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미국 출장 당일.
이번에는 제법 출장 인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많은 인원들이 모여있었다.
맥베스 쪽 인원으로는 나와 홍기도 그리고 법무팀의 민팀장이 함께였다.
연아는 지난 법적공방 사태 이후로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항상 법무팀과 동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지나친 과보호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연아의 걱정을 무시하면서 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따랐다.
“민팀장님.”
“네.”
“혹시 미국에 처음 가십니까?”
“네? 아닙니다.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난 얼굴이십니까.”
“이런, 그렇게 티났습니까?”
“네. 혹시 결혼?”
“저 이미 결혼했습니다. 사실은 대표님 덕분에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긴 덕분이지요.”
“제 덕분?”
“정확히는 회장님이 주셨지만……. 어쨌든 대표님 관련이지 않습니까.”
역시 회사원을 춤추게 하는 것은 승진과 보너스다.
어떤 이유로 건 곁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싱글벙글한 모습은 무척 보기 좋다.
“하하하. 짠돌이인 네 녀석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냐? 제수씨는 이래도 괜찮대?”
조팀장과 백용현은 갑자기 자신들의 비행기표를 자신의 사비로 업그레이드 하겠다는 이걸영의 말에 껄껄 웃고 있었다.
“그냥,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걸영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입맛이 무척 씁쓸할 것이다.
첫판에 패배했을 때, 그냥 물러섰더라면 자신의 비행기표만 감당하면 되었을 텐데…….
묻고 따블로가!
라는 희대의 명언을 연거푸 외친 덕분에 이걸영은 마굴팀 전원의 비행기표를 담당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눈물겨운 애사심이네요. 거의 우실 것 같죠?”
“그러게.”
“그래도 안 봐주실 거잖아요?”
“에이, 내기도 일종의 시합인데 봐주면 안 되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게임으로 내기를 했습니다.”
나는 조팀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으음……. 저 녀석 배포에 이 정도 내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네가 키웠냐?”
“설마요. 그냥 첫판에서 물러나셨다면 좋았을 것을 계속 팀원 한 명 씩 늘려가시면서 내기를 키우시더라고요.”
내 말에 조팀장은 턱을 쓸었다.
“계속 도전했다……. 네가 그런 마음이 들도록 적당히 빈틈을 보이면서 유도한 것은 아니고?”
“하하하. 글쎄요?”
“지, 진짜 마왕이셨어요?”
“그랬으면 블랙인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지 않았을까?”
“현실과 장난은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블랙이니 뭐니 하면서 장난치는 녀석에게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니…….
“저 녀석 게임 잘하는 걸 몰랐나?”
“그래도 처음이니 제가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분명 조금만 더하면……. 아니, 분명히 나중에 한번 더하면 승산이…….”
“너는 절대로 도박 같은 것 하지 마라.”
조팀장은 아직도 승부욕을 불태우는 이걸영에게 조언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비행기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모두 비행기에 탑승했다.
*
*
*
E3.
매년 6월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최고의 게임 쇼.
Electronic Entertainment Expo.
전자오락 박람회라는 다소 특색 없는 이름이지만, 우연히 E가 3개나 들어가는 덕분에 E3로 통하게 되었다.
독일의 게임스컴, 일본의 도쿄 게임쇼와 함께 세계 3대 게임쇼 중 하나로 통하는 E3지만 규모와 유명세로 논하자면 여지 없이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행사로 여겨지는 행사다.
재미있는 것은 2018년 기준 참가 인원은 85,000명 수준으로, 일반 참가권 15,000명과 B2B 인원의 초청장 10,000장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60,000명 정도가 참가하는 셈인데, 이것은 의외로 브라질 게임쇼(33만 명), 차이나조이(32만), 파리 게임 위크(32만 명)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인원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E3가 기본적으로는 B2B(기업대기업)을 지향하는 게임쇼였기 때문으로, 2017년 이전까지는 티켓수량도 한정적인데다 가격이 자그마치 한화 120만원이라는 굉장한 가격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계 3대 게임쇼라는 아성에 걸맞게 전세계에 이름난 게임업체들은 빠짐없이 참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사의 신작 게임 정보나, 차세대 콘솔 등에 대한 정보도 E3를 통해 첫선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게임 개발사 입장에서는 E3에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다.
