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다시 보니 반갑군.”
문상훈이 내 방을 방문했다.
“한국에 돌아오시니 어떻습니까?”
“정신없지. 이제 더는 미국에서 지낼 일도 없으니, 아파트 임대 계약을 해지하고 이곳에 다시 집을 알아보느라고 정신이 없어.”
드디어 미국센터장을 소일연에게 넘기고 온전히 본사 상무로 자리매김한 문상훈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느라고 상당히 분주한 나날을 보낸 모양이다.
“텍사스는 어땠나?”
“아주 재미있는 곳이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말도 타봤고요.”
모두의 반대로 로데오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름 자신있었는데…….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바나나보트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가떨어졌는데도 나 혼자 살아남아서 모터보트 운전자를 당황시키는 경험.
뭐든 메달리는 것에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는 편이라서 나는 로데오에도 살짝 자신이 있었다.
8초만 버티면 된다던데,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제임스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할 정도로 끌리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보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지.”
“무슨?”
“회장님께서 은퇴하신 후에, 기둥소프트에 입사를 하신다는…….”
“하하하. 맞습니다.”
“정말로?”
“뭐, 정식 입사라기 보다는 그냥 내부팀을 하나 꾸려서 소소하게 개발에 전념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제안드린 거고요.”
“제임스는 툴툴거리던데.”
“제임스야 뭐…….”
기둥소프트의 대소사는 제임스가 담당하고 있는 덕분에 조회장과 그의 팀원들을 고용하는 문제로 제임스는 살짝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조회장이 누구를 데려오든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기 때문에 미안할 뿐이다.
“그래. 뭐 좋은 거지. 갑자기 은퇴해서 집에 갇혀 지내면 빠르게 늙는다던데, 그렇게 정력을 유지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지.”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진짜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
“예. 1세대 개발자 아닙니까. 요즘 달라진 트랜드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멋진 게임을 만들어줄 것을요.”
회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에서 해방된 원로 개발자는 과연 어떤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조회장의 역량을 믿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양위가 시작되겠군.”
“양위라 거창하네요.”
“부사장님도 열심히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양이던데, 어차피 곧 아닌가? 이제 스타링크와의 협업도 발표될 테고 클라우드 서비스도 외부에 공표돼야지.”
“맞습니다.”
딱히 발표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미국지부의 주가가 술렁이고 있다.
발 빠른 외국인 투자자 일부가 용케도 이 부분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인지, 클라우드 서비스를 진행하는 미국 지부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추세라면 정식 발표 후에는 맥베스 본사 주가도 덩달아 춤추기 시작할 것이다.
이래저래 앞으로 바빠질 일만 남았다.
“그럼 이제부터 나는 신작 게임 개발을 도우면 되겠지?”
“예.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장 삼인방을 통솔해서 개발을 이끌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스파이스라 이거지……. 세상에 어릴 적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소설을 게임으로 만들게 되다니.”
“문상무님도 스파이스를 좋아하셨군요.”
“나 어릴 적에는 SF 소설이 대세였어.”
“그렇습니까?”
“그럼. 그럼. 게다가 캘리포니아로 이민간 작은 꼬마에게는 책 말고는 딱히 즐길 거리가 없었거든.”
“작은 꼬마요?”
문상훈은 나 정도는 아니더라도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
그런데 작은 꼬마라니?
“내가 어릴 적에는 작았거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부쩍 키가 자라더군.”
“그러셨군요. 저는 어려서부터 큰 편이었거든요.”
“그래 보여.”
“그보다 캘리포니아? 미국에서 성장하셨습니까?”
“대학까지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왔지.”
“어쩐지 미국에 익숙하다 싶었습니다.”
나는 그가 미국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몰랐다.
“어쩐지……. 금수저 타입이셨군요?”
“웬걸, 우리 부모님은 그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시면서 근근이 내 뒷바라지를 해주셨어. 금수저라니, 당치도 않아.”
“그렇군요.”
