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어? 팀장님?”
양성태와 함께 호텔로 향하기 위해 회사 정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정문 앞에 모여있던 마굴팀원들이 보였다.
정확히는 조팀장과 함성준, 이걸영이었다.
“그래. 지금 나가나?”
“네. 지금 쉬린칭과 쉬융레이와 식사하려고요.”
“우리도 그리로 가는 길이다.”
“네?”
“뭘 그리 놀라냐. 애초에 그 꽌시가 누구에게서 출발한 것인지 잊은 거냐?”
“아아! 그랬었죠.”
애초에 우리 회사 최고 중국통인 함성준이 전무 시절에 이뤄낸 최대의 쾌거가 바로 쉬린칭 가문과의 연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애초에 쉬융레이가 국장이던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이라고 했었다.
당연히 함성준이 마중을 나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이것이 회사 업무라기 보다도 쉬린칭의 부탁에서부터 출발한 일종의 인맥 관계에 의한 부탁이라는 점이 컸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잊었습니다.”
“뭐 기억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 어차피 쉬린칭으로 이어지는 꽌시 부분에서는 자네가 잘 다독인 관계이기도 하고…….”
“에이, 먼저 깔아주신 레일이 아니었다면 아예 시도도 못했을 텐데요.”
“허허, 기분은 나쁘지 않은 말이군. 어쨌든 가자고.”
우리는 각자 준비한 차에 나눠타고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호텔의 프라이빗 룸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홍기도가 우리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정중하고 담백한 태도였다. 일반적으로 본인 보다 높은 직급의 상사들을 맞이하는 만큼 샐러리맨이라면 당연한 태도였지만, 그것이 홍기도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우리가 많이 늦었나?”
“아니죠. 오히려 저희 쪽에서 늦은 거죠.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뭔가 홍기도가 쉬린칭 쪽 사람의 입장에서 대변하니까, 무척 어색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어찌보면 지금의 홍기도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대표님.”
“응.”
“그거 가져오셨죠?”
“아! 어.”
혹시 몰라서 진짜로 준비해오긴 했다. 나는 사무용 토트백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진짜 사용할 거냐?”
나는 지금까지 홍기도에게 보낸적 없는 순도 100% 진지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대표님.”
“응?”
“제가 지금 엄살부린다고 생각하시죠?”
“……일단 화장실로 가자. 너 기저귀 채우는 동안 나는 소화제라도 먹어야겠다.”
“청심환 상비하시잖아요. 그쵸?”
“그, 그것까지 필요해?”
“미리 드셔두세요. 저 주방장이랑 대화하는 것 옆에서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 불법적인 것은 아니지?”
“법이란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인 법이죠.”
“그거야 그렇지.”
애초에 법이라는 것이 의외로 두루뭉술한 경우가 많다.
모든 상황을 게임에서처럼 철저히 예외 처리를 한다고 해도, 아니 그렇게 꼼꼼하게 처리해도 결국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 같은 게이머들은 꼼수나 버그를 발견하는 것처럼, 법은 그 이상으로 허술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위장약하고 청심환 같이 먹어도 되는 거겠지?”
“보통 병원 약에도 위장약 첨부되어있지 않나요?”
“내가 약을 별로 가까이하고 살지 않아서.”
“운동하면 병도 안 걸리나요?”
“뭐 몸 관리 못하면 선수 생활도 못하니까? 사실 이런 것도 재능의 일부라는 말도 있을 정도지.”
나는 청심환과 소화제를 먹으면서 대꾸했다.
“자, 그럼 나는 준비 끝났다.”
“저도 끝났습니다.”
“너 이번에는 진지한 사위 모드지?”
“네. 저 절박합니다.”
“그 정도야? 널 안 좋아하셔?”
“반대죠.”
“반대?”
