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시작해라.
“예!”
표세인의 지시를 받은 염종수는 통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그는 표세인의 지시를 받은 대로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부정에 관련한 자료들을 빼곡하게 모아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캐보니……. 정말 많기도 하군요.”
오정열은 눈앞에 정신없이 늘어놓은 게임물관리위원회에 관련된 부정의 자료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시겠지만, 이번 일도 형님의 특별 부탁입니다. 제대로 해야 합니다.”
염종수의 말에 오정열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표세인 대표님만 관련되면 늘 그렇듯이 사람이 달라지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특유의 서늘한 시선으로 필요하지 않다면 하루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던 염종수였다.
그런 사람이 표세인의 전화 한 통화를 받은 후에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것처럼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렇습니까?”
어렵쇼? 이제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어?
오정열은 염종수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얼마 전까지는 형님과 이렇게 다시 연락하거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좀 기쁜 것은 사실입니다.”
염종수의 말에 오정열은 잠시 팔짱을 끼고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제가 표세인 대표님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 분도 이런 계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기요?”
“제가 감히 표세인 대표님을 평가할 수야 없겠지만, 제 생각에 그분은 누구를 오래 미워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아끼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아마도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럴까요?”
“솔직히 지난번 용역 업체 건부터 시작해서, 그분은 철저히 불법적인 일은 안된다며 선을 그으셨지요. 그러면서도 계속 염실장님에게 일감을 던져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제가 일을 좀 잘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염종수의 말에 오정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물론 염실장님이야, 일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신 분이지요. 요즘 우리가 음지 마케팅 전문으로 소문이 날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문의가 쇄도한다고요? 저도 심부름 센터 접고 이쪽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당부드리지만, 이쪽 일은 어디까지나 표세인 형님 부탁에 한해 움직여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메스컴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짜라시 업자들을 이용해 물밑 선동을 일으켜 진짜 메이져 메스컴까지 흔드는 것에 성공하면서 알음알음 해당 업계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오정열은 그들 조직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양지 쪽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않는가?
그들이야 배후에 조직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도 큰 문제는 없지만, 행여라도 표세인에게 흠집이 나는 것은 큰 문제다. 그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간의 눈은 그렇게 바라봐 주지 않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사실 저야 자료 정리하고 지시내리는 것이 전부지, 실제 업무는 염실장님이 주도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 깜냥으로 찌라시 업자 놈들을 지휘하는 것은 무리지요.”
찌라시 업자들은 약간의 빈틈만 보여도 자신들과 닿아있는 선에 오히려 역정보를 흘리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염종수뿐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이처럼 완벽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손한 말투인데도 묘하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였다.
이것이야 말로 표세인은 알지 못하는 염종수의 섬뜩함이었다.
애초에 이런 남자가 어찌 표세인 앞에서라면 순한 양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두 분이 예전에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함께 운동한 선후배이자, 특전사 선후임 관계까지 쭉 이어졌으니 무척 가깝겠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실장님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표세인 대표님께 꼼짝을 못하는 겁니까? 은혜 갚는 개념으로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대체…….”
다른 것은 몰라도 염종수라면 대한민국 뒷 세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었다.
주먹은 물론이고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가 더해져 누구도 그를 적으로 돌리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염종수가 일반인에 불과한 표세인에게 쩔쩔매거나 때로는 표세인의 다소 과격한 스킨쉽(?)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캐릭터 붕괴도 이런 캐릭터 붕괴가 없다는 느낌이다.
“표세인 형님을 처음 보셨을 때,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훤칠하고 인상 좋고……. 뭐 그런 느낌이죠.”
“저는 소싯적부터 운동 좀 하던 녀석이라 예전에 표세인 형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무척 건방진 캐릭터였습니다.”
“염실장님이 건방진 캐릭터였다……. 그건 잘 매칭이 안되는군요.”
염종수는 비록 건달로 분류되는 종류의 인간이었지만 건들거리는 이미지와는 철저히 거리가 먼 캐릭터였다.
