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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78화 (278/346)

278.

훈수라는 단어가 있다.

바둑에서 파생된 용어로 자신의 바둑이 아닌 타인의 대국을 관람할 때, 보다 여유로운 시각으로 날카로운 한 수를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

조팀장과 그의 팀원들이 처한 상황도 그러했다.

그들이 젊었을 적에는 여유가 없었다. 색다른 아이디어보다는 쉽고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편법에 눈이 홀렸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높은 위치에 도달하고부터는 딸린 직원들의 생계와 회사의 성장을 위해 더더욱 시야가 좁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선 그들을 옭아맬 직급 같은 것이 없다. 일단 기둥소프트 자체가 남의 회사인 것이다.

게다가 여유가 있다.

윗사람의 눈치나 다른 시장상황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실함. 거기에 더해 오랫동안 쌓인 연륜에 기인한 날카로운 선견이 더해졌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자 그들은 자신들이 예상한 것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거 될 것 같지?”

“어, 될 것 같은데?”

“역시 나는 천재였나?”

“천재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지금까지 이 업계에서 발붙이고 있지 못했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보며 자화자찬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그만큼 느낌이 오는 아이디어들이었다. 왜 지금까지 이렇게 하지 못했던가?

그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일단 그래도 혹시 모르니 표세인이한테 한번 던저보자고.”

“그렇지. 그래도 그녀석이 젊은 피니까.”

한참 어린 대표의 컨펌을 받아야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지만, 표세인의 능력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팀장은 사내메신저를 통해 표세인을 소환했다.

-좀 보지.

고작 팀장이 대표에게 보낸 메시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메시지였지만, 표세인은 금방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너 요즘 할 일 없냐? 왜 이렇게 일찍 나타나?”

“할 일이 없다니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합니다. 나름 고액연봉자 아닙니까. 임원들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씀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클클. 할일 많다고는 안하는 구만.”

“아직 스파이스 개발이 본 궤도에 오르지 않았고, 스타링크와의 파트너쉽 발표는 회장님의 정식 취임 때 동시 발표하기로 해서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보다도 이 마굴에서 무슨 사고라도 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탓에 금방 달려온 것이었지만, 표세인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한번 봐라.”

자신들의 기획안을 보라고 대표를 불렀단 말인가? 그냥 사내 인트라넷에 올리고 확인 요청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아직도 회장이라는 직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업무 방식.

사실 이런 것이 표세인이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조팀장의 호출에 기분나빠할 표세인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로봇 게임에 큰 흥미를 가진 탓이었다.

“빠르시네요?”

“이게……. 뭐랄까. 내 회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어깨가 가벼워 진달까?”

“맞아. 맞아. 부담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디어가 팍팍 샘솟는 느낌이야.”

조팀장의 말에 팀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종이는 안 보이네요? 이 녀석 설마 지각입니까?”

“아니야. 내가 간식거리 좀 사오라고 했어.”

이걸영이 머쓱하게 말했다.

“하긴 당 떨어지면 안 되는 연배시죠.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잔소리 하지 말라니까.”

“아니, 그래도 넌 인간적으로 너무 먹어. 당뇨 걱정 안되냐?”

“헐헐, 우리집안에 당뇨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뭐든 시작이 있는 법이다. 그런걸로 족보에 이름 올리지 마라.”

“누가 족보에 개인질환을 적습니까?”

“그냥 은유잖냐.”

“본인 탈모나 신경쓰시지요?”

“헐! 마, 탈모는 나랏님도 안 건드리는 법이야!”

함성준과 이걸영이 궁시렁대며 디스전을 펼쳤다.

“그만들해라. 대표님이 검토 중이시지 않냐.”

“음.”

“네. 죄송합니다.”

“눈치 보지 말고 집중해.”

백용현은 자신들의 기획안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표세인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과거에 듣기로는 백용현이야 말로 깐깐하게 직원들의 기획안을 검토하고 아웃 사인을 자주 내리는 인물로 유명했었다.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일까? 평생 자신의 기획안을 검토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 무척 긴장한 모습이었다.

“우주개척 시기. 기업 단위 경쟁 치열. 과도한 출혈경쟁을 막고자, 협의한 스포츠화된 전장. 전장의 이권은 단순히 승패만이 아닌 브랜드 광고 효과를 위해서 최첨단 기술들을 총동원한다.”

“기본 골자는 그런 느낌인데 어떤 것 같냐?”

표세인은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굴팀 멤버들이 바짝 긴장했다.

“좋네요. 깔끔하고 이해도 쉽습니다. 무엇보다 게임 시스템과의 연계도 좋네요. 특히 브랜드 싸움 좋네요.”

“그렇지?”

“일단 한 고비 넘었군.”

“그러면 이 기업 말인데요.”

“응. 응.”

“말해봐. 뭐든 좋아.”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표세인의 말을 기다렸다.

“국가 기업이라고 해두죠. 일종의 공기업 형태랄까?”

“그렇게하는 이유가 있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 유저들에게 선택지와 몰입감을 높이고 싶네요.”

“아! 자국 기업을 키워라?”

“예. 가능하다면 로봇 데칼에 국기 박아버리면 좋겠어요. 물론 기업마크라도 둘러대서 약간 변형된 느낌으로.”

“그래. 혹시 모를 시비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래, 확실히 그러면 팔리겠네.”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야. 은근히 게임 퀄리티, 퀄리티 주장하면서도 돈 벌이는 안 놓쳐.”

백용현의 말에 표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자선 사업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캐쉬 아이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죠. 페이 투 윈을 조장하는 풍조가 문제죠. 애초에 돈을 쓰는 것 자체는 즐거운 행위입니다. 쓰고 싶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어거지로 빼앗는 모양새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다 맞는 말이다. 알겠으니 마저 읽어라.”