“뭐 내 과거사야 중요치 않은 일이고, 어쨌든 회장님의 은퇴라……. 이렇게 한 시대가 저무는군.”
“그러게요. 벌써부터 쓸쓸한 기분입니다.”
“조만간 부사장과도 한잔해야겠어.”
“좋은 아이디어네요.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확실히 우리 보다는 오랫동안 조회장님을 곁에서 직접 모셔온 양성태가 느끼는 공허함이 훨씬 클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문상훈도 은근히 사람들 챙기는 법을 안다.
“당연히 술은 윗사람이 사는 법이지.”
문상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
*
*
차기작 개발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이미 오행전기 때, 전사차원 프로젝트를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파트를 새로 분할하여 모두가 한가지 프로젝트에 집중하도록 조율하는 것에는 이미 노하우가 생긴 상황.
그렇게 하염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에 드디어 조회장의 은퇴 날이 다가왔다.
“긴장되십니까?”
“긴장은 무슨…….”
“그런데 뭘 그렇게 계속 적고 계십니까? 퇴임사치고는 너무 긴 거 아닌가요?”
노트를 벌써 몇 장이나 넘기며 끄적이는 조회장을 보며 나는 살짝 긴장했다.
뭐든 너무 긴 연설은 좋지 않은 법이다.
“이건 그냥 아이디어 노트야. 내일부터는 곧장 기둥소프트로 출근해야 할 것 아니냐.”
“……뭐 같은 건물이지만요.”
기둥소프트는 현재 맥베스 본사 빌딩의 7층을 통째로 임대한 상황이었다.
내가 본사에서 움직일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
“회장실 엘리베이터를 7층도 거쳐 갈 수 있도록 지시해두었다. 나는 당분간 지하주차장에서 7층으로만 오가야지.”
“다른 직원들 보기 부끄러워서요?”
“내가 왜 부끄러워?”
“회장에서 일반 사원이 된 셈이니까?”
“클클클, 그런 거야 아무렴 어때. 그보다는 다른 직원들이 불편할 수 있으니, 신경쓰는 거지.”
어차피 7층에 방문할 사람은 없으니, 지하주차장에서 회장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면 정말로 다른 이들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팀 구성은 잘 되어가고 있으세요?”
“뭐 그럭저럭. 그보다 제임스 녀석에게 눈칫밥 먹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 속이 쓰리구먼.”
“제임스가 눈치를 줘요?”
“네가 한 결정이니 대놓고 뭐라고는 하지 않지만, 나 같은 늙다리를 고용해서 일을 벌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내더군.”
“하하하. 이 기회에 조금 더 친해져 보는 거죠.”
“어떻게?”
“그냥 부대끼고 지내다 보면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그 찬 바람 쌩쌩 부는 녀석과 붙어 지내면 더욱 관계가 얼어붙을 것 같은데?”
“그건 그냥 타고난 성격이잖습니까. 누가 미워서 그러는 것은 아닌 것 아시잖아요.”
“흥.”
조회장은 꼴 보기 싫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됐어요?”
마침 연아가 조회장을 찾았다.
“그래. 다 준비됐다. 고작 늙은이가 은퇴한다는데, 뭘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조회장은 짧게 혀를 차며 대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원들이 앉아 있는 대회의실의 연단 위에 올라섰다.
조회장이 등장하자 사원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조회장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일어설 것 없습니다. 앉으세요.”
그 말에 모두가 자리에 착석했다.
나와 연아는 연단 뒤에 비치된 임원석에 자리했다.
“오셨습니까.”
그곳에 미리 앉아 있던 양성태와 문상훈이 가볍게 고개 숙여 우리를 맞이했다.
“으흠.”
조회장은 마이크 높이를 맞추며 목을 가다듬었다.
“딱히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고, 모두 바쁘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조회장은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한 번도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내 능력이나 실력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학 시절 취미 삼아 개발한 인터넷 바둑과 포커, 고스톱 같은 것이 우연히 투자자들의 눈에 들어서 회사를 차리게 되었고 PC게임 시장이 활성화되며 거기에 자연스럽게 편승했지요.”
