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파스텔톤이 인상적인 카툰랜더링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자연 경관.
그 위를 내달리는 엘프 소년이 있었다.
요즘 시대에 첨단을 달리는 사실적 그래픽이 아니더라도…….
최신 물리 엔진을 이용해 놀라운 퍼포먼스를 곁들이지 않더라도…….
그저 마음이 따듯해지는 풍경을 내달리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모두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마법.
그렇다.
이것은 마법이다.
“미치겠다.”
“왜 그러세요?”
“너무 좋아서.”
대형 스크린에서 나타나는 전설의 링크 프로모션 영상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만든다.
게임이라는 것도 결국 놀이의 하나.
놀이의 즐거움이라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 바로 텐도 버튼의 철학이었다.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요소는 일절 배제하고 아이들과 가족들의 놀이 도구라는 컨셉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결과.
도저히 그 전신이 도박용 카드패를 만들던 회사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화면이 전환되고 하늘 위에서 추락하는 엘프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글라이더를 타고 유유히 허공을 날거나, 벽을 뚫고 이동하는 새로운 기믹들이 연이어 이어질 때마다 객석은 부드러운 전율에 휩싸였다.
단순히 필드를 내달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 뿐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파스텔톤의 랜더링 세계 위로 부드럽게 내리쬐는 밝은 햇볕 만으로도 게이머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정말로 마법 같다.
“아주 넋이 나갔구만. 도전자가 챔피언에게 그렇게 감동하면 제대로 시합이 되겠나?”
조팀장의 말에 나는 멋쩍게 미소지었지만, 내 눈을 여전히 스크린에 고정된 상황이었다.
카메라가 바뀌며 소년의 배후 앵글을 잡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려한 새로운 기믹들.
단순히 전투 스킬이 아니라. 이 세계를 탐험하고 즐기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새로운 기믹에 다시 한번 조용한 감동이 객석을 뒤덮었다.
“저 벽을 뚫는 기믹은 놀랍네요. 저거 어떻게 코드를 짠 걸까요?”
“이렇게만 봐서는 각이 안 나오는데……. 오브젝트 자체에 충돌 박스부터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계한 것이 아닐까?”
함성준과 이영걸도 새롭게 등장한 기믹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억지로 가슴을 뛰게 하는 웅장한 사운드와 눈 돌아가게 화려한 연출도 없이.
그저 모두를 홀려버리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
마지막으로 화면이 암전되며 Coming Soon이라는 문구가 떠오르는 순간 지켜보던 모두는 그저 마법이 끝났음을 아쉬워했다.
-짝짝짝짝.
영상과 마찬가지로 과격한 환호성 없이 모두가 벅찬 감동을 억누르며 찬사를 쏟아낸다.
이 요란하지 않은 찬사 속에는 짙은 존경과 애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후 천천히 게임의 신이라 불리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나모토 시게오.
게임의 신.
업계 최초의 스타 개발자.
기획자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역할을 정립한 남자.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나를 비롯한 수많은 기획자들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전설의 링크. 프로모션 영상을 시청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일론 머스크나 로버트 다우닝 주니어 등을 기용해 분위기를 열광에 몰아 넣은 우리의 게임쇼 쪽의 분위기가 더 폭발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남자,
미나모토 시게오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광대놀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구만…….”
“부럽다고요?”
“그래. 부러울 수 밖에.”
내 질문에 조팀장은 물론 백용현까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명색이 개발자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개발한 게임들이 유저들에게 이만한 존경을 받은 적은 없지.”
“솔직히 비교도 할 수 없지. 스스로가 그저 장사치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군.”
자본주의적 이념에 비춰볼 때, 조팀장과 백용현은 분명 미나모토 시게오 보다 훨씬 성공한 이들이다.
그러나 수조원에 달하는 개인 자산을 손에 쥔 그들 조차 부끄러움을 지울 수 없는 것이 바로 미나모토 시게오라는 남자가 지닌 후광일 것이다.
미나모토의 개발철학은 남다른 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최고의 원동력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게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양한 대답이 돌아 올 것이다.
감동적인 스토리 라인.
눈을 매혹하는 아름다운 그래픽.
박진감 넘치는 전투 시스템.
그러나 미나모토 시게오에게 그 모든 것은 그저 부수적인 요소들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 플레이 우선 주의.
그는 언제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모험과 탐구. 간편한 조작성과 최소한의 인터페이스를 앞세워 직관성을 극대화 한다.
그리고 유저들 스스로가 ‘이건 이렇게 하면 되려나?’, ‘이게 되나?’, ‘이것도 되나?’ 하는 식으로 개발자가 완벽하게 틀을 짠 가이드라인이 아닌, 유저 스스로가 자신만의 플레이 경험을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덕분에 그의 철학을 구현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컨트롤러다.
그는 새로운 경험 전달을 위한 매개체로 언제나 새로운 방식의 컨트롤러 개발에 집중했다.
유저들은 그가 고안한 새로운 방식의 컨트롤러를 이용하여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을 하나씩 완성해 가는 것이다.
