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문상훈은 죽을 맛이었다.
-조양길 : 오는 길에 주전부리 좀 부탁한다.
-백용현 : 경비실에 신문이 와있을 거야. 그것 좀 부탁하지.
-함성준 : 일단 올라와봐. 뭔가 시킬게 생길 거 같으니까.
진짜 마지막 함성준의 메시지는 기가 차다.
만약 다른 상황이라면 문상훈 성격에 상무를 물로 보냐며 버럭하겠지만, 하필 저 마굴에 똬리를 튼 괴물들은 정말로 물상무 쯤은 셔틀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는 인물들이다.
-이걸영 : 어차피 물상무라 할 일도 없잖아? 빨리 와야지 뭐 하는 거야. 나 당 떨어진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임자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솔직히 좀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문상훈은 성실하게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들을 쓸어 담았다.
“뭐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오지랖 넓은 편의점 사장이 문상훈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낯선 사람에게 걱정을 받을 정도로 자신의 표정이 구겨져 있었단 말인가?
문상훈은 슬며시 창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어릴적 셔틀 노릇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대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원흉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
*
*
“좋은 아……. 아이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렇지? 딱 봐도 무슨 일 있어보이지?”
문상훈은 자리에 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급히 홍기도에게 손짓했고, 홍기도는 냉큼 문상훈에게 물 한잔을 내주었다.
“무슨 일이 십니까?”
지금까지 전투모드에 들어간 문상훈이 얼굴을 구기고 다니는 것은 본적 있지만, 이렇게 지친 모습은 처음이다.
“일단 이것 좀 보지.”
-아니! 햄버거가 없잖아!
-간식에 냉동식품 하나도 없어! 맥베스 상무 수준이 이것밖에 안돼?
-음료가 죄다 커피류잖아! 우리 나이에 커피 이렇게 마시면 큰일 나는 것 알아 몰라!
실시간으로 메시지가 속속 날아들었다. 그런데 내용이 뭔가 이상하다.
“이게 뭔가요? 어디 노인정에 봉사활동이라도 다니십니까?”
“노인정 같은 귀여운 곳이라면 내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지.”
“?”
“자네가 만든 마굴에 내가 휘둘리고 있다는 거야.”
“마굴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7층에 있는 기둥 소프트 사무실! 거기에 똬리를 튼 늙은 요괴들!”
“아!”
그제서야 나는 문상훈의 말을 이해했다.
“내가 술상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셔틀상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 이거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할거냐고!”
와, 이거 진짜다.
순도 100% 분노랄까? 빨리 달래지 않으면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다.
“하하하. 정말 죄송합니다. 이게 불똥이 상무님께 튈줄은 몰랐네요.”
“인간적으로 최하급자가 전 상무출신이라는 것이 말이 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나이트메어 팀을 조직한거야?”
같은 드림인데 참 느낌 다르다.
“그래도 의외네요.”
“뭐가 의외야?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었지? 미국으로 막 이민갔을 때, 체구가 작아서 괴롭힘 당했었다고!”
“괴롭힘까지는 듣지 못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셨다고…….”
“왜 책만 봤겠냐고!”
“어쨌든 부사장님이 아닌 상무님을 찾으시는 것이 의외네요. 내심 상무님이 편하신 것 같습니다. 예쁨 받는 타입이시네요.”
“이런 예쁨은 바라지 않아.”
문상훈은 입술을 툭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해결해야겠네요.”
“어떻게 해결할건데?”
“딱 보니까 심부름꾼이 필요하신 모양이네요. 그정도는 해결해드려야죠.”
나름 최고급(?) 인재들이 아닌가? 그들의 원활한 업무 환경 조성을 위해서라도 이런 분야에 특급 인재를 붙여줘야지.
“저만 믿으십시오. 바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흠, 흠. 표대표만 믿겠어. 정말로 이건 아니야.”
상무 명함 달고서 심부름 셔틀이라니……. 확실히 침울할만한 이야기다.
