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역시 규모가 만만치 않으니 쉽지 않군.”
“그렇죠. 이 나이에 머리에서 수학 공식 꺼내려니까 숨이 찰 지경입니다.”
함성준의 말에 조양길은 턱을 긁적였다.
“이거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네요.”
“역시 그렇지?”
파츠 단위로 데미지 계산이 따로 들어가고 여기에 로봇의 코어와 탑승한 라이더의 체력 계산도 별도로 계산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게임의 체력 계산이 플레이어블 캐릭터 하나만 고려하면 되는 일이지만, 마굴팀의 기획에는 무려 스무개에 달하는 별도 계산이 필요했다.
“이걸 어찌저찌 설계한다고 해도……. 레벨 디자인까지 가려면……. 어후야. 솔직히 이거 예전 같으면 우리 선에서 아웃시켰을 기획입니다.”
“클클클. 것 참 우리 업보가 깊구만.”
함성준의 말에 조양길이 클클 웃었다.
재미 보다는 개발 편의성과 채산성에 중점을 두고 회사를 운영하며 잔뼈가 굵었다.
이제와서 일체의 타산 없이 오직 재미만을 위해 달려보자 결심했지만 아직 버릇을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었다.
“안된다고 하기 보다는 되는 쪽으로 생각을 중심에 놓자고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가서 방향을 틀어도 될 거야.”
“하하, 돈 생각 안하고 개발하니 그런 사고 방식도 통하는군요.”
세상에 안되는 일은 없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
그리고 언제나 시간이란 돈이다.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세인의 선언 덕분에 마굴팀은 가까스로 부정적인 마인드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도 개발자들 의욕을 계속 깎아 낸 셈이지.”
“맞습니다. 반성해야 할 일이지요.”
“어쨌든 너 혼자로는 감당 안된다 이거지?”
“솔직히 저 혼자 문제가 아니라, 저 대신 레벨디자인을 감당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체력 계산을 끝낸다 하더라도 이것을 이용한 성장 설계와 시나리오와 맞물린 레벨 디자인을 구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당장 체력 계산식 하나로도 잊고 살던 수학 공식을 억지로 쥐어짜며 아둥버둥 발버둥 치고 있는데, 레벨디자인이라면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닌가?
“그렇군. 이거 지원이 필요하겠어.”
“네. 그럴 것 같습니다.”
“문상훈이 오라고 해.”
“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문상훈이도 못 부르나?”
함성준이 망설이는 것은 팀장이 상무를 그렇게 쉽게는 못 부르죠. 라는 상식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녀석 지난번에 삐친 것 아니었습니까? 괘씸해서 한동안 안보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일은 해야 할 것 아니야. 당장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
“…….”
“왜 그래?”
“형님 방이 어딘데요?”
함성준의 말에 조양길은 뒤늦게 자신의 집무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나 방 없지? 그런데 팀장도 나름 장급인데 방 안주나?”
“차장도 방이 없는데 팀장에게까지 어떻게 방을 줍니까?”
“으음…….”
“그래서 어째요? 불러요. 말아요?”
“그냥 내가 가지.”
조양길은 맥 빠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부르시지?”
“아니, 여기서 대화하면 너희까지 정신 팔릴 것 아니냐. 다들 바쁜 상황인데, 내가 움직이는 것이 맞지.”
“오, 뭔가 팀장 다운데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걸영이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팀장 처음이시죠?”
“뭐?”
“나나 성준 형님은 팀장부터 차근차근 경험했었는데, 형님은 바로 사장부터 되버려서 팀장 경험 없으시잖아요.”
“그렇네?”
“은근히 꽃길만 걸었다니까? 이참에 많이 배우고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들이…….
조양길은 내심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 말에 틀린 부분이 없어서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저 녀석도 팀장 한 번 못해봤어!”
“뭐? 왜 나를 걸고 넘어지냐?”
“너도 팀장 안 해봤잖아. 그렇지? 넌 태생부터 금수저라 아버지 지원 받아서 게임 만들었잖아.”
“……그, 그건 그렇지.”
