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이 안되는군요.”
한명수.
이제는 마굴팀에 핑크를 담당하게 된 그가 일정표를 앞에 두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최소 2가지. 바람상으로는 6종류 정도를 바라니까.”
조양길 역시 한명수의 말에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기획을 하고 야심차게 도전한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외주 개발팀의 지원이 시작된 것도 아닌 상황.
그런 와중에 여러 바리에이션을 가진 메카닉 디자인 부분까지 고려해 일정을 짜려하니, 도통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핑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솔직히 그래픽 리소스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니. 이쪽은 별도 외주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 기획은 돈 먹는 하마나 다름이 없다는 느낌이다.
물론 어떤 게임이든 AAA급 게임을 개발할 때는 장르를 불문하고 돈이 물 쓰듯이 소모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메카닉 디자인 설계는 전혀 다른 영역이기에 이에 따른 그래픽 리소스 부담이 훨씬 커진다.
판타지 장르가 사랑 받는 것은 단순히 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외에도 이런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거 배경을 나무와 풀로 도배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SF장르의 필연적인 문제.
자연 배경 보다 훨씬 더 복잡한 미래적인 디자인의 배경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
이래저래 그래픽 리소스가 배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
“혹시…….”
“뭔데?”
“물론 이런 것이 그렇게 쉽게 떡하니 나올 리는 없지만…….”
“뜸들이지말고 말해보게.”
조양길의 말에 한명수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어렵게 입을 땠다.
“예전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비슷한 컨셉으로 개발중이던 게임 리소스를 인수 받는 경우요.”
“아! 그렇지. 그런 것이 있지.”
조양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명수의 말대로 상황이 그렇게 운 좋게 흘러가는 일은 드물었다.
막상 비슷한 컨셉이라도 디자인 측면에서는 상당 부분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게다가 설령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각 회사가 비밀리에 개발중인 게임의 정보를 입수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나?”
“아, 왔구만. 지각인 것 알지?”
백용현의 등장에 조양길이 살짝 핀잔을 주었다.
“이봐, 핑크.”
“네.”
백용현은 조양길 대신 한명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어제도 11시 넘어서 퇴근했는데 말이야. 30분 정도 지각은 솔직히 용서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거야…….”
“용서 같은 소리하네. 여기가 야근비도 안주는 곳도 아닌데…….”
“솔직히 우리가 돈 보고 일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여기에 돈 필요한 사람이 어디있어?”
“……전 필요합니다만……”
한명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아니, 지금 핑크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긴 했는데, 적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뭔데?”
“우리 그래픽 리소스 부담이 큰 상황이잖아.”
“그렇지.”
그것은 백용현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컨셉의 SF게임을 개발하다 엎어진 프로젝트가 있다면 그 리소스를 인수해버리는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지.”
“아! 그렇군. 전에 그런 사례가 몇 번 있다고 했었지?”
“그렇죠. 애초에 국내 대형 개발사 중에 하나도 개발중에 자금난으로 엎어질 프로젝트를 인수해서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 않습니까.”
“맞아. 맞아. 기억나는군.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럼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다른 회사가 뭘 개발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조양길의 말에 백용현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뭘 그리 골똘히 고민해. 어차피 방법 없는데.”
“아니, 듣고 보니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뭔데?”
“예전에 맥슨에서 개발하던 SF 로봇 게임이 하나 있었거든?”
“맥슨에서 그런 것도 개발하나?”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납니다. 게임쇼에도 영상홍보 한 적이 있었죠. 중간에 엎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한명수는 백용현이 말한 게임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 그랬지.”
“왜 엎었나?”
“뭘 당연히 내가 엎었다는 식으로 말하나?”
“뻔히 네가 했겠지. 아니야?”
“……맞지. 돈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당시에는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모바일 쪽에 투자를 늘리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엎어버렸지.”
“참으로 우리가 죄가 많아.”
조양길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고 백용현 역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발자로 돌아와보니, 지금까지 자신들이 경영자의 관점에서 얼마나 많은 가능성 있는 프로젝트들을 아웃시켰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전에 내가 말한 것이나 하자고.”
“아! 그 인디게임 지원 펀딩?”
“그래. 아마 말 꺼내면 표세인이도 지갑을 열거다.”
“이제는 표대표가 자네보다 돈 더 많겠지. 그렇지?”
“뭐, 나야 이제 개털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물론 그들이 말은 그렇게 해도 개인 자산만으로도 인디게임 수십개 쯤 지원하고도 남을 만한 자산은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야기가 옆으로 샜군. 예전 일이라서 잊고 있었는데, 그것도 로봇물이니 배경이든 로봇 리소스든 가져다 쓸 요소들이 제법 많은 것 같은데?”
“그거 우리가 인수할 수 있겠나?”
“관심 있다고 하면 헐값에 내주겠지. 지금 맥슨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한 둘이 아니라서 정신 없는 상황이니까.”
맥슨은 현재 체질개선으로 진통을 겪는 중이었다.
모바일게임의 개발은 축소하고 AAA급 게임과 인디게임 개발에 나서겠노라 천명하고 불철주야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표세인의 등장과 맥베스의 성장을 계기로 국내 게임사는 대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것.
“그럼 한 번 연락해봐도 되겠나?”
“그래. 아마 한 번 해보라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조양길은 회사 전화로 맥슨 사업부에 연락했다.
-맥슨 사업부 심민구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 맥베……. 아니, 아니지. 나 조양길 팀장이라고 하는데, 직급이 어떻게 되시나?”
대뜸 상대가 직급부터 물어오는 통에 심민구는 살짝 언짢았다.
상대가 팀장이면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소속된 회사의 급에 따라서 직급의 무게감도 달라지는 법이다.