나는 문상훈이 떠나자 곧장 사내메신져를 통해 누군가를 호출했다.
-똑똑.
“계십니까?”
“내가 불렀는데, 그럼 안 계시겠냐?”
내가 부른 것은 바로 동생몬이었다.
“갑자기 왜 불렀어? 와, 대표방은 끝내주는 구나.”
세종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세종이를 그쪽에 붙이시게요?”
“응. 일단 프로그램팀 막내고 배울게 많겠지.”
나는 홍기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에요?”
“너희 형이 너 마굴로 보낸데.”
“오오오! 뭔가 특훈 같은 건가? 나 그런거 좋아하는데.”
특훈은 특훈이지.
“그럼 뭘하면 되는데.”
“간단해 그냥 운동부 막내 시절처럼 하면 돼.”
“소리지르라고?”
대체 니네 부는 어떤 문화를 가진거냐.
“그게 아니라 빠릿빠릿하게 선배님들 수발들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라고.”
“아, 내가 또 그런거 잘하지.”
운동선수 출신이 선배님들 수발 드는 일을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우리처럼 배경 없이 그냥 몸뚱이 하나만 믿고 운동하는 녀석들은 특히 더 그렇다.
“이거 법인카드다.”
“누구 전해주면 되는데?”
“네가 가지고 있다가 선배들이 심부름시키면 그걸 사용해. 네 돈 쓰지 말고.”
“오오! 드디어 나도 법카를 손에 넣었군!”
“그걸로 허튼데 쓸 생각하지 마라.”
“훗, 나를 뭘로 보고.”
어차피 이 녀석이 추가 되었으니, 저쪽 간식비는 껑충 뛰겠지.
그건 이 녀석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아무튼 잘 보고 배워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꿈 같은 기회다.”
“그런 꿈 같은 기회를 왜 내게 주는데?”
……다른 신입들을 너처럼 막 굴릴 수는 없으니까.
좋은 배움의 기회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노익장들의 틈바구니에서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장점과 단점이 반반씩 섞인 기회랄까?
“그런데 선배님이 누군데?”
“너 회장님 알지?”
“응.”
“이제부터 회장님이 네 선배님이시다.”
“?”
동생몬은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임원들 특유의 선문답 같은 건가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데요.”
“이해하지 말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홍기도가 세종이에게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그럼 가자.”
“어딜?”
“7층.”
이른바 마굴이라 불리는 장소로 우리 세사람은 이동했다.
*
*
*
“지금 때가 어느땐데 루아를 들먹여!”
“퀘스트는 루아로 짜는게 국룰이야!”
“그게 어느나라 룰이냐!”
7층 사무실에 다가가기 무섭게 내부의 시끌시끌한 다툼이 들려왔다.
“어? 표대표!”
이걸영은 의자를 반쯤 젖히고 느긋하게 앉아 조양길과 백용현의 다툼을 구경하고 있었다.
“먹을래?”
이걸영은 먹고 있던 초코과자를 내밀었다. 내가 사양하려는데, 홍기도와 세종이가 넙죽 나를 밀치고 나섰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기도는 손에 한움큼 과자를 덜어냈고 세종이가 남은 과자를 포장째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다, 다먹으면 어떻게해?”
이걸영은 당황했다.
아니, 근데 요즘 정말로 너무 후덕해지시는데?
“과자는 좀 줄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네가 내 마누라냐?”
“그건 아니긴하죠.”
하기사 남이 군것질하고 싶다는데, 거기에 참견할 필요는 없지.
“그런데 무슨 일로 저렇게 다투시는 거에요?”
조양길과 백용현은 내가 온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코딩 언어를 뭘로 할건지를 두고 저러고 있어.”
“루아요?”
“그래. 요즘 루아 잘 안쓰지만, 우리에게는 편하니까.”
함성준도 옆에서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다들 왜이렇게 주전부리를 찾으세요? 원래 이정도는 아니셨잖아요.”