확고한 자기 철학과 완벽주의는 그가 속한 텐도 버튼에도 정확히 적용되어 그 회사의 개발속도는 빈말로도 빠르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제나 그가 말하는 ‘만인을 위한 게임’, ‘모두가 저마다의 만족감을 얻는 게임’이라는 대의 명제를 철저하게 완성한다.
“이번 게임쇼는 여러모로 볼거리가 풍부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어제까지 맥베스와 기둥소프트라는 회사의 쇼케이스를 관람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미나모토 시게오의 말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들의 쇼케이스에서 다른 회사를 언급하다니?
과거 쇼케이스에서 검과 방패를 들고 퍼포먼스를 펼쳤을 정도의 쇼맨쉽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유명했지만, 이건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내가 잘못들은 건가? 우리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저도 들었으니까요.”
“우리가 단체로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니겠지?”
“우리같은 늙은이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표세인 대표를 보라고 저 친구도 놀란 표정이잖나.”
마굴팀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도저히 맥베스와 기둥소프트를 언급한 미나모토 시게오의 의도가 궁금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두 회사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으로 귀결되더군요.”
“!”
이, 이번에는 나?
지금 나를 언급한다고?
“표세인.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천재 개발자. 여러분도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어제 멋진 플레이로 일론 머스크를 격파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일론 머스크에게 동정심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나모토의 작은 유머에 객석에 한바탕 웃음 꽃이 폈다.
“사실 오늘은 전설의 링크 영상만 덜렁 던져 놓고 객석에 꼭꼭 숨어 있을 계획이었습니다. 요즘 텐도 박스의 서비스 정신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제가 나서서 뭔가를 하는 것을 체면이 깎인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통역가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체면이 깎인다는 부분이 어려웠던 모양. 나도 이것을 홍기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수치스럽다라고 통역하다니, 저 통역가는 좀 당황한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중의적인 표현들은 통역이 어렵지.”
“뭐 그렇긴하죠.”
생각해보면 홍기도 이 녀석은 통역도 참 잘한다. 가끔 잊게 되지만 역시나 엘리트는 엘리트라는 느낌.
“하지만 어제 맥베스와 기둥소프트의 쇼케이스를 관람하고는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축제에서 체면 따위에 연연해서는 안되니까요. 그래서 주최 측에 특별히 요청해서 시간을 따로 배정 받았습니다. 저는 한 10분 정도면 된다고 했는데, 얼마든지 시간을 써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하하하! 역시 E3 주최자분들의 배포는 놀랍습니다. 즐길 줄 아시는 분들이신 거죠.”
따로 시간을 배정 받았다는 말에 나를 포함한 객석의 모두의 시선에 기대감이 서렸다.
과연 게임의 신은 어떠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실 것인가?
“이 곳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맥베스의 표세인 CEO. 괜찮으시다면 짧은 담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너 지금 똑바로 통역한거냐?”
“보면 모르세요? 지금 정확히 대표님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미나모토 시게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 거절하시는 건가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하하하.”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는 미나모토 시게오를 보자,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이머들의 축제인 E3를 망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게임의 신이 나를 직접 호명한 것부터가 너무나도 감동스럽기도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
나는 혼란과 감동이 반반씩 혼재된 복잡한 심정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
“여러분 갑작스러운 요청을 수락해주신 표세인 CEO를 위해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마나모토 시게오는 마치 능숙한 사회자처럼 관객석을 지휘했다.
덕분에 나는 힘찬 박수를 보내는 객석을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한 진행 요원이 급히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어제에 이어 또 한 번 이렇게 무대에 오르게 된 맥베스의 대표 표세인입니다. 기대작 게임 소식도 없이 이렇게 올라오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쿨런2를 주면 돼!”
“일론 머스크 대신 나와 붙어줘요!”
많은 외침 중에서 몇 가지는 나도 대충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었다.
“반갑습니다. 사실 저는 제법 오래전부터 당신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미나모토 시게오의 통역사는 젊은 일본인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한국어도 곧잘했다.
“일단 뜸을 들이면서 대화하기에는 다른 분들이 너무 지루해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로 용건을 꺼내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물론입니다.”
“저는 깨비몬 출시 당시부터 당신을 주목했습니다.”
흐음…….
역시 깨비몬이 언급되었다.
텐도 박스의 최대 타이틀 중에 하나인 소켓몬을 밴치마킹해 제작했던 깨비몬이다.
당연히 미나모토 시게오가 주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소켓몬류의 게임들은 많았지만, 깨비몬 만큼 명쾌하게 새로운 몬스터 수집 게임의 지평을 연 게임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몬스터가 도구가 된다니……. 정말 멋진 아이디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에도 츠쿠모가미라는 요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보다 먼저 이러한 아이디어를 한국에서 떠올릴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의 도깨비라는 요괴도 비슷한 설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 그거 제가 말하려고 했는데…….”
“이런, 죄송합니다.”
우리는 서로 짧게 웃었다.
“어쨌든 깨비몬을 시작으로 굉장히 다양한 게임들을 개발하시더군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스파이스라는 원작 영화가 있는 작품을 게임화하신 것 같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평소 영화 같은 게임류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네. 저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머릿속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럼 이 자리를 빌어 저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군요.”
“가르침이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도전장이 왜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