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85화 (285/346)

285.

‘이건 꿈이겠지? 그렇겠지?’

맥슨 사업부의 대리로 근무하는 심민구는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있다.

28만분의 1의 확률.

15만분의 1이라는 로또보다도 훨씬 낮은 확률이다.

‘우연히 걸려온 전화가 전임 회장의 전화일 확률은 과연 얼마일까?’

심민구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백용현과 조양길을 보며 그저 속으로 ‘이세계 마렵다.’라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대, 대체 무슨 일로…….”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임원들이 사업부 회의실에 옹기종기 모여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눈앞에 있는 백용현의 눈치를 살피며 진땀을 빼고 있었지만, 정작 백용현은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니들 지금 여기서 뭐하냐?”

“아, 아버지께서 오신다고 연락하셨잖습니까?”

“너 놀랄까봐 말한 것 뿐이지. 그리고 임원자리가 그렇게 한가한 자리야? 다들 일 안 해?”

백용현이 어떤 인물인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매의 눈으로 이 자리에 없는 임원들에게는 철저히 감점을 매길 인물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하러 가라는 말에 빠릿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감점.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결국 임원들이 달아나듯 우르르 떠나가고 난 자리에는 백용현과 조양길 그리고 사업부 김부장과 심민구 대리만이 남았다.

‘우리 딸 내년에 중학교 가야하는데…….’

회의실로 끌려오기 전, 김부장이 남긴 한마디가 묘하게 가슴에 남았다.

기본적으로 이직률이 높은 IT업계지만 게임 업계는 그 중에서는 탑급이었다.

더군다나 수틀리면 스튜디오 단위로 딜리트 버튼 누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폭군 백용현이 아니던가?

김부장과 심민구는 도저히 본인들이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심민구 대리.”

“예.”

“맥슨 직원으로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아. 아니, 훌륭해. 그리고 이런저런 사칭 전화에 시달리는 것도 이해하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심민구가 입을 열자 김부장은 당황했다. 이럴 때는 말이 모두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해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밑밥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나오는 것이 중요한 일일 텐데 이 시점에 툭 들이대다니?

역시 아직 대리급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대리급 인재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것은 부장인 자신의 책임.

김부장은 소리 없이 신음했다.

“하지만 일단 침착하게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을 해야지. 이번 일로 좋은 공부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심민구의 얼굴에서 핏기가 쫙 가셨다.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저도 모르게 손끝이 덜덜 떨렸다.

“클클, 은퇴한 전임 회장이 군기 잡는 모습도 보기 안 좋아. 이만하면 됐으니, 일 이야기로 넘어가자고.”

“그래야지.”

백용현도 하루가 지나서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임원진들이 알아서 사태를 파악하고 조치를 취할 것이다.

아마도 통화 대응 매뉴얼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동안 시끌시끌할 것이다.

“심민구 대리라고 했던가?”

“조, 조회장님께도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아니, 나 이제 회장 아니야. 팀장이야.”

“죄, 죄송합니다. 티, 팀장님.”

도무지 팀장이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는다. 어쩌자고 이런 괴물들에게 팀장이니, 사원이니 하는 직급을 붙여 놨단 말인가?

하다 못해 명예 회장이라거나, 고문과 같은 특별한 직급을 달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새삼 본 적도 없는 표세인이라는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면 그쪽 부담만 커지겠지. 나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용건만 말하지. 예전에 개발 도중 취소된 로봇 게임 그래픽 리소스. 그거 우리가 인수했으면 하네.”

“이, 인수요?”

김부장은 당황했다.

“그래. 인수.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놀랄 일이라기보다…….”

그냥 보내라. 한마디면 알아서 보낼 것을 굳이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아! 그러고보니 이 멍청이가 전화를 그딴 식으로 받아버렸지.’

생각할수록 심민구에 대한 원망이 커져간다.

“아무튼 나는 그것이 필요하네. 어차피 버린 프로젝트야. 그것 좀 우리에게 줘.”

“드, 드려야지요.”

