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이런것도 오랜만이군.”
“그렇지. 예전에는 종종했었는데.”
조양길과 백용현은 자신들을 비추는 카메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과거에는 IT업계와 게임 산업을 주도하는 산업 역군 같은 느낌으로 정부차원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쏟았었다.
비교적 젊었던 그때에는 무수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었다.
물론 당시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대부분 거절하기는 했었지만, 그럼에도 거절할 수 없던 인터뷰 요청도 제법있었다.
“그래도 미튜브 출연은 처음이지 않나?”
“그렇지. 우리때는 이런 것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면 표세인이가 나를 처음 놀라게 했던 것도 미튜브였지.”
“응? 그 친구 미튜버도 했었나? 어쩐지 반반하게 생겼다 했더니…….”
“무슨 헛소리야. 대뜸 미튜브를 이용해서 게임 홍보를 기가막히게 해내더군.”
“아아, 기억나. 그때는 솔직히 맥베스 본사 차원에서 기획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사실 뭐 다들 홍보에 돈 무진장 쓸때니까…….”
“그거 단돈 1억이었어.”
“뭐?”
“정말이야.”
“그 친구는 마케팅을 했어도 대성했겠군.”
백용현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뭐 난놈은 난놈이지.”
조양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그녀석이 했던 것은 우리도 전부 해야지.”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인터뷰 요청을 냉큼 수락한 이유가 그거였구만? 싫다는 나까지 달달 볶더니.”
조양길 이상으로 이런 인터뷰 같은 것에 질색하는 것이 백용현의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제임스의 이야기에도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조양길이 다그치는 덕분에 이렇게 끌려오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도전자라는 것을 명심해. 상대는 표세인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걸 내가 모르겠나? 그 친구에게 된통 깨진 덕분에 회장 자리까지 내놓았어.”
“그거야 어차피 은퇴 예정이었던 것을 조금 앞당긴 셈이고. 우리도 명색이 1세대 개발자야. 저력을 보여줘야지.”
“그래. 그래야지. 그건 반드시 해야지.”
맨손으로 시작해서 대기업 회장까지 도달했던 저력이 있는 두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노년의 패기있는 도전! 정도의 타이틀만 얻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백세 시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기준으로는 아직도 자신들은 한창이었다.
“이제 준비가 됐습니다.”
누군가의 말과 함께 미튜버 김정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
과거 게임 개발사의 개발자 출신이었던 덕분에 안면이 있던 백용현이 김정학을 알아 보았다.
비록 회사가 달랐던 탓에 지나가듯 몇 번 본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안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그럼. 내가 사람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기억하지.”
백용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선 제 방송의 특성상 딱딱한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 보다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될 겁니다.”
“우리도 그게 편하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큐사인이 떨어지자, 김정학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두분 모두 국내 정상급 게임 개발사의 회장직을 내려놓으시고 곧장 기둥소프트에 입사하시고 개발자로서의 인생 2막을 오픈하셨는데, 그 포부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하, 우리 같은 퇴물들이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에 사람들이 손가락질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에이~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할아버지가 만들었든, 갓난아기가 만들었든 결국 게임이 재미있냐, 없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말 잘하는군. 맞아. 그리고 우리가 지금 개발중인 게임은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 틀림 없지.”
“클클, 그걸 우리 입으로 말해서야 쓰나.”
“멋지십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그렇게 본격적인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
*
*
나는 오늘도 정신없이 기획안을 검토하고 내가 맡은 파트의 기획서를 작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홍기도 녀석이 다른 비서와 함께 이동형 스크린을 내 방으로 가져왔다.
“오케이. 여기면 되겠네요. 소파도 옮기죠.”
“네.”
“?”
뭐하는 짓이지? 다른 비서도 함께 있기 때문에 대뜸 뭐라 하기가 좀 그래서 그냥 홍기도 녀석이 하는 일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스크린을 설치하고 소파를 옮기고 뒤이어 빔프로젝터까지 완비되었다.
그래서 이제 준비가 끝난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팝콘과 콜라까지 등판했다.
이쯤되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지금 뭐하냐?”
“아니, 지금까지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내가 알아야 했던 거냐?
“그거 알아?”
“뭐요?”
“나 이 회사 대표다?”
“그거 아세요?”
