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아버지는 어때?”
회장실에 도착하니, 연아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연아는 회장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회장 조연아라고 적인 고풍스러운 명패를 보니 내 스스로가 뿌듯할 정도였다.
“장인어른이야 뭐 재미있게 잘 지내시고 계셔.”
나는 명패를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잘 지내서 문제가 아닌가?
가엾은 문상훈이 셔틀 노릇으로 치를 떠는 작은 헤프닝이 있었지만, 만렙 괴수들이 모였는데 이정도 헤프닝은 귀여운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회장 조연아라…….”
“왜? 이상해?”
“아니. 너무 잘 어울려. 멋져. 내가 대기업 회장님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네.”
“어떻게 보면 전부 오빠 덕분이지.”
“내 덕분이라니? 네가 노력한 결과잖아?”
아버지의 회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아오지 않았던가?
일부 재벌집 자제들이 특권 의식에 빠져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에 비교하면 연아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아빠 눈에는 아직 내가 완전히 미덥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오빠 덕분에 자신이 회사에 없어도 문제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솔직히 나는 한 몇 년 더 지난 다음일거라고 생각했어.”
“사실 장인어른이 이렇게 빨리 은퇴할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맞아.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네.”
심경의 변화라…….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도전한 새로운 방식들을 지켜보면서 세대차이를 실감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뭣보다 개발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게 된 것이 아닐까?”
“하긴 아빠는 사실 경영자보다 개발자에 어울리는 타입이긴 하지.”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연륜의 깊이가 더해진 그의 혜안은 때때로 놀라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기뻐 보일 때는 홍기도 팀과 함께 인디게임을 개발할 때였다.
그래서 나도 기둥소프트에서 개발자로 활동해 볼 것을 권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종씨를 아버지쪽에 붙인 이유가 뭐야?”
“아! 그거……. 문상무도 구해주고 세종이 공부도 시킬겸…….”
“구해줘? 공부?”
어쩐지 문상무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망설여졌지만, 회장에게 회사 일을 숨길 수도 없었기에 나는 문상훈이 갑작스러운 셔틀 보직에 괴로워했던 것을 설명했다.
“하하하! 문상무님이 심부름이라니, 안 어울려!”
“어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너도 거기가면 심부름 해야해.”
“뭐 나야 아빠니까.”
단순히 아빠만 아니라, 죄다 노괴물들이다. 그중 누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문상훈이 아니라 나라도 즉각 편의점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외네. 그런 건 부사장님을 찾을 것 같았는데…….”
“나도 그게 의외였어. 하지만 일단 그분들 말로는 상무님이 이제 막 귀국했으니, 내심 챙겨주려고 했다던데.”
막상말로 하고 보니 우스웠다.
그들이 말한 전학생 괴롭히는 일진들 논리 같은 것이 떠오른다.
“거기 모인 멤버가 누구누구야?”
“장인어른에 함전무, 이상무, 게다가 놀라지마 백회장까지 참여했다니까?”
“백회장님이? 오빠랑 좀 그렇지 않나?”
“지난일이고 어차피 한방 먹인 것은 내쪽이니, 나야 상관없지.”
“그런가? 그런데 일단 이름값은 굉장하네?”
그말 대로다.
하나같이 국내 게임시장을 선도해온 노익장들의 모임.
문상훈은 나이트메어라고 했지만 어쨌든 드림팀은 드림팀이지 않나?
오히려 상황만 허락한다면 나도 그들 곁에서 이런저런 노하우를 전수 받고 싶을 정도였다.
“그건 그렇다치고, 조만간 정식 회장 취임이네. 기분이 어때?”
“아직은 그저그래.”
“그래? 조금 더 신날 줄 알았는데?”
“나도 그랬는데, 막상 회장실에 앉으니까 조금 맥이 풀린달까?”
물론 아직 정식으로 취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목표로 삼았던 위치에 도달하면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다치고 이번 프로젝트는 어때? 느낌 괜찮아?”
“아직 딱히 시작된 것은 없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아. 한 시대를 풍미한 SF명작이잖아. 게다가 모두들 의욕이 넘치더라고.”
“그래. 일론 머스크와 협의도 발표될 테니, 게임만 잘 완성되면 이번에는 정말 파격적인 결과가 있을 것 같네.”
“그래?”
“물론이지. 이번에는 마케팅도 역대 최고일거야. 칼을 갈았던 것은 개발파트만이 아니라고? 고전무님도 열심히 재무팀을 쥐어짜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으고 있는 걸?”
