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안녕하십니까. 한명수입니다.”
한명수는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장이 먼저 이렇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림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면면들을 보자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한명수의 눈동자는 오히려 굳건해졌다.
굳이 양성태의 당부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밤 사이 홀로 나름 고민한 내용이었다.
어찌되었건 회사는 회사다. 연륜이든 과거의 직급이든 상관없다.
오로지 현재 맡은 바 소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마굴 멤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명수 자신이 이 점을 잊을까 우려되어 계속 스스로 되뇌었다.
“반갑습니다. 한명수 부장님.”
“반갑습니다.”
“허허, 이렇게 또 뵙게 되는군요.”
모두들 반가운 얼굴로 한명수를 맞이했다.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유독 씩씩한 목소리.
다름 아닌 표세종이었다.
“그래. 너도 있었구나.”
표세종을 보니 한명수의 표정도 한 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정상적인(?) 팀원이 하나 쯤 있다는 것이 못 내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의 과거 직급 때문에 이래저래 고민되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거짓말이다.
아무리 한명수라도 전임 회장, 전무, 상무를 앞에 두고 마냥 당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일이지요. 모든 것은 결과로 증명해야지요. 앞으로 힘내 봅시다.”
“네. 저도 여러분들의 프로젝트가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제가 생각한 업무 방식에 대해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략적인 프로젝트의 개요는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 예상과는 다른데?’
한명수는 뭔가 일이 술술 풀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금 우리는 인적 자원이 풍족하다고는 못할 상황입니다. 중국과 미국에 2개의 외주업무를 담당할 스튜디오와 협의중이지만, 당장은 갈 길이 멀지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저도 팀장이지만 사실 팀장 노릇보다는 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쁠때야 나 팀장입네~ 하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역시 회장님……. 아니, 팀장님이십니다.”
도무지 조양길 앞에서 팀장이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다.
그래도 팀장이라는 직급이 있는 조양길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백용현, 함성준, 이영걸은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는 씨를 붙여서 불러야겠지만 이것만은 밤새 고민해도 이렇다 할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이 요즘 스타트업이나 IT회사들은 직급 구분 없이 전원 개발, 전원 관리자 체제로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죠. 소규모일수록 많이 선호하는 방식이라고 하더군요.”
“더욱이 우리팀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어서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별명이요?”
“네. 그 편이 부장님께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조양길의 의견에 한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은 그에게 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는 레드입니다.”
“난 블루.”
“그린.”
“옐로우.”
저마다 자신의 별명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레드? 블루? 그린? 옐로우?”
별명이라더니, 무슨 특수부대 콜사인 같은 것을 늘어 놓는다?
한명수는 살짝 당황했다.
영어 이름 같은 것을 생각했지, 설마 색상별로 나눠 놓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는 극상이라고 합니다.”
“극상? 최고 품질?”
한명수의 말에 표세종은 슬쩍 미소지었다.
“해석은 각자 알아서 하는 걸로. 흐흐흐.”
“?”
뭔가 음흉한 미소였다.
“부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핑크있는데, 핑크는 어떻습니까?”
“피, 핑크요?”
순간 한명수는 당황했다.
‘가만, 레드, 블루, 그린, 옐로우……. 거기에 핑크? 이거 설마 전대물 느낌으로 구성하시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한명수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는 마굴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핑크해. 핑크.’
‘핑크 밖에 없어. 그거 해.’
‘인원 좀 맞춰보자. 핑크해.’
무언의 압박이 한명수를 덮쳐오고 있었다.
“하, 하지만 핑크는…….”
“확실히 핑크는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진정한 남자의 컬러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한명수가 어이 없다는 시선으로 표세종을 바라보았다.
“원래 핑크는 오래전부터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었고 파랑이 여성을 상징하는 색이었는데, 1940년대에 미국이 사업전략의 일환으로 이 둘을 바꿔 광고하면서 인식이 바뀌었다죠. 그리고 요즘 배우 라동석 형님이 핑크 옷 자주 입잖아요.”
“아! 그 영화?”
“기억하시죠? 핑크는 남자의 색입니다. 제가 개인적인 사정만 아니었다면 핑크했을 텐데……. 아쉽네요.”
표세종은 진심으로 아깝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한명수는 잠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매만이라면 한명수의 체격은 배우 라동석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자주 입는 색이라면 혹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딴 것은 모르겠고, 핑크해.’
‘그냥 하자. 다섯명 채워야 뭔가 각이 나오잖아.’
마굴 팀원들의 눈빛에 미묘한 광기가 서려있다. 이건 절대로 핑크가 좋아서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한명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하지만 새로 온 부장의 입장에서 부서원들과의 화합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한명수가 인당수 뱃머리에 오른 심청이가 된 기분으로 핑크를 입에 담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자, 잠깐만요. 지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까?”
“어? 성진규 실장님?”
성진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지금 핑크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린 것 같은데요?”
“네. 팀원분들께서 저에게 핑크를…….”
“자, 잠깐만요. 핑크는 제게 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성진규의 말에 마굴 팀원들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그냥…….”
“사실 얘는 재미가…….”
“어허, 성실장 상처 받습니다.”
모두가 수군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성진규가 바라던 핑크를 그 몰래 한명수에게 붙이려던 모양이다.
“저, 저도 재미있는 놈입니다.”
“미안하지만 넌 캐릭터성이…….”
“아, 정말! 그런 말 하지 마시라니까요.”
