.”
양성태는 벌써부터 두렵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마케팅 합자회사와 오행전기를 비롯한 이후 중국시장에 진출할 게임들의 VIP 서비스.
게다가 향후 계획된 막대한 투자금…….
“기둥 소프트 지분을 떼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잡아야 합니다.”
이미 쉬린칭은 일개 파트너 수준을 넘어버렸다.
많은 계획들이 그녀의 존재를 고려하고 세워진 상황.
“차라리…….”
“어? 부사장님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는 거죠?”
양성태의 그윽한 눈빛.
딱히 홍기도처럼 미친 촉쟁이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냥 결혼을 시켜버리는 것이.”
“흐윽……!”
어? 눈물?
긴급 회의 종료.
*
*
*
“너 진짜 요즘 이상하다?”
회의중에 진짜로 눈물을 흘려버린 홍기도의 돌발행동에 나는 이 녀석을 끌고 회사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성태형 진짜 너무해요.”
“음…….”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네가 부사장님을 성태형이라 부르니까 어색해서?”
“어제 다들 그랬잖아요. 자기도 형님이라 부르고선?”
그랬지. 그런데 술깨니 느낌 묘하달까?
“어쨌든 정말로 뭐야. 사귀기로 한거 아니야?”
“……네. 맞아요.”
“으음, 축하한다고 하면 되는 것 맞지?”
“고맙습니다.”
아니, 연애 시작하자마자 이게 무슨 초상집 분위기람?
“쉬린칭을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울상이야.”
사실 울상이라는 말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울음을 터트렸지.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홍기도가 누구던가?
싫은 일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녀석이다.
게다가 쉬린칭은 누가봐도 감동할 정도로 홍기도에게 지극정성이었다.
그러니 홍기도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당연하다 싶을 정도.
“진짜로 결혼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울어?”
“매리지 블루 몰라요? 원래 결혼 이야기 오가기 시작하면 다들 이러잖아요. 우리 누나들도 다 그랬거든요?”
너 남자잖아. 라고 말하면 너무 성차별적인 발언일까?
“확실히 빠르긴 빠르네.”
“네. 걔는 애초에 연애란 결혼전에 거치는 계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애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연애를 시작한 건 너 잖아?”
“그렇죠.”
“으음…….”
“그런데 형은 대체 언제 결혼할 거에요?”
어? 갑자기 내쪽으로 화제를 틀어?
“하긴 해야지.”
“판데믹도 어느정도 가라앉았잖아요. 동거까지 시작할 정도면 빨리 해버리는 편이 낫지 않아요?”
“맞아. 맞는데…….”
내가 입맛을 다시자, 홍기도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주시한다.
“뭐하냐? 독심술이라도 쓰냐?”
“네.”
“그래서 뭐 좀 보이나?”
“보이네요.”
“뭐가?”
“말 안 할래요.”
갑자기?
“거기까지 말 했으면 그냥 해라. 뭘 또 이제와 비밀이냐?”
나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채근했다.
“제가 말해서 각성해버리면 결혼 바로 해버릴까봐?”
“그걸 바라고 말한 것 아니야?”
“아닌데요. 저는 형이랑 형수님이 아주 늦~~~읏게! 결혼하길 바라는데요.”
“굳이 늦~~~읏게 결혼하길 바라는건 또 뭐야. 아! 너 설마 쉬린칭에게 그런 조건을 달았냐? 나 결혼한 다음에 한다고?”
“네.”
“결혼이 장난이냐?”
“결혼이 꼭 진지해야해요?”
으음?
“진지해야하지 않아?”
“두사람만 행복하면 되지, 장난스럽든, 진지하든 그런 것은 상관 없잖아요.”
묘하게 맞는말 같아서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최대한 오래오래 연애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결혼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네.”
“진짜 이러시깁니까?”
“이러다가 진짜로 이러다가 너와 쉬린칭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답 없잖아?”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응. 지금 업무시간이고 나는 회사 대표지.”
내 말에 홍기도는 잠시 골똘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했다.
“……결혼해서 신혼집 어디에 차릴 거에요?”
“갑자기 그건 왜?”
“옆집으로 이사갈거에요.”
“어?”
“딱 붙어서 괴롭혀 줄거야.”
“너 중국 가는거 아니었냐?”
“아니거든요!”
중국이라는 말에 홍기도가 빼액했다.
“아니, 쉬린칭과 연애도 시작했으면서 왜 자꾸 중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빼액 하는 거야?”
“중국에는……. 쉬린칭 부모님이 계시니까요.”