황금고블린의 보따리가 볼록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나도 그 지원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해야겠네.”
“일반적인 기준에서 대표가 너무 개발쪽만 신경쓰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오빠의 경우는 다르니까 응원할게.”
“고마워.”
연아 역시 일반적인 회장이 아니다.
그녀는 한참 젊고 열정적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대표가 해야할 역할 일부를 연아가 대신 맡아주기에 나는 개발쪽에 보다 신경을 쓸 수가 있다.
이건 나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그럼 이제는 뭐할거야?”
“7층에 가보려고.”
“아아, 기둥소프트? 아빠보러?”
“장인어른도 그렇고……. 일단은 기둥소프트 대표로서 신생 개발팀의 포부 좀 들어보려고.”
그들이 팀을 꾸리고 7층에 자리를 잡은 지도 며칠 정도가 지났다.
장인어른과는 집에서도 매일 얼굴을 보지만, 요즘에는 상당히 늦게 퇴근하시는 덕분에 대화할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이제 슬슬 계획은 잡혔겠지?”
“아빠가 오빠 회사 직원이 되었다는 것이 참 우습네.”
“더 웃긴 것은 제임스가 직속상사라는 거지.”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구나?”
“그럼 제임스는 이사고 장인어른은 고작 팀장이잖아.”
“하하, 천하의 조회장과 백회장을 직원으로 둔 회사의 대표님이 된 셈이네?”
“듣고보니 엄청나네.”
“나는 그동안 오빠가 기둥소프트쪽은 거의 신경쓰지 못하는 것이 맥베스 때문인 것 같아서 조금 미안했는데, 이제라도 기둥소프트도 뭔가 시작한다니 다행이다.”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바란 건데.”
“솔직히 개발에만 전념하고 싶은 것 아니야? 오빠는 대표직 같은 것에 관심 없잖아.”
“네가 신경써주는 덕분에 개발도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나는 맥베스가 좋아.”
“왜? 나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알잖아 이곳에 오고 나서 내 모든 것들이 달라졌어. 그것도 무척 좋은 쪽으로, 솔직히 지금도 가끔 꿈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지.”
“그건 나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야 하는 것 아냐?”
연아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것이 못내 귀여워서 몸을 굽혀서 연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지. 모든 것은 그때부터였지.”
“알아.”
“그래. 넌 항상 다 알지.”
“알아.”
연아는 슬쩍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감쌌다.
“오빠도 알지?”
“뭘?”
“내가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그럼. 알지.”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의 입술 감촉을 공유했다.
*
*
*
“오셨습니까?”
“너희가 왜 여기 있냐?”
7층에 도착하자 홍기도와 남궁원, 함송희가 먼저 와 있었다.
“회장님이 새롭게 팀장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리려고요.”
회장에서 팀장이 되었는데 축하라…….
정말 이상하게 들리지만 정작 장인어른, 아니 조팀장은 싱글벙글이었다.
“고맙구만 클클.”
“좋다고 웃기는, 생각해보면 저거 낙하산 아니야? 사위 회사라고 팀장단 거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팀장 다시 뽑을까요? 사다리 그려요?”
백회장의 투덜거리자 함성준과 이걸영도 한마디씩 보탰다.
“팀장 자리 욕심나나?”
“욕심은, 회장 감투도 이제 겨우 내려놨잖아. 앞으로 평생 어떤 감투도 쓰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왜 굳이 시비야?”
“그냥 너 잘되는 꼴은 배 아파서?”
“저도요.”
“저도.”
어째 백회장과 함성준, 이걸영 트리오가 묘하게 궁합이 잘 맞는다는 느낌이다.
“한때 제 팀원이었는데, 이제는 팀장이 되셨다니……. 뭔가 감개무량하네요.”
홍기도는 진심으로 뿌듯하다는 듯이 조팀장을 바라보았다.
머리 희끗한 조팀장을 무슨 제 부사수 바라보듯이 바라보고 있다.
정말로 한 번쯤 이 녀석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다.
“그래, 그래. 우리 홍팀장에게 신세가 많았지.”
“네. 신세가 많으셨죠.”
“…….”
“…….”
그 녀석에게는 입바른 소리 같은 거 하는 거 아닙니다.