음……. 내가 기대한 답은 대표실에서 지금 무슨 수작을 하냐는 것이었는데, 질문으로 돌아오다니.
“뭔데?”
“저 대표님 비서에요.”
“그렇지. 그러면 이제 설명이 들어와야지?”
“진짜 실망이네요.”
실망을? 네가?
내가 아니라?
“저는 지금 대표님을 위해 좋은 비서가 되려고 노력 중인데, 왜 대표님은 좋은 대표가 되려고 노력하시지 않나요?”
“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일단 이 녀석이 좋은 비서가 되려고 뭘 하는지는 전혀 상상도 안되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니 궁금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좋은 대표라니!
그래. 나는 좋은 대표가 되고 싶다.
“부하직원의 행동을 바로 간파하셔야지요. 아! 이 녀석이 나를 위해 이렇게 애쓰는구나. 하고 메모하신 다음에 홍기도 한우 예약. 뭐 이런 느낌?”
“쉬린칭이 한우 안사주냐?”
“걔 고기 잘 못굽는 다니까요?”
“네가 구워줘 인마!”
“다른건 다 해주지만, 그건 안돼요. 저 먹기도 바빠서요.”
정말로 영양가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대화다. 이런 걸 길게 끌 필요는 없지.
“그래서 정말로 뭐야? 왜 애꿎은 다른 비서까지 동원한 거야?”
“스크린 무거워서 혼자 옮기기 힘들어요.”
“그럼 나를 부르지. 바쁜 사람들 건들지 말고.”
“대표님이 대표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에요.”
“쩝. 대표라고 스크린도 못 옮길 건 없잖아. 내가 힘 제일 센데.”
“다음에는 그럴게요. 마침 딱 곁을 지나가기에 잡았어요.”
“그래서 이거 뭔데. 월드컵 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이게 뭐야? 팝콘까지 준비할 일이 있어?”
“진짜 너무 하시네요. 대표의 업무라는 것이 개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까부터 왜 이렇게 뼈를 때리냐. 나 아프게 하면 넌 망가지는 거야. 자신 있냐?”
내 반 협박성 말에도 홍기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빔프로젝터를 노트북에 연결하고 인터넷을 켰다.
“이제 그만하시고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뭔가 찝찝하긴 한데, 이 정도까지 하니까 궁금해서라도 자리에 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뭔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제 곧…….”
-똑똑.
“왔다!”
갑작스러운 노크와 함께 홍기도가 슝하고 달려갔다.
“설마 배달 음식이라도 시켰냐?”
“네. 배달 왔어요.”
“헐!”
어이 없게도 연아가 양손에 치킨이 담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일단 다른 것은 모르겠고, 회장님께 치킨 심부름을 시켜도 되는 이유를 설명해봐. 조리 있게 설명하지 않으면 너 오늘 치킨 힘들게 먹어야 할 거다.”
“아니야. 앞에서 이비서님이 들고 계시기에 내가 받아온 거야. 그리고 기도씨 부탁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그쵸?”
“그쵸.”
홍기도와 연아가 서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쉬린칭도 그렇지만 한동안 자주 어울린 탓인지, 아니면 홍기도 특유의 붙임성 덕분인지 요즘 부쩍 친해진 것 같다.
“그래도 회사에 있을 때는 조심해라.”
“그런 말 하기 전에 회장님 앉으시게 옆으로 좀 비키시죠. 어딜 대표 따위가!”
화나는데 맞는 말이라서 뭐라 할 수가 없다.
“앉으시죠. 회장님.”
“둘은 맨날 이러고 노는구나? 즐겁게 일하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이런거라도 없으면 이 녀석 데리고 못 있지. 그런데 왜 온 거야? 설마 저 녀석이 불러서?”
생각해보니 회장을 불러다 놓고 이게 뭐하는 거야?
“불러서 온 것은 맞는데, 오빠 몰라?”
“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홍기도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대표일 제대로 못하죠? 그쳐? 저는 비서일 잘하고요.”
홍기도의 말에 연아가 깔깔 웃었다.
“그렇네요. 홍기도씨는 좋은 비서고, 오빠는 나쁜 대표네.”
“그렇다니까요.”
아니, 정말로 무슨 일인데…….
“지난번 아빠 인터뷰한 것 기억나?”
“아! 그거 오늘 업로드 되는 거였어?”