계속 솔직히 말하려는 백용현과 그것을 말리려는 함전무&이걸영 콤비의 대립이 이어졌다.
“……네가 핑크라 이거지?”
“네? 아, 아직 정해진 것은…….”
“두고 보자 핑크……. 그냥은 안 넘어 간다.”
“네?”
성진규는 정말로 원망스럽다는 듯이 한명수를 흘겨보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벗어나버렸다.
“삐졌네.”
“삐졌네요.”
“삐진 모양이네.”
“저래서 안 된다니까. 잘 삐지는 애들 끼워주면 계속 골치 아파.”
성진규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한마디씩 던지는 마굴 팀원들을 보며 한명수는 등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지난번에 일진이 어떻고, 문상무가 셔틀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이거였나?’
한명수도 드디어 마굴 팀원들의 본색을 조금은 깨달았다.
“그럼 어쨌든 핑크는 정해졌고, 그럼 핑크.”
“네?”
정해진거라고?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아까 말했던 대로 여기는 직급 없이 평등하게 모두가 개발에 전념하기로 했으니, 말도 편하게 하는 걸로 하자고.”
아……. 설마 별명으로 하자는 것이 이거였나?
직급 떼자는 이야기였어?
“자네도 불편할 것이 아닌가. 이건 배려야.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다르다.
한명수는 당황했다.
“그럼 마왕토벌 파티에 온 것을 확인하네.”
“마왕 토벌 파티요?”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럼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네.”
“그래. 한부장, 아니. 우리 핑크 코딩 솜씨는 정평이 나있지 않나.”
이걸영이 자신의 코딩 실력을 칭찬하자 한명수의 귀가 움찔했다.
자타 공인의 코딩 전문가.
한명수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에 깊은 애착이 있었다.
“저, 저를 그렇게 봐주시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지. 일단 이리 와봐, 자네에게 맡길 일이 산더미처럼 있어. 자네도 째째한 관리직 보다는 개발쪽 업무를 볼 때가 더 신나지 않나?”
“그건 그렇죠!”
한명수는 핑크니 뭐니 하는 것은 싹다 잊어버리고 이걸영이 보여주는 개발문서들을 바라보았다.
‘복잡하다. 하지만 섬세하다.’
마굴팀이 기획중인 로봇 게임의 기본 시스템은 데미지 계산 공식부터가 쉽지 않았다.
“성진규 실장이 이래저래 머리를 굴린 모양인데,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코딩화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더군.”
“그래서 우리는 자네에게 기대가 커.”
“모쪼록 자네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주기 바라네.”
예전에는 감히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던 인물들이 자신의 코딩 실력을 칭찬하며 기대를 보내고 있다.
한명수는 가슴이 벅찬다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말해 살짝 감동해 버렸다.
“자네만 믿겠네.”
“마, 맡겨 주십시오. 회장, 아니지. 팀장, 아, 아니지. 레드!”
“그래. 바로 그거야! 핑크!”
“드디어 제대로된 멤버 구축이 완성됐구만!”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한명수는 마굴 팀원들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진 것이 무척 기뻤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지만……. 여기 일은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띠링!
[용사 전대가 꾸려졌습니다!]
*
*
*
“한명수 부장을 보냈습니다.”
양성태는 표세인에게 자신의 일처리를 보고했다.
“한명수 부장이요?”
“네. 그 정도 인물이라면 칠층 팀에서도 제 역할을…….”
“으음…….”
“왜 그러십니까?”
양성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부사장님께서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한명수 부장은 그 팀과는 상성이 너무 좋아요.”
“상성이 좋다?”
“조팀장을 아직도 조회장님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둘은 다르다는 겁니까?”
표세인의 말에 양성태는 살작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요즘 회장 승계문제로 바쁜 나머지 칠 층에 직접 가보지 못한 것 때문에 조양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조팀장님과 팀원들은 위계랄 것이 없는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를 꾸려가고 계시죠. 거기에 순수 개발자인 한명수 부장이라면……. 아마 부장일 같은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신나서 함께 개발에 몰두할 겁니다.”
“으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군요.”
양성태가 그 답지 않게 당황했다.
“원래 사천왕은 깨지는 것이 일이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런게 있습니다.”
홍기도는 차를 전달하며 씩 웃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이 녀석이 웃네요?”
양성태의 질문에 표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제가 웃을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 그럴 순 없지.”
“네?”
“네가 남의 일에 그냥 웃을 녀석이 아니지. 이건 뭔가 있다.”
“뭐, 뭐가요?”
“그러고보면 요즘 마왕, 마왕하는 소리가 들려서 생각해봤는데…….”
마왕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그리고 언제나 배신자가 나타나기 마련.
“너 배신자냐?”
“뭐, 뭡니까? 증거 있어요?”
“원래 마왕군에는 증거 필요 없어.”
표세인은 도망치려는 홍기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부터 고강도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고, 고문입니까? 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 말했듯이 증거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건 그냥 경고다.”
“무, 무슨 경고요?”
“마왕은 배신자를 용서치 않는다.”
표세인의 억센 손아귀가 홍기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끄아악! 마, 말할게요.”
“아니. 하지 말라니까. 의리를 지켜라! 끝까지 지켜라! 스트레칭은 30분이다!”
“무슨 스트레칭을 그렇게 길게해요!”
마왕의 군기 잡기는 배신에 대한 응징부터 시작되었다.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