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미국에서 연락이 왔네요.”
홍기도가 아나에게서 받은 이메일을 내게 전달했다.
“역시 주요 후보작은 왕관의 게임과 스파이스 정도겠네요.”
미국지부가 검토한 결론은 판타지 명작과 SF 명작이 최종 후보였다.
“그럼 볼 것도 없이 왕관의 게임이겠네요.”
처음부터 염두해두고 있던 IP였기에 홍기도는 당연히 그것으로 낙점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 왕관의 게임 쪽에서 협상의 의지를 보이는 이상 나도 그렇게 결정하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진다.
그런데 뭔가…….
망설이게 된다.
뭐지?
“왜그러세요.”
내가 머뭇거리자, 홍기도가 질문했다.
“네 말대로 원래부터 왕관의 게임 IP를 노리고 있었으니, 계산 끝난 일이긴 한데……. 묘하게 망설여진다?”
“스파이스도 좋은 IP이긴 하죠.”
스파이스는 우주를 무대로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였다.
어떤 황량한 행성에서 출토되는 스파이스라는 자원을 두고 펼쳐지는 전략과 액션이 곁들여진 명작 SF 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
확실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기는커녕 둘중 무엇이든 상당한 반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대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찜찜했다.
“아무래도 부사장님과 논의를 해봐야겠어.”
그때였다.
-똑똑.
“계십니까?”
세상에,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양성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신기하네요.”
“그러게.”
“혹시 지금 영화 IP쪽 이야기 하고 계셨습니까?”
설마 이것까지 안다고?
내 방에 도청장치라도 달아놓은 건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생길 지경.
“맞습니다. 마침 안 그래도 부사장님과 이 건으로 논의하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잘됐군요. 하지만 우선 제 이야기부터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경청하겠습니다.”
양성태는 다소 난처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양성태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왕관의 게임 IP에 관련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알고 보니, 엠씨 소프트의 설동은 대표가 오래전부터 물밑 작업을 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국내 개발사들과도 협의가 진행중이라고 했었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콧대 높은 할리우드 제작사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우리쪽으로 선회하자, 설동은 대표가 크게 당황한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일반적으로 타 개발사의 사정까지 우리가 신경써줘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설동은은 내심이야 어떻든 우리에게 항상 양보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과거에는 나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려고 안달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양성태와 설동은의 관계가 걸린다.
“지난번 인디게임 개발때도 설동은 대표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만약 이번에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부사장님이 설동은 대표 앞에서 면이 서지 않으시겠군요.”
“제 체면 같은 것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보다는 앞으로 정부기관과의 허브를 설동은 대표와 함께 컨트롤하기로 했잖습니까. 게다가 엠씨 소프트는 이전부터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요.”
양성태는 정말로 자신의 체면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대표님께서 판단하시기에 왕관의 게임이라는 IP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저는 당장 설동은 대표를 달래야겠지요. 그래서 방문한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것보다는 우리 부사장님 체면이 더 중요합니다.”
양성태는 내부의 일처리에도 유능하지만 외부 인사들을 상대할 때도 빛이난다.
이런 인재를 키워내는 것은 쉽지 않고 이런 이들에게는 이름값 자체가 무기다.
양성태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딱히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이러면 양성태로서도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왕관의 게임은 엠씨 소프트에게 양보하기로 하지요. 어차피 스파이스도 충분히 훌륭한 IP니까요.”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정말로 제 체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성태는 못내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네. 게다가 한가지 이유가 더 생겼잖습니까?”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요?”
“마침 우리는 일론 머스크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스타링크를 이용할 계획이죠. 이 계획을 홍보하는데 있어서, 우주를 무대로한 게임은 더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오! 갑자기 생각한 것 치고는 그럴듯하네요.”
듣고 있던 홍기도가 감탄했다.
그래, 갑자기 양성태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게 보이더군.
스타링크와 SF 게임.
썩 좋은 궁합이라는 느낌이다.
“그러면 설동은 대표쪽은 부사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예. 제가 잘 구워삶도록 해보겠습니다.”
내 말에 양성태가 싱긋 웃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양성태는 설동은에게 왕관의 게임에 꽂힌 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자신이 무진 애를 썼다는 식으로 어필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상대에게 빚을 지워두어야 언제고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마침 우리가 한바탕 들어다 놓은 상황이니, 왕관의 게임 쪽도 엠씨 소프트의 제안을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결국 의도치 않게 도움을 준 꼴이지만, 어쨌든 도움을 주게 되었다면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확실히 이 부분에 우리의 도움이 있었음을 각인 시켜야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SF네요.”
“그래. 일단 SF 게임 개발 노하우가 있는 회사들 중에서 외주협력이 가능한 스튜디오를 알아보자.”
SF는 판타지와 더불어 게임 업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세계관이었다.
그런 만큼 이 분야에 개발 노하우를 지닌 회사들은 수두룩할 것이다.
게임의 세계관에 따라서 질감 텍스쳐 같은 부분에서도 차이가 나고 물리 엔진에도 생각지 못한 노하우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것들을 하나씩 부딪혀보는 취향이긴 하지만, 대표로서 그런 방식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노하우가 있는 개발사를 인수하거나 외주협약을 맺어서 단시간에 개발 속도와 퀄리티를 높이는 편이 좋다.
“네. 알겠습니다. 미국지부에도 도움을 요청해놓겠습니다.”
“그래.”
이제는 홍기도 녀석도 비서업무가 몸에 붙기 시작했는지 금세 내 의중을 파악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홍기도는 내 방 소파에 앉아서 노트북을 펼쳤다.
곧바로 내 지시를 수행하려는 모양이다.
무척 흐뭇한 광경이긴한데…….
“너 왜 여기서 노트북 펼치냐?”