“어쩜 대표가 그것도 몰라요?”
“그러게 어쩜 대표가 그것도 몰라?”
홍기도와 연아는 건수 하나 건졌다는 듯이 연달아 나에게 원투를 날렸다.
그래도 이번 건은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네가 어쩐일로 여기에 있냐? 이런건 칠층 가서 네 동료들과 봐야 하지 않냐? 블랙?”
내 말에 홍기도가 멈칫 굳었다.
“블랙? 그게 무슨 말이야?”
“장인어른과 팀원들이 직급을 떼고 닉네임으로 부르기로 하셨데, 레드, 블루 뭐 이런식으로.”
“좋은 생각이네.”
“그리고 저 녀석은 거기에 속한 블랙이야. 우리 편 아니야.”
“…….”
내 말에 홍기도가 입을 딱 다물었다.
“기도씨가? 오빠 비서인데?”
“하하하, 치킨 식습니다. 사랑하는 두 분을 위해 제가 닭날개를 양보하죠.”
“다리를 양보해라 인마. 날개 먹지도 않는 녀석이…….”
“크윽……. 하나는 양보할게요.”
“그래요. 기도씨 드세요. 저는 닭다리 안 먹어도 돼요. 전 가슴살이 좋아요.”
“퍽퍽살은 원래 닭고기 잘 못 먹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데.”
그건 솔직히 동의한다.
“아무튼 제 자리도 만들어 주세요.”
홍기도 역시 내 옆으로 파고들며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오, 이제 시작하네요.”
나도 잽싸게 닭다리를 씹으며 화면에 집중했다.
“게임계에는 스타 개발자라 불리는 네임드들이 있다는 것은 다 아실 겁니다. 하지만 그런 네임드 개발자들 보다도 사실 업계에서 더 부러움을 사는 것은 다름 아닌 게임 개발사 오너겠죠!”
“지금이야 게임 개발사 오너라고 하면 그냥 욕을 바가지로 먹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옛날에는 또 그게 아니었자네~”
“펜티엄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당연히 요즘 젊은 분들은 펜티엄이 뭔지 전혀 모르시겠지요.”
“요즘 같은 하이엔드 PC가 아니라 전원 버튼 누르고 과장 조금 보태서 컵라면 물 붓고 싹 비운 후에 PC를 시작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이거죠!”
“그렇게 그 시절 열악한 기술력과 개발환경에서 지금과는 다른 꿈과 희망이 넘치던 MMORPG를 비롯한 숱한 국내 명작 게임을 개발해온 일등공신들이 지금의 개발사 오너분들 같은 1세대 개발자들이라 이거지!”
“국내 게임에 명작이라는 말이 붙으니까 이상하죠? 하지만 옛날에는 그게 아니었다니께~”
“그런데 갑자기 왜 기업 오너들 이야기를 늘어 놓느냐고? 아시는분들이 계시겠지만, 근래 국내 게임 업계에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단 말씀!”
“3M중에서 한 곳을 제외한 두 곳의 회장님들이 자리를 내려놓고 느닷없이 개발자 컴백을 선언하셨다~ 이거죠!”
“이건 한번 백그라운드 훑어보지 않을 수가 없자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국내 최고령! 최고 자산, 최고 경력의 몬스터 개발팀!”
“기둥소프트의 조양길 팀장님과 백용현 개발자자를 모셨습니다!”
특유의 유창한 언변으로 구독자의 관심을 단숨에 끌어 모은 김정학의 소개와 함께 드디어 화면안에 조팀장과 백용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이거 뭔가 이상한데요?”
“이거 네가 지시했어?”
“오빠가 한 거 아니야?”
조팀장과 백용현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댓글창이 불타기 시작했다.
-백회장님! 멋지십니다!
-역시 인물은 우리 백회장님이시지!
-장난하냐? 조회장님 핏 안 보이냐?
-애초에 팀장과 일반 직원이지 않음? 클라스 딱 드러나죠?“
-수십 년간 맥슨이 언제나 위였거든?
-점유율 90분 우위여도 결국은 막판에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맥베스 승리! 탕탕!
-장난치나!
-장난은 그쪽이 치는 것 같은데?
이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난데없이 붉은색과 푸른색의 댓글들이 미친듯한 키보드 배틀을 시작했다.
계륵이라고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