공항에 내려 곧장 버스를 통해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로 안내된 우리는 시작부터 예상을 한참 초월해버린 게임쇼의 규모에 놀라버렸다.
“와, 정말 굉장하네.”
인근 빌딩 세 개를 덮어버린 신작 게임 출시 벽화를 전시를 시작으로 주변이 온통 게임관련 현수막과 전광판으로 가득했다.
“대표님도 E3는 처음이시죠?”
“그렇지. 정말 굉장하네.”
맥베스에 입사한 이래 미국 출장은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이런 식으로 예상 밖의 스케일에 놀란 것은 처음이었다.
인근 빌딩숲 전체가 오직 게임을 어필하기 위해 단장을 끝낸 것처럼 형형색색의 벽화와 현수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광경은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이 어려울 정도라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미군 홍보용 게임인 아메리카스 아미 같은 경우에는 진짜 미군들이 출동해서 주차장에는 장갑차를 전시하고 게임쇼장 옥상에서 지상까지 레펠 시범을 보였대요.”
“정말 어마어마 하구나.”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모병제 국가인 덕분에 홍보에 각별히 공을 들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육군에서 개발한 게임을 홍보하기 위해 그런 기상천외한 퍼포먼스까지 선보이다니!
역시 미국이란 나라의 스케일은 굉장하다.
“오셨군요!”
“아! 아나!”
미국지부의 아나 알론소가 우리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정말 반가워요. 보스.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기둥 소프트 직원분들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조양길 팀장님과 팀원들입니다.”
“반갑습니다. 아나 알론소에요.”
“반갑네.”
아나는 미국 사람 답게 마굴팀원들의 범상치 않은 연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만약 두 사람이 조금만 일찍 만났다면 다른 것을 신경 써야겠지만, 굳이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숙소를 안내해드리죠.”
“고맙습니다.”
이번 E3 행사는 기본적으로 맥베스 미국지부에서 담당하며 나는 그저 기본적인 인사와 진행 정도만이 담당이었다.
덕분에 호텔 섭외부터 기타 일정 전반을 아나가 담당해주었다.
“일단 기본적인 것들만 확인시켜 드리자면 우리의 순서는 우리는 2일 차에 배정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순서는 혹시 마지막이 좋습니까?”
내 질문에 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렇습니다. 물론 1일 차와 2일 차에도 기대작들이 소개되기는 하지만 역시 피날레를 장식할만한 역대급 작품들은 3일차 막바지에 배치되는 법이죠.”
“그렇군요.”
“가끔은 막바지에 베일에 가려져 있던 최고의 기대작 프로모션 영상이 깜짝 등장을 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맥베스가 지금까지 AAA급 게임을 개발한적 없다는 전례를 비춰볼 때, 2일차 대미를 장식할 자리를 배정 받았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네티즌들도 우리 게임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고요.”
스파이스는 한국 보다는 미국 시장에 알음알음 홍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AAA급 게임부터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유럽 시장의 판매량이 절대적인 지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열기가 굉장하군요. 오면서 빌딩 전체를 가린 벽화와 현수막들을 봤습니다. 정말 장관이에요. 사실 이런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도…….”
“네?”
“아니, 우리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내 말에 아나가 깔깔 웃었다.
“대표님은 주로 개발에만 전념한다고 하시더니, 그게 정말이었나 보군요?”
“맞는 말인데,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마침 잘됐네요.”
아나는 커튼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빌딩 한쪽을 완전히 도배한 우주선들과 황량한 행성 위에 더스트 슈트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드러났다.
그것은 틀림 없는 스파이스 게임 홍보 이미지였다.