“어려서부터 없이 자라서 독기로 가득했습니다. 중고등학교때부터 인근에 거들먹거리는 녀석들 찾아가서 굴복시키는 재미로 살았지요. 나름 약자를 지키는 정의의 사도 코스프레에 심취했던 시기랄까요? 뭐 사춘기라고 할 수 있지요.”
“중2병이 그런 쪽으로 발현되셨었군요.”
“중2병?”
“아, 아니 기분 나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염종수가 되묻자 오정열은 찔끔하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이야 표세인과 얽히면서 염종수와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오정열은 조직내 서열로 보나 개인 기량으로 보나 염종수와 맞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화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그 말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염실장님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누구겠습니까?”
“아! 표세인 대표님. 큭큭큭.”
오정열은 이해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렇게 대학까지 들어갔는데, 막상 가보니 너무 프리하더군요.”
“훈련이 쉬웠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쓸데없이 기강 잡는 답시고 난리 부루스 추는 선배들이 없더란 겁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기는 했는데…….”
염종수는 과거를 회생했다.
*
*
*
“형. 수환이 새끼 그냥 놔둘 겁니까?”
염종수는 자신의 빡빡 깎음 머리통을 벅벅 긁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냥 안 놔두면, 협회장 손자랑 한판 붙게?”
“아주 자근 자근 밟으면 절대 누구한테 못 꼰지르죠. 제가 그런 거 전문 아니겠습니까?”
염종수의 말에 표세인은 피식 웃었다.
“고등학교 때 좀 날리셨어요?”
“지금도 염종수라고 하면 인천에서는 대충 다 알아 먹죠?”
“푸하하하! 대학생 씩이나 돼서도 중2병이냐? 인천 인구가 몇인데, 대충 다 알아 먹긴 뭘 알아 먹어. 네가 연예인이냐? 크크큭.”
표세인의 웃음에 염종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사람이 소탈하고 미움 사지 않는 성격인 탓에 염종수도 표세인에게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 놀림을 당한다 싶으면 금방 열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고 치지 마라. 우리는 그냥 시합에서 성적 낼 생각만 해야 한다.”
“형은 체급이 다르니까 그런 거죠. 솔직히 실력도 안되는 새끼가, 감독이 싸고 돌아서 우리는 한자리 빼고 경쟁해야 한다니까요?”
염종수의 말에 표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더더욱 열심히 해라. 당장 뒤집을 수 없는 일에 열 올려봐야 컨디션만 흐트릴 뿐이지.”
“아, 씨발…….”
흔치 않은 헤비급의 절대적인 차세대 유망주인 표세인의 말이라서 였을까? 염종수는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세인아!”
안경에 체크 무니 셔츠. 한 눈에도 공대 찌질남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
“오늘 6시 반에 알지?”
“어! 물론이지!”
“오늘 기대하라고!”
“감사합니다!”
장난이긴 하지만 고개까지 숙여 인사하는 표세인을 보며 염종수는 어이가 없었다.
“형님은 참 저런 애들이랑도 잘 놀아주시네요?”
“저런 애들? 놀아줘?”
“네. 솔직히 우리는 좀 급이 다르지 않습니까?”
염종수의 말에 표세인이 피식 웃었다.
“너랑도 놀아주잖아.”
“네?”
염종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표세인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약 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임마 쟤 나랑 동기인데,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랑 둘이 있을 때 어느 정도 까부는 것은 넘어가지만 선 넘으면 다친다. 횡단보도는 네 안전을 위해서 지키는 거야. 이 말 명심해.”
이 시기의 염종수는 대련이 아닌 싸움이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부심에 넘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표세인에게는 함부로 까불 수가 없었다.
“네. 죄송합니다.”
“그래. 어서 이거 마저 널고 들어가자.”
“애초에 다른 1학년 애들 시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형까지 이런 걸 하세요.”
빨래는 대대로 1학년의 일이건만, 애초에 2학년인 표세인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 네가 왕따라서 내가 챙겨주는 거잖아. 다들 너 싫어하니까.”