세상에 모든 기업가들 중에서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저렇게까지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도 참 조회장 답다는 느낌이었다.
“이후 모바일 시장이 대두되며 거기에 사활을 건 것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창업 공신들의 혜안 덕분입니다. 나는 그런 안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요.”
막힘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조회장은 이 자리에 없는 이라는 단어를 꺼내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함전무와 이상무와 같이 오랫동안 함께해온 동반자들도 모두 회사를 떠난 상황.
잠시 감정이 복받치는 것도 당연하리라.
“하지만 결국 오랜 시간 게임 업계에 있다보니 한가지 눈에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대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맥베스와 경쟁했던 회사 중에 현재까지 살아남은 회사, 몇 없습니다. 모두 이 점을 자각하시고 만약 문제를 포착했다면 기탄없이 의견을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출세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출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회사 임원진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출세라는 말에 몇몇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지금 이렇게 맥베스에서 물러나는 이 시점에도 나는 운이 좋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어갈 인재들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능하고 훌륭합니다.”
조회장은 잠시 등을 돌려 뒤에 있던 나와 연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맥베스에 근무하는 여러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딱히 회사에 충성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펼칠 발판으로 삼으세요. 지금의 맥베스는 충분히 여러분의 역량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건실한 회사입니다.”
“짧게 한다고 했는데 말이 길었군. 어쨌든 게임을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본인의 업을 즐기는 이들이 성공하는 법입니다.”
“제가 운이 좋다고 말했지요? 저는 즐거웠습니다. 그게 그나마 제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모쪼록 즐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겁지 않다면……. 그건 역시 이제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겠지요. 그럼 모두 바쁘실 테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맡은 직무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무척 조회장 다운 퇴임사였다.
-짝짝짝짝!
조회장이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꽃다발 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차피 버릴 것 뭐하러 준비하나?”
양성태의 말에 조회장, 아니 조양길은 피식 웃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너희는 가서 일들 봐. 부사장과 함께 가겠다.”
어쩐지 조양길과 양성태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한걸음 물러나 떠나가는 조양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우리 힘으로 헤쳐나가야겠네.”
“그렇지.”
차마 보는 눈들이 많아서 손을 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연아는 조양길과 양성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도카니 제자리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준비는 끝났나?”
“예.”
“다들 녀석들은 도착해 있고?”
“예. 모두 7층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양길과 양성태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기둥소프트가 임대한 7층이었다.
“오셨습니까?”
“왔나?”
그리고 그곳에는 조양길을 기다리던 그의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뭘 이렇게 오래 걸렸어? 굳이 할 말이 뭐가 있다고?”
“그렇게 안 길었어.”
조회장은 자신을 기다리던 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씩 미소지었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볼까? 애송이들에게 연륜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차례야.”
“오늘이 퇴임식인데, 한잔 안 하고?”
“우리 나이가 몇인데 술이야. 술은 각자 집에 가서 마셔. 아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가급적 마시지 마. 당분간 체력관리 신경 쓰라고, 매일 같이 야근과 철야가 이어질 테니까.”
“아이고, 이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인지. 내가 미쳤지.”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허.”
팀원들의 엄살에 조양길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이 늙다리들을 이끌고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게임을 개발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게임 개발은 체력싸움이나 다름 없다. 나이라는 것은 분명 상당한 패널티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슴 속에 작은 불씨가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이제와 산전수전 다겪은 역전의 노장들에게 쉬운 도전 따위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표세인이에게 한 방 먹이고 싶지 않나?”
“그거라면 발 뺄 수 없지.”
“그럼요. 그럼요.”
모두 한마음 한뜻.
“한번 해보자고.”
-띠링!
[용사(초고령)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평균 연령 63세.
마왕 타도를 목표로 한 초고령 용사파티가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술상무 대신 셔틀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