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75화 (275/346)

275.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내 말에 연아는 호텔 라운지의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혼자있고 싶어할 것 같아서…….”

연아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조양길의 퇴임으로 이제 곧 연아는 그토록 갈구하던 회장 자리를 손에 넣을 것이다.

하지만 목표의식이 뚜렷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목표가 달성된 이후 벌어질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거다.

그녀의 취임이 바로 아버지의 은퇴를 의미한다는 것.

이것은 연아가 생각이 짧았다기 보다는 언제나 아래에서 올려다 보기만 했기 때문에 벌어질 수 밖에 없던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조양길이 이렇게나 빨리 은퇴를 결심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부사장님의 승진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부터 이런 일을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그러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래.”

실장에서 부사장으로 단번에 수직으로 상승했을 때,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저 양성태 정도 되는 인물이니 그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어차피 회장의 총애를 받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시점에는 인디 게임 개발도 훌륭하게 완수해낸 상태라서 누구도 그의 승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 잘못이 아닐까 싶네.”

“오빠 잘못?”

“조금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회장님의 빠른 은퇴에는 내 영향도 있지 않을까?”

“왜 아니겠어?”

연아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왕위를 계승하고자 독기 품은 후계자의 지분이 가장 크겠지.”

“……지금은 그런 말 하지마.”

“자기도 해놓고선.”

“아빠 많이 쓸쓸할까? 혼자 두는 것은 실수일까?”

연아는 머리가 많이 복잡해 보였다.

“일단 뭐가 되었든 들어가자. 나는 개인적으로 회장님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아, 이제 회장님이 아니구나.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장인어른이라 불러야하려나?

“그래. 그게 맞겠지. 들어가자.”

나와 연아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없어? 집으로 안오고 어딜 간거지?”

“혹시 부사장님과 따로 회포라도 풀고 계신 것 아닌가?”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밥 먹고 갈테니, 신경쓰지 말고 먼저 먹어라.

“으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걱정인데, 부사장님께 연락 해봐.”

“알겠어.”

나는 양성태에게 전화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회장님, 아니 장인어른과 함께 계십니까?”

-……장인어른이라 부르는 것을 직접들으니, 뭔가 파괴력이 있군요.

“뭐 아직은 예비 딱지를 붙여야겠지만요.”

나조차 아직도 장인어른이라는 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예전에 몇 번 그 단어를 입에 올릴때마다 나와 조양길은 서로 부끄러워 했었지 않나?

-일단 저와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혹시 집에 들어가지 않으셔서 걱정하시는 겁니까?

“네. 집에 왔더니 안 계셔서요. 혹시라도 혼자 계실까 봐 걱정돼서요.”

-일단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혼자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 지인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계셨습니까?

“퇴임식 이후 바로 헤어졌잖습니까? 제가 알 수가 없잖아요?”

-그거……. 참 이상하군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저는 당연히 대표님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고요?”

-예. 지금 회장님께서는 다름 아닌 기둥소프트 사무실에 계시니까요.

“기둥소프트? 그럼 7층에 계시다고요?”

-네. 그리고 함께 계신 분들도 대표님께서 허락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듣자 하니, 조양길은 현재 자신의 팀원들과 7층에 모여있는 모양이다.

“그 부분은……. 장인어른께서 본인 스스로 팀을 꾸릴 수 있는 재량권을 달라고 하셔서 그러시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그럼 그곳에 계신 분들의 인적사항은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네. 모릅니다.”

-그러면 조금 놀라시게 될 것 같군요.

놀란다고? 대체 누굴 끌어들인거지?

-어쨌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회장님은……. 그렇군요. 이제는 저도 회장님의 새로운 호칭을 찾아야겠군요. 기둥소프트에서 회장님은 어떤 직급을 맡게 되시는 겁니까?

“본인께서 원하시는 직급을 맡게 되시겠죠? 명예회장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거라면 저도 좀 편하겠군요. 막상 뭐라고 불러야 하나 난처했는데, 말이지요. 어쨌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회장님은 의기소침해하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욕이 넘치시더군요.

“그런가요?”

그러면 참으로 다행이다. 내 가벼운 아이디어가 조양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면 나도 한시름 놓은 셈이다.

-다소 걱정되는 캐치프라이즈를 연신 외치시는 것이 우려스럽습니다만…….

“걱정되는 캐치프라이즈?”

-팀원들과 연신 타도 표세인이라고 외치며 의욕을 고취하시더군요.

장인어른…….

대체 사위를 타도해서 어쩌시려고요.

다른 의미의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

*

*

“그런데 불러서 오기는 했다만 정말로 표세인이가 나까지 고용해주는 것 맞아?”

전 맥슨 회장인 백용현이 찜찜한 얼굴로 조양길을 바라보았다.

“팀원 구성은 내게 일임했어.”

“잠깐, 그 말은 아직 우리들에 대해 모른다는 것 아니야?”

“하하하. 형님. 표대표는 그릇이 큽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신경도 안쓸겁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만들 결과물에만 관심을 갖겠지요.”

함성준과 이걸영이 맞장구를 쳤다.

“아니, 니들이야 처음부터 한솥밥 먹던 식구니까 그렇지만, 나는 적대관계였잖나.”

“풋, 적은 무슨……. 혼자 북치고 장구치다가 한방에 무너져놓고선…….”

“하, 한방은 아니지!”

백용현이 억울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조양길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소한 일에 정신 팔릴 여유 없으니 다들 긴장하라고……. 이거 진검 승부야. 우리 같은 퇴물들에게 그리 많은 기회가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첫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야해.”