백용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두분 모두 사회생활 경험 일천한 걸로 정리하죠.”
“일천해? 내가 사회 경험이…….”
“보통 밑바닥 생활을 사회 경험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표나 회장은 안쳐줘요. 아, 혹시 모르실까봐서.”
더 이상 상대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양길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응?”
갑자기 이걸영이 애타게 조양길을 불렀다.
“올 때 메로나.”
“…….”
“팀원 사기 진작을 위한…….”
이 팀은 뭔가 잘못됐다.
서서히 조양길도 다른 이들이 느끼는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
*
*
“어, 어쩐 일이십니까?”
갑작스러운 조양길의 등장에 문상훈은 화들짝 놀랐다.
지난번 셔틀 사건 이후로 찾아가기가 찜찜해서 발길을 끊었는데, 조양길이 직접 자신의 방을 방문하다니?
“잠깐 대화 좀 하지.”
조양길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제, 제가 그런게 아닙니다. 표대표가 혼자서…….”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네? 혹시 무슨 일로 저를 찾아 오신겁니까?”
문상훈은 한발 늦게 자신이 헛발을 디뎠음을 깨닫고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기둥소프트 팀장인 것 알지?”
“아, 네.”
팀장의 탈을 쓴 전임 회장인 것은 잘 알고 있지요. 라고 문상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도움이 필요해.”
“무, 무슨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혹시라도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 문상훈은 바짝 긴장했다.
“네 쪽에 성진규 있지?”
“네? 아, 네.”
“그 녀석 좀 우리 쪽으로 지원해줘.”
“아니, 그게…….”
아무리 그래도 성진규는 자신의 개발실(현재는 통합)까지 지니고 있던 차기 이사급 인재인데, 그런 성진규를 본사 프로젝트도 아닌 기둥소프트 프로젝트에 차출하는 것이 가능한가?
게다가 팀장급 인사가 메인인 팀에 준임원급 실장을?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되는데, 말이 안된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곤란했다.
그렇게 문상훈이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자신의 머릿속을 열심히 풀어내고 있을 때였다.
“아니, 너무 어렵게 생각 말고 일단 기둥소프트는 명색은 자회사야. 본사가 자회사에 지원도 해주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그건 그런데…….”
“게다가 그 친구 특기가 레벨 디자인인데, 그쪽은 지금 남궁팀장이 있지 않나. 아니면 남궁팀장을 보내줄 건가?”
“그, 그건……. 안되죠.”
성진규도 좋은 인재다.
하지만 남궁원은 정말로 어디에 내놓아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인재였다.
향후 수 년 안에 실장 혹은 개발 이사로 자리매김할 것이 확실하다.
이미 표세인을 대신해서 숱한 게임들의 메인 디렉팅을 도맡아 처리하며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또한 이번 스파이스 게임 개발에도 그녀는 기획 팀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반면 성진규는 아직 이렇다 할 포지셔닝이 끝나지 않은 상황.
“……표대표가 남궁팀장에게 이미 업무를 상당히…….”
문상훈은 혹시나 싶어 표세인을 들먹이며 조양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조양길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내 앞에서 표세인이를 핑계 삼아? 내가 표세인이 이름을 거론하면 어이쿠, 하면서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나?”
물론 이것은 블러핑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있었다면 표세인을 찾았을 것이다.
이미 자신은 회장이 아닌 팀장이다. 그것도 표세인이 대표로 있는 기둥소프트의 직원이 아닌가?
하지만 문상훈은 그것을 몰랐다.
전회장이자, 현 예비 장인어른이 아닌가? 그들의 긴밀한 관계를 문상훈은 알지 못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습니다. 물론 회장님……. 아니, 팀장님께서 말씀하신 일인데 그렇게 되도록 해야지요!”
결국 문상훈은 블러핑에 굴복했다.
맥베스의 미친개라 불리던 남자.
소싯적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던 들개 같은 성향의 문상훈이었으나, 이 들개 같은 근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들개란 의외로 자신이 따르기로 정한 우두머리에게는 고개를 철저히 낮추는 동물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전임 회장인 조양길이었다. 문상훈의 패배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좋아. 역시 시원시원하군. 역시 문상무야.”