“우리가 명성은 좀 부족하다고는 해도 자본력이 없는 회사는 아니잖아요?”
“암암, 그렇고 말고.”
조팀장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팀원들 역시 표정이 활짝 폈다.
오직 백용현만이 다소 찝찝한 표정으로 맥슨도 얼마 후엔……. 이라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정말 멋집니다.”
세계 최대의 게임쇼가 열리는 게임의 성지 한가운데에 내가 개발하는 게임의 벽화가 이렇게나 크게 걸려있다니…….
홍보는 단순한 자본력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별 볼일 없는 중소 개발사에서 빌빌 대던 나라는 녀석이 만든 게임이 정말로 이런 대우를 받고 있단 것은 정말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지금까지 오면서 보신 것은 컨벤션 센터의 사이드에요. 저 빌딩이 바로 메인뷰죠. 그 말은 바로 우리가 가장 좋은 위치를 확보했다는 거에요.”
“홍보비가 만만치 않았겠군요.”
“글쎄요. 제가 듣기로는 본사 회장님께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셨다고 들었어요. 특히 전무님? 그분이 얼마 전 직접 미국까지 방문해서 홍보비 아낄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가셨다던데요?”
세상에! 내가 법적공방과 개발 일에 치여서 정신이 없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전무님이 미국 출장까지 가셨던 것도 몰랐다니!
역시 우리 황금 고……. 아니지, 고전무님께는 언제나 감사하다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연아에게 감사해야겠지.
물론 기본적으로는 회사 일이다. 하지만 직접 듣지 않아도 이것은 연아가 나에게 보내는 축하 선물 같은 개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애썼어.’ 라고 연아가 나에게 미소 지으며 칭찬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좋아! 힘 나는데?”
“힘은 언제나 넘치시는 분 아니신가요?”
홍기도의 까불거림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웃으면서 어깨 마사지 시작!
“끄악!”
한번 살짝 ‘찝’어주고 있는데 그사이 조팀장이 아나에게 질문했다.
“스파이스는 그렇다 치고 기둥소프트 신작은 머신라이더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마굴팀의 메카닉 게임의 명칭은 머신라이더로 정해졌다.
조팀장의 질문에 아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그건 첫째 날입니다.”
“뭐야! 차별이야?”
“너무 한 것 아닌가?”
순간 이걸영과 함성준이 나에게 한마디 씩 내던졌다.
아니,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번 일은 제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대표로써 더 신경 쓰지 못한 것은 미안하지만…….
“기둥소프트도 나름 깨비몬으로 유명세를 날렸는데, 우리는 부족하다 이건가?”
“아니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반대?”
“애초에 주최측에서는 똑같이 2일차 마지막인 스파이스 바로 앞에 배치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었는데, 우리가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뭐야? 견제야?”
“실로 마왕군 다운 술책이구나!”
“마왕?”
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냥 씁쓸한 표정으로 대충 넘어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미국까지 와서 마왕 운운하실 줄이야.
“그게 아니라, 일론 머스크의 요청 때문입니다. 그에게 프레젠테이션 진행을 부탁하셨잖습니까? 그래서 그가 요구한 것입니다. 첫째 날. 그것도 가장 첫 번째 순서. 사실 이것도 나름 굉장히 좋은 자리에요.”
“잠깐만! 설마 이거?”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스파이스 홍보에도 일론 머스크가 등판할 예정인데, 첫날 일론 머스크 등장 이슈를 머신 라이더가 선점해버리면…….
“크하하하! 어떠냐! 한방 먹었지? 이것은 시작해 불과하다!”
갑자기 훌쩍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아난 홍기도 녀석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흐흐흐. 그래. 나쁘지 않군.”
“좋아. 원래 피날레와 개막식이 중요한 법이지.”
“2일차 어중간해. 그럼 묻히기 쉬워.”
여러분…….
기분 좋은 것은 이해하겠는데, 우리 같은 편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와장창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