“이 새끼들이!”
“그만 까불고 마저 끝내. 나 6시까지 집에 가야 해.”
“아까 말씀하신 것 같은데 뭣 때문에 그러시는 거에요?”
“피시방 갈 거다. 새로운 게임 나왔거든. 쟤가 이래 봬도 우리 학교에서 그 게임 최고 고수야. 내 사부님이라고 할 수 있지. 나도 다이아 한번 달아봐야지. 흐흐흐.”
“사부님?”
저런 찐따를 사부님이라니? 대체 이 사람은 허우대는 멀쩡한데 뭐가 잘 못된 걸까?
염종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표세인을 바라보았다.
*
*
*
“씨바아알!”
오늘도 협회장 손자인 이수환을 감싸고 도는 감독에게 눈초리가 곱지 않다며 된통 깨진 염종수는 인근 호프집에서 울분을 터트렸다.
이대로라면 자신 대신 이수환이 대신 출전 자격을 얻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염종수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요즘 맨날 그러는 것 같다. 괜찮은 거냐?”
“괜찮겠냐? 아, 진짜 돌아가시겠네. 오늘도 세인이 형은 사람 속도 모르고 놀리기만하고……. 근데 이상하지 않냐?”
“뭐가?”
“세인이형 대련할 때는 그냥 괴물인데, 오늘 빨래도 지원하고 대체 왜 그래? 그렇게 가오 구기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어? 너 모르냐?”
“뭘 몰라?”
“우리 태권도부가 왜 다른 부에 비해서 기강 잡는 선배들이 없는지?”
“그게 뭐가 이유가 있어? 그냥 성격적으로 그런 사람이 없는 것 아니야?”
“우리 형한테 들었는데……. 표세인 선배가……. 옛날에…….”
“잠깐.”
갑자기 염종수가 친구의 말을 끊고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뭐야, 뭘 쳐다봐!”
살짝 취기가 오른 염종수는 자신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체격 좋은 남자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안 그래도 누구 하나만 걸려라 싶은 상황이었다.
“니 태권도부제?”
“나 아냐?”
“니는 모르고, 내 유도부 3학년이다. 함 봐줄테니까는 퍼뜩 대가리 함 박고 돌아가 술 무라.”
유도부 3학년이라는 말에 염종수의 곁에 있던 다른 친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태권도부가 다른 운동부에 비해 기강을 세게 잡지는 않는다 해도, 다른 학부 선배와 시비가 붙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가리? 너 씨발 지금 뭐라고 했냐?”
발끈한 염종수가 벌떡 일어섰다.
“와, 미치겠네. 니 표세인이 후배 아이가?”
“맞는데, 뭐.”
“고마돼따. 내가 표세인이 후배랑 뭘 어쩌겠노. 고만하자. 가 술 무라.”
유도부 3학년은 만사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근데 이 미친 새끼가…….”
상대가 머뭇대자, 오히려 발동이 걸린 염종수가 성큼성큼 다가가 3학년의 멱살을 잡았다.
“쫄리면 니가 대가리를 박아야지, 이게 어디서 완장질이야.”
“하! 마, 우숩구로.”
3학년은 그렇게 피식 웃고서는 체격과 맞지 않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염종수의 팔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대리 꽂았다.
“끄으윽…….”
너무 방심해서 어설프게 접근한 것이 문제였다. 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고통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넌 죽었다. 이 개새끼야…….”
“와, 표세인이 후배 중에 이런 양아치가 있을 줄은 몰랐네. 마, 니 그러다 진짜 골로간다?”
“좆까……. 넌 오늘 뒈졌어.”
염종수는 몸을 일으키며 제대로 자세를 취했다.
“마, 니 주변 함 돌아보고 지껄이라.”
“뭔 개소……. 씨바…….”
아무래도 오늘 유도부 회식이라도 있던 모양이었다.
자신들 테이블을 제외하고 죄다 근돼체형의 빠박이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종수는 이를 악물었다.
‘씨바, 오늘 죽었구나.’
아는 사람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