“가,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가보겠네.”
“예. 살펴가십시오.”
“아 참, 그리고.”
“네?”
“표세인에게는 자네가 잘 말해주게. 나는 자네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겠네.”
“제, 제가 설명합니까?”
“나도 한다니까? ‘자네의 도움을 잘 받았다고’ 그렇게 말거라니까?”
아, 나 당한거구나.
조금만 버텼으면 되는 거였구나.
문상훈은 순간 양아X라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아, 알겠습니다.”
그저 힘없이 미소 짓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무슨 일이냐?”
보정훈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방문한 성진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안색이 어두웠다. 딱히 아픈 곳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냐?”
“방금 상무님께 불려갔다 왔는데…….”
“응.”
“칠 층으로 가라네.”
“치, 칠층?”
성진규의 말에 보정훈이 화들짝 놀랐다.
칠층이 어떤 곳인가? 이미 사내에 소문이 파다한 마굴이었다.
문상훈이 간식 셔틀을 하고 전무군단을 이끄는 도경우가 센스 없다며 타박을 듣고 나오는 곳이 아닌가?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되는 맥베스의 금역!
그런 곳으로 배정 받게 되다니!
“…….”
“왜 갑자기 입을 다무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그, 그동안 즐거웠다. 너와의 추억은…….”
“이 미친 놈아! 누가 죽으러 가냐?”
“때로는 죽기보다 가기 싫은 곳이 있기 마련이지. 군대라거나, 칠층이라거나…….”
이미 칠층 마굴은 맥베스 직원들에게 군대 만큼이나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된거야?”
“넌 부럽다.”
“갑자기? 물론 나야 칠층으로 가라는 말은 못 들었지만…….”
“표세인 대표님이 직접 스파이스 프로젝트 건으로 방문해서 향후 논의를 했다면서.”
“그렇지?”
“그런데 나는 이번에는 명확한 포지셔닝이 없던 탓에 칠 층으로 가게 된 거야.”
“그렇구나. 정말 운 좋았네.”
“…….”
“네가 한 말이잖아?”
보정훈은 자신을 흘겨보는 성진규에게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하아, 이러다 진짜 이사 진급 나가리 되는 것 아닌가?”
이미 삼인방의 경쟁에서 승자는 최기환으로 결정된 상황.
하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라도 절치부심해야 하는 이 시점에 칠층 마굴에서 노괴물들의 수발이나 들어야 하는 신세라니…….
“잠깐.”
“응?”
“이거 반대로 운 엄청 좋은 상황 아니냐?”
“운이 좋아?”
성진규의 질문에 보정훈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뭐네가 께름칙하다는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뭔데!”
“거기 멤버가 누구 누구냐?”
“회장님에 함전무님, 이상무님……. 거기에 백회장님까지…….”
“거기서 잘 보이면……. 직행 코스 아니냐? 세상에 회장님 곁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겠어?”
“어?”
*
*
*
“그래서 성진규 온답니까?”
“그래.”
“억지로 끌려오는 모양새인데……. 잘 챙겨줘야겠군요. 싫은 티 너무 내면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용현 형님 성격에 샤우팅 무서울 텐데…….”
표세종은 나이로도 막내 아들뻘이라서 일방적으로 귀여워하고 있지만, 백용현 성격은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괄괄하다고 정평이 나있었다.
반면 실장 삼인방 중에서 보정훈을 제외하면 싹싹한 성격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뭔데? 까칠한 놈이야?”
마침 백용현이 함성준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까칠하진 않은데……. 싹싹한 성격은 아니지요.”
“뻣대면 자근 자근 씹어주면 그만 아냐?”
백용현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금일부로 이 팀에 배정을 명 받은 실장 성진규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열과 성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
“?”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성진규는 신병 모드에 빙의한 상태로 나타났다.
‘반드시 이곳에서 예쁨을 받아서 나도 임원 자리에 앉고 만다!’
성진규는 마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고 등장했다.
사천왕 등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