“그럼요. 시작부터 결과가 형편없으면 창피해서라도 도망쳐야죠.”

“맞습니다. 우리가 젊음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조양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불태웠다.

“……저 그런데…….”

“왜?”

“저는 여기에 왜 있는 겁니까?”

엠씨 소프트의 대표 설동은은 대체 자신이 왜 이곳에 불려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조양길의 퇴임식이라는 말을 듣고 왔다가 느닷없이 이곳으로 끌려와버렸다.

“자네는 객원 멤버 같은 거지.”

“객원 멤버요?”

“자네도 표세인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하하, 뭐 그거야…….”

표면적으로 손을 잡고 있고 딱히 나쁜 관계도 아니지만, 어쨌든 경쟁사 대표다.

근래 시작된 맥베스의 독주체제, 그 원동력인 표세인에게 경쟁심이 없을 수는 없다.

“엠씨소프트도 요즘 체질 개선에 힘을 쏟고 있지?”

“예. 맥슨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따지고 보면 표세인이가 난놈은 난 놈이지.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섣불리 도전하지 못한 AAA급 시장 공략이 그 녀석 덕분에 갑작스럽게 시작된 셈이니까.”

근래 엠씨소프트와 맥슨은 맥베스의 행보를 쫓아 새로운 AAA급 프로젝트를 연거푸 발표하고 있었다.

더 이상 포화상태인 모바일 시장만을 고집해도 방법이 없다.

IT업계에서 트랜드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도태를 의미 한다.

이미 표세인은 국내 게임업계에 태풍의 눈이 되어 의도치 않게 업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서버렸다.

“그래서 계획은 있나?”

“지금부터 논의해봐야지.”

“아니 아무 생각 없이 우리를 불러 모은 거야?”

“꿔다놓은 보릿자루 처지를 바라나?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길 바랄 줄 알았는데? 각자 그간 직책 때문에 섣불리 꺼내지 못한 아이디어들 있지 않은가?”

“그거야 많지.”

“그렇죠. 셀 수도 없을 지경이죠.”

워낙 직급들이 직급들인지라, 여러 리스크와 여건을 고려해 머릿속에만 묻어두고 있던 아이디어들이 산더미였다.

뭐든 한 분야에서 10년 정도가 지나면 달인이 되기 마련인데, 이들은 10년 정도가 아니라 20년 넘는 내공을 지닌 이들이 아닌가?

“그래. 그럼 한번 패를 맞춰보자고.”

“그런데 일단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쩍 살이 오른 이걸영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 떨어지면 큰일이니, 배는 채워야지.”

“그럼 일단 나가서 배를 채우고…….”

“나가긴 어딜 나가! 소싯적 기억 안 나?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때워가며 일해야지. 우리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니까?”

“그래도 이 나이에 편의점 음식은 속에 안 좋아. 근처 수제 도시락이라도 있으면 주문하자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모두 음식도 가려먹어야 할 처지.

“그, 그럼 제가 주문하겠습니다.”

설동은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놀랍게도 이 중에서는 그가 가장 젊었다. 막내라 하기에도 뭣한 10살 이상의 나이차…….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메뉴를 주문했다.

‘뭔가 셔틀하라고 끌려온 느낌인데…….’

설동은은 무척 난감한 심정이었다.

*

*

*

“응?”

“음…….”

배달 도시락을 수령하고자 로비로 내려온 설동은은 뜻하지 않은 인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설대표님?”

“문상무님. 오랜만입니다.”

“왜 이곳에……. 아니 그보다 손에 든 것은 뭡니까?”

문상훈의 말에 설동은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도시락이 든 봉투를 등뒤로 숨겼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데요? 대체 무슨 도시락이 그렇게 많습니까? 어디 위로차 방문이라도 하셨습니까? 그리고 설대표님 쯤 되시는 분이 도시락은 좀…….”

“……그런 것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들기엔 좀 많아 보이니, 하나는 제가 들어드리죠.”

“지금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네? 예. 안됩니까?”

문상훈은 설동은이 양손으로 나눠 들고 있는 봉투 하나를 손에 들었다.

“안되지는 않은데…….”

후회할 텐데?

하지만 설동은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뭐야? 넌 여기 왜 왔어?”

“허!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설동은을 쫓아 7층에 방문한 문상훈은 그곳에 모인 면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선 식사들 하시지요.”

설동은은 테이블에 도시락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 다들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뭘하긴 일하지. 지금 야근 준비하는 것 안보이나?”

“아니, 다른 분들은 그렇다치고 백회장님은 대체 왜…….”

“나 이제 회장 아니야. 기둥소프트 직원이지. 맞지? 나 직원이지?”

“맞다니까 그러네.”

천하의 맥슨 회장이 기둥소프트 직원이라니…….

문상훈은 저도 모르게 슬쩍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그러보고니 음료가 없군. 설동은이…….”

“……제가 문상무 보다는 연상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문상훈이 음료 좀 부탁하네.”

“으, 음료요?”

“뭐야? 그 반응은? 우리가 자네에게 음료도 부탁 못하나?”

“그럼 이 나이에 내가 가리?”

당황해서 반문한 것뿐인데, 무시무시한 도끼눈 세례가 날아들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떤 음료를 원하시는지…….”

문상훈은 이제야 자신이 돕겠다고 했을 때의 미묘했던 설동은의 반응을 깨달았다.

‘비겁하십니다.’

‘미안한데 나도 이 나이에 셔틀 노릇은 좀…….’

설동은은 문상훈의 원망 어린 시선을 슬쩍 회피했다.

일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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