아무래도 아직도 조팀장은 홍기도라는 캐릭터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어쨌든 정말로 축하드려요. 솔직히 전에도 느낀건데, 팀장님은 회장 보다 개발자 일 때 더 멋지세요.”
함송희의 말에 조팀장은 활짝 웃었다. 정말로 기쁜 것 같다.
“우리 함송희양은 어쩜 이리 말 한마디도 이쁘게 하는지……. 내가 회장직을 내려놓지만 않았어도 보너스라도 팍팍 줬을텐데.”
“괜찮아요. 저 많이 받아요.”
정말로 함송희는 직급을 떠나 선임연구원이라는 직책을 달아준 이후 연봉이 껑충 뛰었다.
이것은 내가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해 개발 중인 극비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의 코딩 능력은 압도적이다.
코딩에도 재능이 있다는 것을 함송희를 보고 처음 알았을 정도니까.
“그런데 어쩐 일이냐.”
“별건 아니고 대표로서 프로젝트 방향성이 어떻게 잡혔는지 궁금해서요.”
“엉덩이 걷어차려고 왔다는 거구만.”
“……표대표가 걷어차면 정말로 아플 것 같군요.”
함성준이 쓸데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엉덩이를 걷어차다뇨. 정말로 궁금해서 온거에요. 대표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름 기둥소프트 유일의 개발팀인데요.”
애초에 깨비몬 이후로는 딱히 기둥소프트 이름으로 프로젝트 같은 것이 진행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제임스와 조연준의 주도로 기둥소프트는 그간 일종의 투자회사처럼 운영되어 왔다.
돈은 나름 쌓이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그 돈을 쓸 곳이 없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나는 조팀장과 팀원들이 그리는 프로젝트 계획이 무척 궁금했다.
“훗, 그럴줄알고 미리 준비해왔지.”
역시 전원이 오너이자 임원진 출신이었기 때문일까?
이런쪽으로는 사고가 휙휙 돌아가는 모양이다.
조팀장이 턱짓을 하자, 한 손으로 초코과자를 먹던 이걸영이 다른 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 모니터에 프레젠테이션이 떠올랐다.
“배경이 우주입니까?”
“그래. 스파이스라는 IP와 스타링크라는 홍보효과. 이 특수를 노리기 위해서는 SF가 최고지.”
“그건 이해하겠는데, 컨셉은요?”
“당연히! 우주라면 낭만이지!”
“?”
그러니까 그 낭만이 뭐냐고요.
“우주하면 로봇이지!”
“로봇?”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든다.
이건 대박 아니면 쪽박.
중간 따위는 없는 도박과 같은 베팅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잠시만요.”
나는 그냥 이걸영에서 마우스를 빼앗아 빠르게 이들이 작성한 프레젠테이션의 자료화면들을 훑었다.
“흠, 생각했던 반응이 아닌데?”
“역시 세대 차이인가? 우리 때는 우주와 로봇이라면 그냥 먹어주는 거였는데.”
“하지만 정작 시장성에 자신이 없어서 몇 번이고 헛물켜지 않았나.”
“그렇지. 대형 개발사치고 로봇 소재 한 번쯤 구상해보지 않은 회사는 없지.”
내가 자료를 살펴보는 사이, 조팀장과 팀원들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거 단순 PVP 게임이 아니네요?”
“PVP 요소도 있겠지만 근본은 싱글과 PVE다. 힘을 합쳐 적들의 로봇과 함선을 공략하는 것이 포인트지.”
“BM도 성능과는 관계없는 데칼과 디자인쪽만 고려할 거다. 물론 채산성은 따져봐야겠지만……. 이 회사는 수익 걱정 크게 안 해도 되잖아 그렇지?”
백용현은 마치 이제 자기 회사가 아니니, 수익성과 관계없이 달려들어 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 좋다.
나쁠 것 없다.
“이 프로젝트 진행에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아야겠군요.”
“뭔데?”
“조건?”
“간섭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었나?”
조팀장이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컨셉 파트에서는 저도 한손 거들게 해주십시오.”
“한 손 거들어? 그 말은…….”
“이거 재미있어 보이네요. 저도 한번쯤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래! 남자라면 그런 법이지!”
“로봇에 설레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지!”
다소 성차별적인 대화가 오가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
로봇!
기획자로써 한 번쯤은 꼭 디자인해보고픈 장르가 아니겠나?
-띠링!
[마왕이 용사의 업적에 침을 발랐습니다!]
마왕이 처가집 버프를 시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