“아니, 인수한다고 해야지. 주라고 하면 저 친구들이야 그냥 무턱대고 바치겠지.”

조양길이 탐탁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백용현도 자신의 말 실수를 깨닫고 머쓱하게 턱을 긁적였다.

“들었지? 인수야. 인수. 이거 정상적인 업무야. 이해하지?”

전임 회장이 타회사의 사원이 되어서 나타나, 엎어진 프로젝트 리소스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이 정상적인 업무라 강조한다.

‘어렵다. 여보, 은주야. 나에게 힘을…….’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말로 이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부담감에 김부장은 그저 죽을 맛이었다.

인수라고 한다면 금액 부분을 논의해야 할 것인데, 애초에 얼마전까지는 자신의 것이었고 이제는 아들의 회사다.

백용현이, 그것도 망한 프로젝트 리소스를 인수하겠다는데, 거기에 가격표를 붙일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이 과연 이 회사에 존재하기는 할까?

“김부장님.”

“예? 예.”

갑작스러운 조양길의 부름에 김부장은 살짝 어눌하게 대응했다. 그만큼 머리가 복잡하다는 것.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건 그냥 기둥소프트와 맥슨간의 거래입니다. 백용현 이 친구는 잊으세요. 그냥 하던대로, 엎어진 프로젝트의 리소스에 대한 가격만 책정해주시면 됩니다.”

조양길이 차분히 상황을 되짚어주자, 김부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김부장은 잠시 계산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일은 자신 선에서 결정날 것은 아니다.

하지만 1차 담당자로서 어느 정도 견적을 검토하고 논의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었다.

“일단 말씀하신 프로젝트의 리소스양은 상당합니다. 사실 개발 중단의 사유는 다름 아닌 마지막 채산성 검토에서 무너진 것이지, 개발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니까요.”

능숙하게 값을 후려칠 수 없는 이유부터 늘어놓는 김부장의 말에 조양길과 백용현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래야 할만하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런 수싸움! 긴장감!

이것들을 느끼고 싶었지 않았나?

“어쨌든 폐기 수준의 리소스 아닌가?”

“글쎄요?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귀사에서 개발 중인 프로젝트의 컨셉에 따라서 해당 리소스의 가치도 달라질 수 있기도 하고…….”

“어허, 그런 식으로 어물쩍 떠보는 것은 곤란하지. 게다가 모르는 일? 맥슨이 한번 엎은 프로젝트를 살린 전적이 있나? 내가 알기로는 전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마터면 대체 회장님은 누구 편입니까, 라고 말할 뻔했다.

“우리가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구로 보고 등쳐먹을 생각으로 달려들면 곤란해. 딱 적정가만 계산해서 논의하자고.”

“클클, 그렇지. 애초에 국내 업계에서 한번 사장된 프로젝트가 부활하는 경우 자체가 거의 없지.”

애초에 자본이 달리던 시절부터 무언가를 적정가에 매입한 전례가 없던 노괴물들이었다.

초기에는 돈이 없어서, 나중에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그들은 언제나 염가로 후려쳐 매입하는 방식 외에는 알지 못했다.

“계산기 다시 두드려보자고.”

백용현은 나이에 맞지 않는 건치를 드러내며 상대를 압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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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슨에서 개발 중단되었던 게임의 리소스를 매입하셨다고요?”

느닺없이 내 방을 방문한 조팀장은 나에게 뜬금 없는 소식을 전해왔다.

“클클, 그래. 백용현이가 힘 좀 썼지.”

“뭘 그렇게까지. 우리 조팀장도 함께 한 일이잖아.”

“팀장이 팀원 공로를 가로채서 쓰나. 이건 자네 공이지. 자네가 현재 우리 팀 최고 주가를 올린 셈이야.”

“하하? 그런가? 내가 어디에 가져다 두어도 제 몫을 하는 타입이긴 하지.”

두 노인은 서로를 치하하며 껄껄 웃었다. 나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다음 다시금 그들이 전해온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이야, 이거 정말 큰 건 하신 것 맞네요.”

“그렇지?”

“네.”

