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와, 살벌하네.”
평소에는 존재하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던 사내 법무팀이 우르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을 보며 홍기도는 짧은 감탄을 터트렸다.
“무슨 일 있어?”
남궁원의 질문에 홍기도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미안하지만, 일반 사원에게 함부로 말해줄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말이지.”
“손가락 부러지고 싶냐?”
“안돼. 다치면 쉬린칭한테 혼나.”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서 무슨 일인데?”
“대표님이 처음으로 법적공방을 시작하셔서 저렇게 난리가 난거야.”
“법적공방?”
“응. 게임물관리위원회를 정식으로 고소하신대.”
“고소?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열심히 게임 개발에만 몰두하던 탓에 표세인과 게임물관리위원회와의 갈등을 전혀 알지 못한 남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대표님 괜찮으신거죠?”
“당연히 괜찮지. 마왕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것은 용사뿐이라는 것이 상식이잖아?”
“마왕? 용사?”
남궁원은 요즘 사내에 돌아가는 소식에 상당히 무딘 편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데?”
“이건 비밀인데……. 게임물관리위원회에서 뒷 돈을 요구해서 대표님이 화가 나서 게임물관리위원회 자체를 없애버린다고 하셨어.”
“어? 그게 가능해?”
기타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일단은 공공기관이다.
이것을 일개 개인이 없애버린다는 것이 가능한가?
“말로는 국민들이 움직이면 정부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올바른 사회라고 하시더라고.”
“아니, 그거야 이론적인 이야기고…….”
“뭐 어차피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우리에게나 무거운 이름이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게 뭐냐 싶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기관이잖아?”
“난리도 아니네……. 그런데 언제 이런 일까지 벌이신 거지? 그러면서도 기획서는 계속 팍팍 보내시던데?”
“일을 취미처럼 하시는 분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때였다.
“홍기도 비서님?”
“네?”
낮선 얼굴의 남자였다.
사내에서는 보기 드문 말쑥한 슈트 차림의 남자.
“법무팀의 민형기 팀장이라고합니다.”
“네. 그러시군요.”
“?”
보통은 네 저는 000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뭐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민형기가 살짝 당황했다.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를요? 왜지?”
“……대표님 비서 아니십니까?”
“맞는데, 왜 찾지?”
“???”
민형기는 혼란에 빠졌다.
“어쨌든 함께 가시죠. 최대한 빠르게 고소장 접수하고 일을 진행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전속결이 시급합니다.”
“으음……. 뭔가 귀찮아 질 것 같은데?”
“그만 까불고 빨리가! 이 월급 도둑아!”
“훗, 이 몸의 경지는 이미 일개 도둑을 넘어섰지. 도성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한다.”
“쉬린칭 있을 때는 그래도 좀 정상인 것 같더니, 애가 점점 더 이상해지네.”
“언니, 그건 아니죠.”
“어?”
“원래 좀 이상……. 아니, 죄송합니다.”
함송희의 깍듯한 사과에 홍기도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순순히 민형기 팀장 손에 이끌려 회의실로 향했다.
*
*
*
“왔냐?”
“왜 부르셨어요?”
대표에게까지도 터무니 없이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는 홍기도의 모습에 민형기는 또 한번 당황했다.
‘대체 이 사람은 뭐지?’
의외로 홍기도는 사내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쏘다니는 것 같아도 좀처럼 제 영역을 벗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
“네. 도움이 필요하다.”
“무슨 도움이요?”
“지난번에 총회 때 용역업체와 일했던 것 기억하지?”
“아! 그때 문지기 역할 재미있었죠.”
“그게 재미있었냐?”
“마치 클럽 수질관리 하는 느낌이었달까?”
회사를 두고 클럽이라니……. 그것도 대표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민형기는 여전히 놀람을 감출 수 없었지만, 막상 표세인과 홍기도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법무팀에서 당분간 그쪽과 내가 직접 연락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네가 좀 중간 다리가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10kg?”
“안 남기고 다 먹을 수나 있겠냐?”
“인원수 맞추면 되죠. 세종이만 불러도 잔반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나요?”
“우리 집 식충이가 많이 먹기는 하지만…….”
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민형기는 살짝 넋을 잃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앞으로 네가 염종수 녀석과 연락을 담당해다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홍기도는 휙 돌아서 그래도 자리를 빠져나갔다.
“민팀장님?”
“네? 아! 네.”
잠깐 넋을 잃고 있던 민형기가 굼뜨게 반응했다.
“일단 말씀하신 문제는 해결된 것 같은데, 이제 뭐가 더 남았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저희 법무팀에서 처리할 일들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법원에 출석하시는 일을 제외하면 이 일로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것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이미 자료들은 넘겨 받은 상황에서 표세인이 숙지할 상황이나 주의점 등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이 목적이었던 자리였다.
잠깐 홍기도는 찾으러 나간 사이에 표세인은 자료들을 대충 숙지했으니, 나머지는 법무팀에서 철리 할 일들 뿐이었다.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형기는 표세인과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이었다.