“다 저녀석 때문이지. 이러다 다들 굴러다니겠어.”
“우리 나이에는 마른 것보다 찌는 편이 낫지요.”
이걸영이 자신의 두툼한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보다 어쩐일이야? 저쪽은 당분간 정신 못차릴 테니까 용건있으면 우리에게 말해.”
함성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종이게에 손짓했다.
“안녕하십니까! 표세종입니다!”
아이쿠, 운동부 시절 막내처럼 하랬더니, 목청껏 고함을 지를 줄이야.
이 녀석의 단순무식함을 내가 과소 평가했다.
“뭐, 뭐야?”
“표세인이가 왔구만.”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조양길과 백용현도 우리가 방문한 것을 깨닫고 다가왔다.
“흠흠, 표대표…….”
백용현은 과거의 일 때문에 나와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지난번에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가 먼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뭐가 어찌되었건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게다가 이제는 한솥밥을 먹게 된 사이.
아버지뻘인 백용현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내가 먼저 깍듯하게 대우하여 그와의 앙금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
“아, 아니 나도 뭐 전에는 미안했네.”
백용현이 머쓱하게 말했다. 그러자 조양길이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거봐, 걱정할 것 없다고 했잖아.”
“누, 누가 걱정했다는 거야.”
“그런데 어쩐 일이냐. 세종이는 왜 온거야?”
조양길의 질문에 세종이가 또 한 번 고함을 지르려고 숨을 들이 마시는 찰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세종이의 목을 툭 쳤다.
“켁!”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아직 조율이 덜돼서.”
“조율? 무슨 악기야?”
“악기보다 훨씬 더 섬세한 조율이 필요해서 문제랄까요?하지만 망가지지는 않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별건 아니고 간단한 인력 충원입니다.”
내 말에 조양길이 팔짱을 끼고 슬쩍 세종이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팀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정식 팀원으로 받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심부름 담당도 필요하실 테니, 겸사겸사 옆에 두고 잘 좀 가르쳐 주십시오.”
“굳이 네 동생을 붙이려는 것이 찜찜한데 이거 감시자아니야?”
조회장의 말에 마굴팀 전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와, 확실히 멤버가 워낙 쟁쟁한 덕분에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나조차 잠깐만 방심해도 이들 앞에서는 어리바리하게 끌려다닐 것 같다.
“감시 같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럼 굳이 왜 인력 충원을 해주겠다는 거지? 요청한 적도 없는데?”
“듣자하니 문상무가…….”
“허! 그놈이 고자질을 했어?”
“이 자식 이거 안 되겠네.”
“보자보자하니까, 표대표를 끌어들여?”
자, 잠깐만요. 여러분!
여러분은 일진 놀이 같은 것 하실 짬이 아니시잖아요.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나는 당황했다.
함참 열띈 분노와 함께 단체채팅방에서 문상무를 퇴출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끝나고서야 겨우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문상훈이 괜히 이곳을 마굴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곳은 마굴이 맞다.
아무래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 수발들라고 붙인 인력이라 이거지?”
“단순히 수발만 드는 것은 아니죠.”
“그럼?”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기계신 분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잖습니까.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들인데, 그런 분들 곁에서 지켜보면 배울점이 많이 있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번 인디게임때 세종이와는 함께 일해보셨으니, 좀 더 편할 것 아닙니까?”
내가 세종이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대체 어떤 신입을 여기에 붙여놓으면 퇴사하지 않을까?
결론은 세종이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클클, 그래. 잘 부탁한다. 앞으로 나를 팀장이라고 불러라.”
“네. 조팀장님!”
사돈어르신에서 회장으로 그리고 이제는 팀장으로…….
그렇게 세종이와 조양길의 관계는 참으로 변화무쌍한 진화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문상무는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괴롭혀?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 적응 못할까 봐 챙겨주려고 했던 거야!”
그거, 전학생 괴롭히는 일진들의 단골멘트 같은 거 아닙니까?
마왕은 침을 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