조회장이 표세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표세인은 다시 집중해서 기획안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간략한 배경 컨셉이 끝나고 이후부터는 시스템 기획이 주를 이루었다.

핵심 시스템은 1인칭과 3인칭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

모 유명 게임에 등장하는 마법의 입자 비슷한 재밍 시스템의 발달로 AI와 각종 통신이 먹통이 되는 우주 전장이라는 컨셉.

결국 인간이 눈으로 적을 쫓아야 하기에 탑승형 로봇이 필수가 되었고 기체 조작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화를 거친 강화인간들은 특수한 나노봇을 살포하여 3인칭 공감각을 얻을 수 있다.

“3인칭 시점을 일종의 스킬화한다는 것은 참신하네요.”

“그렇지. 아무래도 1인칭 보다는 3인칭이 조작에 훨씬 유리하고 그것을 시스템에 녹여 들게 하면 그럴듯하다고 판단했다.”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반대로 1인칭을 고수하는 기체도 있을 수 있겠군요.”

“어? 왜?”

“중갑을 두른 비기동형 중전차 컨셉의 기체는 사실 기체가 빠르게 움직일 필요 없으니, 장갑과 화력 믿고 쏴재끼는 거죠. 어차피 사격 자체만 놓고보면 1인칭으로도 충분한 사람들 꽤 있을 겁니다.”

“오오! 좋아 그거면 전투 패턴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있겠어!”

“역시 표세인이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군.”

“그럼요. 그럼요. 맥베스가 키운 최고의 인재가 아닙니까?”

“키워? 굴러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에이, 어떻게 왔든 키운건 키운거죠.”

“그럼요. 맥슨에는 누구 없습니까?”

“흥!”

백용현은 살짝 토라진 느낌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다양한 파츠……. 그렇군요. 카메라 흔들림부터 시야각 조정까지 전부 파츠를 조합해서 자신만의 화면각과 UI를 조합할 수 있다는 것은 좋겠네요.”

“맞아.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줘도 로봇 장르는 마이너하지. 그래서 골수 유저들의 만족도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옵션창이 할 수 있는 기능들을 죄다 유저들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파츠화 시키려는 계획이다.”

로봇 매니아는 일견 자동차 매니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메카닉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 같은 부분일 것이다.

그들은 라디오부터 라이트와 휠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자신의 손으로 커스터마이징 하는 것에 열광한다.

그렇게 제 손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꾸밀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 될 거다.

마이너한 시장임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주기위한 컨셉.

이건 확실히 먹힌다!

표세인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왜 그렇게 요상하게 웃는 것이냐?”

“아니여. 벌써부터 기대가 돼서요.”

“그래? 이것도 내 아이디어야. 콕피트에 시트까지 꾸밀 수 있게 하는 것이지.”

“콕피트 시트요?”

“그래. 데미지 공식을 보면 피탄지점에 따라서 각 파트 데미지 누적이 나뉘는데, 여기에는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데미지도 따로 적용되지.”

“그렇군요. 파일럿 데미지 컨트롤이 지상과제겠네요.”

“그래. 그러니 시트의 구성에 따라서 파일럿 데미지 감소에 치중하느냐, 아니면 조작감에 경미한 패널티를 받느냐하는 것이지.”

“하하, 이 젤 형태의 시트 컨셉은 좀 재미있네요. 그런데 이거 그래픽 리소스 장난 아니겠네요.”

표세인의 말에 신나서 떠들던 함성준이 입을 다물었다.

콕피트 구조까지 섬세하게 개발하려면 그에 따른 그래픽 리소스가 어마무지하게 늘어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개발비와 연관된다.

“아니, 뭐 이런건 따져보면서 가감해야지.”

아직도 임원티가 완전히 씻겨나가지 않은 것일까? 개발비 상승이라는 말에 함성준이 냉큼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표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더하는 것은 좋아도 빼는 것은 안 됩니다. 개발비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해외 스튜디오를 영입해서라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오오! 역시 표세인이구만!”

“돈벌이는 따로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패키지만 잘 팔아도 게임은 돈이 됩니다. 회사의 규모 성장과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눈치보는 회사들과 기둥소프트는 다르잖습니까?”

“하긴……. 여기 지분 거의 100% 네 몫이지?”

“100%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눈치 봐야 할 주주도 없으니까요.”

이것이 기둥소프트의 최대 장점이다.

하다 못해 맥베스라도 여기까지는 지를 수 없다.

하지만 기둥소프트는 다르다.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다.

“클클클, 화통해서 좋군.”

“이건 부러울 정도인데? 나도 그렇게는 못 했으니까.”

조팀장과 백용현은 자신들의 회장 시절을 떠올리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라고 해봤자, 자사 주식 지분의 2~30% 정도를 보유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기에 주주들의 의향과 주가동향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둥소프트의 지분은 거의 100% 표세인의 소유였고, 무려 비상장 형태이기에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사가 보유한 수조 원대의 막대한 자금에 지금도 깨비몬 수익이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임스와 조연준의 활약으로 투자수익만으로도 연 20%에 육박하는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

“모처럼 드림팀이 결성된 셈 아닙니까? 눈치보지 말고 지르세요. AAA급 게임 개발비 수준으로 지원해드립니다.”

“그러다 망하면?”

“게임 하나 망한다고 기둥 소프트 끄떡없습니다. 무엇보다 저 예비 신부가 대기업 회장입니다?”

“푸하하하하!”

“하긴, 그거야 그렇지!”

내 말에 조팀장과 팀원들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조팀장이 터트린 웃음 중에서 가장 큰 웃음이었다.

띠링!

[마왕이 처가집 버프를 시전합니다!]

군기 한번 잡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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