주로 사업부 쪽의 일을 돕기 때문에 조연아와는 자주 마주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표세인이 범무팀의 지원을 받아야할만한 일들에 대해서는 양성태나 제임스에게 떠맡겨온 탓에 더더욱 기회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같은 건물에서 지내는 동료면서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가급적 법무팀과 마주치지 않고 회사 생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요즘 보니 오히려 법무팀 분들을 자주 뵈어야 승진할 수 있다는 느낌인데 말이죠.”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워낙 독특한 파트다 보니 게임 개발사에서 법무팀과 마주치는 일은 사업부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대형 계약을 체결하거나 게임이 해외에 출시 되는 등의 큰 이슈는 반드시 법무팀을 거쳐가기 마련이었다.
“대표님께 그런 말씀을 듣게 되니, 기쁩니다.”
법무팀은 업무의 특성상 같은 회사에 재직하면서도 다른 부서와 동료 의식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이것은 개발자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렇게 법무팀의 위신을 세워주는 말을 듣게 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하자. 표세인 대표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해내보자.’
민형기는 그렇게 다짐하며 법무팀으로 돌아왔다.
“왔어?”
“네. 부장님 다녀왔습니다.”
“너 빨리 회장실로 올라가.”
“네?”
“회장님 호출이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호출.
민형기는 영문도 모른 채로 회장실로 향했다.
“민형기입니다.”
“들어오세요.”
회장실 안으로 들어온 순간 민형기는 순간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로 공기가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조연아와는 여러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주 마주했었다.
언제나 진취적이고 감정의 동요가 없는 깔끔한 커리어우먼 같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달랐다.
‘뭐지?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우시지?’
민형기는 의아했다.
“지금 표세인 대표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법정 공방에 돌입하기 전에 여러 가지 주의점과 체크 포인트를 전달해드렸습니다.”
“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다름 아닌 맥베스의 대표가 직접 법정에 나서는 사안입니다.”
뻔한 사실을 왜 굳이 언급하는 것일까? 잘해야 하는 것 쯤은 알고 있다.
게다가 짧은 만남이었지만 표세인 대표에게는 묘한 친근감도 들었기에 더욱 열정이 타올랐다.
홍기도와도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부터, 자신에게도 훈훈한 덕담을 던지는 것 까지.
뭐하나 호감 가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평소 보다도 더욱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세인은 자신의 목표가 게임개발물관리위원회의 폐지라는 것을 민형기에게 말하지 않았다.
법적공방은 어디까지나 요식 행위이며 애꿎은 여의도의 정치인들이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도록, 여론에게 동정심을 사도록 만드는 방어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연아는 달랐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의 연인의 일이었다.
그가 바라는 게임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쓸데없는 문제로 표세인을 귀찮게 한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
“이번 사건 어디까지 보고 계십니까.”
“예?”
“형량은 얼마나 나올까요?”
“뇌물 수수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법이 웃긴 것이 아직 뇌물이 오간 것은 아니라서 크게는…….”
“민형기 팀장님.”
“네.”
조연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민형기는 마치 뱀 앞에선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민형기 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맥베스에 어떠한 불건전한 접근도 용인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설마 회장의 의지가 이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민형기는 당황했다.
“다시 묻지요. 집행유예 따위는 안됩니다. 국민재판으로 끌고 가세요. 그렇게 해서 최고 형량을 받아 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법무팀이 지닌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서 판사님과 자리도 마련해주세요.”
“그건 너무 위험한 계획입니다.”
판사에게 청탁을 넣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범법 행위를 공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배심원의 판결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도록 당부드리는 정도면 됩니다.”
“배심원단의 판결을 믿으십니까?”
근래 이 사건 관련으로 여론이 들끓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사회적 물의라고 할 정도까지는 번진 것이 아니었다.
“민형기 팀장도 곧 알게 됩니다. 우리 표세인 대표가 일처리 하는 방식에 대해서…….”
“?”
“큰 파도가 올 겁니다. 어렵지 않을 거예요. 판사쪽도 여론의 뭇매를 맞아가면서 까지 대세를 거스르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준비만 철저히 하면 됩니다.”
조연아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커다란 파도가 온다.
김득주 의원 같은 인물이 매스컴에서 날뛰기 시작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게다가 표세인은 이미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천억이라는 돈을 자선 기금으로 내놓겠노라 천명했다.
뒷돈을 요구 받은 대기업 대표가 불의에 맞서고는 오히려 훨씬 더 큰 돈을 자선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런데 그 대표가 근래 TV등에 출연하며 이미지까지 만들어 놓은 인물이다?
아마 자신들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방송 삼사를 필두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김득주 의원만이 아니라, 이 기회에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여의도의 정치꾼들 역시 앞다투어 수저를 얹으려 난리 칠 것이다.
“다시 묻겠습니다. 최대 형량은?”
조연아의 질문에 민형기는 이번 사건이 맥베스에 입사한 이래, 자신의 최대 사건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애사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