“아!”
“그리고 일 진행되면 형도 저 도와주셔야해요.”
“뭘 도와줘?”
“쉬린칭 부모님 만나는 거요.”
“자,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거기까진…….”
“저랑 쉬린칭 잘못돼도 별 상관 없다 이거죠?”
헉! 이 영악한 놈이 이제는 쉬린칭을 무기로 쓰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잠깐…….”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지금 뭐하시는 건데요?”
“부사장님께 메시지 좀 보내려고.”
“왜요? 또 플랜 B 어쩌고 하려고요?”
“아니, 플랜 C.”
부사장님. 쉬린칭을 등에 업은 홍켓몬의 폭주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난데없이 카페에서 회사의 중대한(?) 리스크 관리 대책을 고민하게 생겼다.
“이자식, 기어코 쉬린칭을 무기로 삼는 구나.”
“흐헤헤, 방심하셨군. 제가 한 방 먹여준다고 했었죠?”
“너 이런걸로 한 방 먹일 생각아니었잖아.”
“아무거나 먹이기만 하면 되는 거죠.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래서 뭘 어쩌려고?”
“일단 저 달달한거 땡기네요. 녹차라떼 하나 부탁드려요.”
홍기도는 의자에서 거만한 포즈를 취하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나보고 하나 가져오라 이거지?
“그런데 내가 가져다주면 너 마실 수는 있겠냐?”
“하하하. 목 마르시죠. 제가 한잔 새로 주문해 올까요?”
역시 눈치는 빠르다.
플랜 D(death) 발동을 예감한 홍기도는 즉각 정신을 차렸다.
그래. 플랜은 C까지 선에서 정리하는 걸로 하자.
“형도 녹차라떼?”
“마시던 커피도 남았는데, 무슨 음료를 더 주문해. 까불지 말고 앉아.”
“넹.”
“그, 쉬린칭 아버님이 좀 독특하시다고?”
“네.”
“어떻게 독특하신데?”
애초에 조회장도 그렇지만, 홍기도의 아버님도 굉장한 분이시지 않았나?
나는 아직도 알약쌈에 트라우마가 남았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홍기도가 독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제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걸로도 설명이 부족한가요?”
아, 진짜로 좀 무섭네.
*
*
*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오늘은 안 그래도 좀 쉬려던 참이었어요.”
주말에도 출근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재택근무에 시달리던 연아였다.
마침 쉬려한다는 말을 들은 쉬린칭은 냉큼 연아를 불러냈다.
“막상 결혼은 좀 미뤄졌다고는 해도, 나름 준비는 하고 계신거죠? 어제도 부사장님께 공개했으니까요.”
“그렇죠.”
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데믹 시국이라서 의도치 않게 연기했을 뿐이지, 상황만 안정되면 당장이라도 식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에이, 그냥 같이 놀자고 부른거라니까요?”
“네네, 그래서 무슨 일?”
쉬린칭의 어설픈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연아는 이미 쉬린칭의 속내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도움이요?”
“네.”
쉬린칭의 눈빛이 달라졌다.
뭔가 애원하는 듯한 눈빛.
“미국에 가기 전에 한 가지 부탁 드릴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시죠?”
쉬린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연아의 표정 역시 살짝 굳어졌다.
“저희 아버지가 한국에 오신다고 해요.”
“설마 홍기도 과장님을 보기 위해?”
“네. 상당히 관심이 많으세요.”
“딸의 남자친구라면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지 않나요?”
“어머, 아셨어요?”
“뭘요?”
“저랑 기도. 사귀기로 한 것이요.”
쉬린칭의 말에 연아는 살짝 당황했다. 아니, 그럼 모를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이미 양성태의 집에서도 취기가 살짝 도는 상황에서 쉬린칭이 홍기도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게다가 대략 언제쯤 그들의 관계가 진전되었는지도 예상이 되는 상황.
“그건……. 그냥 제가 눈치가 빠른 것으로 해두죠.”
이 말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야기가 빠르네요. 아버지가 좀 독특한 분이셔서 걱정이 되요.”
“반대하실까 봐서요?”
“그런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쉬린칭은 말끝을 흐렸다.
“그냥 부탁드려요. 이런 일을 부탁할 사람이 연아씨와 표세인씨를 제외하고는 없으니까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는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연아는 쉬린칭에게 예전부터 돕겠다는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던가.
“좋아요. 저만 믿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 드릴게요.”
“정말로 감사해요. 그리고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네.”
“저희 아버지가……. 악의는 없는 사람이에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재벌가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