아닌게 아니라 당장 적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 수준의 리소스들이었다.

애초에 근미래적 디자인의 배경 같은 것이야 사실 비슷비슷한 느낌이라서 레이어나 연출 효과만 다르게 가져가면 어느 게임에 등장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로봇 디자인 측면에서도 그냥 그대로 이용할 수도 있을 정도 수준의 퀄리티였다.

“이거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상당한데요?”

“그 상당한 퀄리티 때문에 개발비 단가가 안 맞을 것 같아서 접으라고 했었지. 하지만 뭐 그때 시장 상황을 고려해보면 크게 틀린 선택은 아니었어.”

백용현은 뭔가 찝찝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이거 단가가 어떻게 되죠?”

엎어졌다고는 해도 어쨌든 IP하나를 인수하는 성격의 거래가 될 것이다.

마냥 헐값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 상황에서 시간과 인력을 감소 시킬 수 있다면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상식선에서 거래가 될 거야. 어쨌든 상대가 백용현이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맥슨에서 이 녀석 등골을 뽑아 먹기라도 하겠나?”

“맥슨이 아니라 어디라도 내가 당하는 성격……. 아, 여기서 할 말은 아니군.”

백용현이 힐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돌렸다.

“정말 무섭네요.”

“뭐가?”

“이래서 경력직, 경력직 하는 거구나 싶네요. 설마 이런 방식으로 그래픽 업무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습니다. 정말 크게 배웠습니다.”

설마 비슷한 컨셉의 엎어진 프로젝트의 리소스를 인수하다니! 세상에 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실현해 낼 수 있을까?

역시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칠층 팀원들의 연륜은 무시할 수가 없다.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클클. 우리 대표님께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하하. 대표에게 감사인사를 받게 되다니,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흠흠, 이거 특별 상여금이라도 고려해야겠는데요?”

“상여금?”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직접 성사까지 시키셨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되잖아요?”

“푸하하하! 평생 상여금 주는 것만 해봤지, 받는 것은 처음이구만!”

백용현은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도 상여금은 잠시 기다려봐.”

“왜요?”

“아직 거래가 끝난 것은 아니잖나. 계약서 도장 찍을 때까지는 방심하면 안되지.”

“그렇지. 그게 맞는 말이지.”

조팀장의 말에 백용현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네요. 딱히 후려칠 생각은 없지만 너무 비싸게 부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과연 맥슨은 얼마를 제시할까?

“상여금은 우리 예상 금액에서 얼마나 낮아지는 지를 따져보고 책정하면 되겠지.”

“하하하. 그렇게 많이 주려고?”

“한 푼도 못 받을 수도 있지.”

“음……. 설마 그렇게 까지?”

상여금 액수 따위에는 별 관심 없는 백용현이었지만, 막상 코앞까지 도착했던 상여금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심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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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거 어쩝니까?”

“으음…….”

사업부의 김부장이 내민 기안서를 보고 재무팀의 수장인 박이사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사님 이거 지체하면 안되는 일입니다. 자그마치 백용현 전회장님이……. 서둘러 임원회의로 가져가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지금 문제가 묘하다고.”

“네?”

“백원성 회장님과 다른 임원들이 그냥 우리 쪽에 통째로 떠넘겨 버렸어.”

“네?”

“다들 백용현 전회장님과 엮이고 싶지 않은 게지……. 젠장, 제대로 폭탄을 짊어진 셈이야.”

“그, 그래도 결론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꾸 채근하지마! 애초에 금액표가 이게 뭐야! 대체 제안을 몇 개나 하는 거야?”

“서, 선택은 이사님 몫이지요.”

도저히 적정가를 정할 수가 없던 재무팀은 경우의 수를 따져 다수의 플랜을 작성해 버렸다.

“그냥 공짜로 넘겨버리면 안 되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차라리 공짜로 넘겨주고 없던 일처럼 지나갈 수는 없을까?

그렇게 맥슨 재무팀은 백용현 전 회장의 상여금을 미친 듯이 높이려 애(?)쓰고 있었다.

시, 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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