“밖에 혼자있으면 외로우니까요. 대표님도 혼자 있는 것 보다는 저랑 있는 편이 낫잖아요?”
“……아니라고 하고 싶긴 한데, 또 틀린 말은 아니다보니 뭐라고 못하겠다.”
“손님 오면 재빨리 노트북 빼고 음료부터 내줘라.”
“제가 설마 그런 걸 못하겠어요?”
“그래. 알겠다.”
일단 일을 하겠다니까 건드리질 못하겠다.
애초에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닌 비서일을 떠맡긴 탓에 나는 요즘 이 녀석에게 묘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요즘에는 일하기 싫다고 땡깡부리거나 집에 일직 가겠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아서 좋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
“요즘에는 칼퇴하려고 꾀 같은 거 안 부리네?”
“집에 일찍 가서 뭐하나요. 쉬린칭도 한국에 없는데…….”
“그럼 예전에는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집에 가려고 했어?”
“여친 만들려고요.”
“…….”
뭔가 한 마디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냥 이 녀석이 일하겠다니까 건드리고 싶지가 않다.
대체 내가 왜 이 녀석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지 모르겠다.
“좋아. 그럼 나는 다시 스파이스 세계관 좀 훑어보기로 할까?”
거의 우리 아버지와 생일이 엇비슷한 옛날 소설이지만, 그 안의 참신한 설정들은 지금 세상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더군다나 스파이스를 둘러싼 우주 귀족들간의 첨예한 수 싸움 역시 일품이었다.
“행성단위 레벨이냐, 대륙 레벨이냐의 문제려나?”
우선 게임의 규모를 측정해야했다.
AAA급 게임을 개발하려는 만큼 오픈월드라는 것은 기본이지만, 우주를 무대로 한 소설 배경을 고려할 때, 행성 하나에 초점을 맞추느냐, 여러 행성을 총망라한 은하계에 초점을 맞추느냐가 게임의 전체 컨셉을 크게 좌우할 것이다.
“흐흐흐.”
“갑자기 왜 그렇게 이상하게 웃으세요?”
“간만에 개발 일을 하니까 즐거워서.”
“일이 즐거워요?”
“넌 안 즐겁냐? 여기 오고부터는 회사가 즐겁다면서?”
내 말에 홍기도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내가 틀렸어? 네가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잖아.”
“아니, 회사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즐겁다는 거지, 일이 즐거운 건 아니죠. 뭐 가끔은 그렇지만…….”
“그러냐? 막상 게임 개발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름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 아닌가?
“나는 즐거운데.”
“그거참 안타깝네요.”
“안타깝다니?”
“어차피 초반 부분만 끄적인 후에는 바로 개발팀에 토스하셔야 하잖아요. 대표가 개발 일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맞는 말인데…….
이 녀석이 맞는 말을 하니까 괜히 기분이 상한다.
“당분간 딱히 대표로서의 업무는 없지 않을까?”
“글쎄요. 저야 모르죠?”
홍기도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노트북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일하고 있으니 건드릴수도 없고, 이것참 답답하네.
“확실히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궁원에게 가시려고요?”
“……그래.”
이 녀석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무서울 정도다.
“그럼 함께 가야겠네요.”
“너는 왜?”
“저 비서니까요.”
“내가 자리를 비울때는 너라도 자리를 지켜야지.”
“대표님은 현재 물대표라 외부에서 직접 찾는 경우도 없잖아요.”
“그래도……”
“게다가 미국에서 연락올 수도 있으니, 제가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 있으세요?”
하! 이 자식이 영어로 나를 협박하다니!
“그래. 함께 가자.”
영어는 나도 어쩔수가 없다.
나름 공부한다고 하고는 있는데, 이게 그렇게 쉽게 극복이 가능한 문제였다면 이미 학창시절 때 회화 정도는 가능하게 됐겠지.
그렇게 우리는 남궁원을 찾아갔다.
*
*
*
“오랜만에 뵙네요.”
“부……. 아니, 대표님!”
함송희는 여느 때와 같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남궁원은 뚱한 표정이었다.
“너 왜 그러냐? 요새 힘들어?”
홍기도가 수행비서로 옮기고 얼마 후 남궁원은 새 개발팀의 기획팀장이 되었다.
“힘들긴요. 할 일 없어서 그렇죠.”
“할 일이 없다니, 스쿨런 유지보수 아직 한창 아니야?”
“그건 이미 유지보수팀에게 이관했어요. 솔직히 요즘 저 월급 도둑이에요.”
“바보야. 그건 절대로 본인 입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단어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라고 잡아 떼야지.”
홍기도가 남궁원에게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닥쳐! 내시 주제에!”
“내시라니! 너 쉬린칭한테 혼나고 싶냐!”
그래.
이게 그리웠다.
그렇게 오래전도 아닌데, 한동안 팀원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보니, 홍기도와 남궁원이 투닥거리는 것도 정겹게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로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냐?”
“아니, 그건 아니죠! 대표님은 저에게 영원한 팀장님……. 음……. 이 표현 괜찮은 거죠?”
대표에서 팀장으로 미친듯한 강등을 시켜버렸지만, 무슨 뜻인지는 아니까…….
“남궁팀장.”
“네.”
“우리 새로운 프로젝트 이야기 좀 하러 가볼까?”
“오오오!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실은 이미 왕관의 게임 IP를 활용할만한 엄청난 아이디어를 준비해 놓고 있었죠!”
남궁원이 자신의 타블렛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그리고 나는 홍기도와 자연스럽게 눈빛을 교차했다.
‘이거 욕 좀 먹겠네.’
‘네, 저거 또 난리 나겠네요.’
나와 홍기도는 살짝 긴장했다.
일이 술술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