보통 직통 라인으로 팀장급이 연락을 한다는 것은 맥슨과 연계된 외주 하청 개발사의 팀장일텐데, 감히 맥슨의 대리인 자신에게 느닷없이 하대하며 직급을 묻다니!
하필 그가 입사한 이후 맥슨의 기세가 예전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맥슨은 맥슨이다.
얼마 전까지도 부동의 국내 게임업계 서열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맥슨이 아닌가?
심민구는 가까스로 짜증을 참으며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인 소속부터 밝히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나 기둥소프트인데, 혹시 거기 책임자와 연결 좀 해주겠나?”
이번에도 말이 짧다.
그런데 뭔가 익숙한 단어였다.
기둥소프트.
심민구는 잠시 그것이 백용현 회장의 퇴임과 연관이 있는 표세인이라는 남자가 소유한 회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맥슨은 백용현 퇴임 이후 표세인의 거동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결과 현재 기둥소프트는 게임을 일절 개발하지 않으며 개발팀조차 없는 투자 전문회사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장난하나, 또 시덥잖은 장난질이군.’
규모가 큰 회사에 줄을 대려는 욕심에 유명 회사의 이름을 어설프게 차용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아마도 상대 역시 정식 상호는 기둥소프트 엔터, 혹은 기둥 소프트 엔지니어, 뭐 이런 식으로 뒤에 슬쩍 다른 이름을 붙인 회사일 것이다.
그래놓고는 상급자에게 연결하면 아등바등 투자를 구걸할 것이 틀림 없었다.
‘예전에는 내가 옥석을 못 가린 덕분에 김부장님께 제대로 깨졌었지.’
과거에도 이런 사칭 회사의 요구대로 상급자와 연결했다가 된통 깨진 경험이 있었다.
“제 생각에 팀장급 부탁으로 연결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쪽이야 말로 상급자를 통해 다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심민구는 대뜸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짜식이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이런 소소한 우월감이 대기업에 다니는 소소한 혜택 중 하나 아니겠나?
“심대리 왜 그렇게 웃어?”
마침 김부장이 그를 바라보고 질문했다.
“별 것 아닙니다. 이상한 사칭 전화가 와서요.”
“하, 사칭 전화……. 정말 귀찮지. 잘했어. 이제 제법 대리 티가 나는 구만.”
“하하, 모두 김부장님 가르침 덕분입니다.”
심민구는 잠시 후 자신에게 닥쳐올 악몽을 예상하지 못하고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한편 칠층 마굴에서는…….
“내, 내 전화를 끊어?”
“왜? 뭐라는데?”
“아니, 책임자와 연결 좀 해달라는데, 상급자 불러다 연락하라는데?”
현재 기둥소프트의 체계상으로 조양길 위로는 표세인 하나 뿐이었다.
물론 직급상으로는 제임스가 있긴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재무담당이니까.
어쨌든 조양길의 황당한 표정에 백용현이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 직급 떼니까 조양길이 이름값이 동네 똥개만도 못하구만!”
“시끄러워, 너라고 별 수 있겠냐?”
“알았어. 알았어. 내가 할게. 큭큭큭.”
백용현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수화기를 빼앗았다.
“여보세요.”
-맥슨 사업부 심민구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에도 맥슨의 심민구 대리와 연결되었다.
“그래. 수고가 많군. 나 백용현인데…….”
-헉!
수하기 너머로 들려오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백용현은 씩 웃었다.
조양길을 물 먹여준 보답으로 회장직을 넘겨준 아들에게 특별 보너스라도 선물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제정신입니까?
“뭐?”
-감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전 회장님 성함을 들먹여? 너 회사 상호 뭐야!
“사, 상호? 나 기둥소프트…….”
-또 거기냐? 똑바로 말 안 해? 그리고 네 직급은 뭔데?
“나……. 직급이 뭐지? 그냥 사원인가?”
사원이라는 말에 심민구 대리는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조양길도 그렇고 백용현도 그렇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딱 봐도 자신의 아버지 뻘인데, 팀장에 사원이라니…….
‘이거 신종 보이스 피싱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심민구는 목을 좌우로 까딱이며 분을 끌어올렸다.
-이보세요. 영감님. 그 나이 먹고 할 짓이 그렇게 없습니까?
“뭐?”
-아니,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 같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장난질이야? 여기가 그렇게 만만해? 여기 맥슨이야!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전화할 만한 곳이 아니라고!
“자네……. 소속과 이름이 뭐라고 했지?”
-사업부 심민구 대리다! 뭘 어쩌게?
“물론 대리급이 내 목소리를 모를 수는 있지만, 일단 진정하고…….”
-끝까지 장난질이네? 한번만 더 장난 전화하면 경찰서에 신고할 줄 알아!
심민구는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전화기를 끊어버렸다.
“허…….”
“푸풋…….”
“크큭……. 아, 죄, 죄송합니다.”
조양길이 웃음을 터트리자, 저도 모르게 함께 웃음보가 터진 한명수가 급히 사죄했다.
하지만 웃음을 참기 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 모습이 백용현의 화를 더욱 들끓게 했다.
“맥슨 고객센터 악평이 자자한 이유가 이거였구만, 전임 회장에게도 이 정도라니……. 이야~ 맥슨 사업부 힘이 이렇게 센줄은 몰랐네?”
“1절만 해라……”
“그리고 뭐? 내 이름값이 뭐?”
“1절만 하라고…….”
백용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회장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내일 사업부 좀 들러야겠다.
훗날 세계 최고 수준의 친절을 자랑한다는 맥슨 고객센터 서비스 혁신 전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경력직의 클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