“너무 좋아하셔서 그걸 깨트리고 싶지 않거든요. 애초에 절 좋아하시는 이유 자체가 쉬린칭이 택한 남자라는 이유 하나거든요. 그만큼 쉬린칭을 끔찍하게 아끼시니까. 그 기대에 어긋나고 싶지 않네요.”
흠,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대견한 소리를 하다니…….
이러면 나도 힘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지금 당면한 우리의 목표는 완식이겠구나.”
“그렇죠.”
누군가의 위장을 채우는 것으로 본인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부류가 있다.
대강 듣기로 쉬린칭의 아버지인 쉬융레이도 딱 그런 타입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이 악물고 먹어 치워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거라면 나도 나름은 자신이 있다.
“그래도 중식 코스라니……. 이건 만만치는 않겠네.”
은근히 중식이 많이 먹기에 좋은 식단이 아니다.
기름지고 맛이 진한 음식들이 대부분이라서 예상 외로 잘 안 들어간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어차피 너와의 관계를 배제하더라도 회사의 VVIP잖아. 업무까지 연관된 일을 한큐에 해결하게 된 셈이니, 차라리 좋지.”
어차피 쉬융레이는 홍기도와의 관계가 없었더라도 대표 입장에서 극진히 접대해야할 상대였다.
여기에 홍기도 녀석을 위한다는 명목까지 더해지면 차라리 의욕까지 생길 정도다.
“그런데 이러면 마굴팀원들이 합류한 것이 오히려 걱정이네.”
“그렇죠. 아무래도 노인분들이시라 많이 못드실 텐데요.”
기름지고 간이 센 음식은 연로한 분들에게는 다소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총 3명이나 더 추가가 된 상황. 이럴 줄 알았다면 양성태를 부르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쉬융레이 입장에서 나이에 맞춰서 음식량을 조절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파이팅이다.”
“네.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따라 홍기도 녀석이 말투와 눈빛이 다르다.
절로 기합이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뵙겠습니다. 맥베스의 대표인 표세인입니다.”
“하하하. 듣던대로 훤칠하시고 인물이 좋으시군요. 쉬융레이입니다.”
쉬융레이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고 나는 키 차이 때문에 살짝 몸을 숙이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나까지 자리를 잡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함전무님은 정말로 오랜만이군요.”
“하하하, 이제는 전무가 아닙니다. 일개 사원이 되었지요.”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예전부터 그 정력적인 모습을 높게 샀었습니다만,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정정하시다니요. 저는 이제 완전히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만…….”
“하하하, 무슨 엄살이십니까. 그리고 이제 곧 진짜 할아버지가 되실텐데요.”
“그렇지요. 부디 우리 사위가 잘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쉬융레이는 함께 앉은 쉬린칭과 홍기도를 슬쩍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쉬린칭은 살짝 부끄럽다는 듯이 살짝 눈을 내리고 있었고 홍기도는 싱긋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홍기도만이 아니라 쉬린칭까지도 오늘 따라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정말로 업무 관계가 아닌 상견례 자리에 초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준비는 잘 하셨습니까?”
양성태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일단 먹기는 했는데, 부사장님은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양성태에게까지 완식 멤버로서의 할당량을 부탁할 수는 없기에 화장실도 함께 가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아예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나는 질문했다.
그러자 양성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미 며칠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요?”
“이래봬도 비서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회장님을 대신해서 비교적 젊은 제가 먹성을 드러내며 대접하는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조차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데, 확실히 비서는 만만치 않은 직군이라는 느낌이다.
매사 하나하나가 바둑이라도 두는 것처럼 모든 수를 고려하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역시 부사장님이십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주세요. 부사장님께서 탈이라도 나신다면…….”
“솔직히 그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지만, 그래도 오늘 대표님께서는 그러실 수 없으시겠지요.”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한몫 거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거 믿음직하네요.”
하지만 과연 우리 회사 최고의 슈트핏을 자랑하는 양성태가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함전무님께 들은 내용대로 여러분들의 컨디션에 맞춰서 준비하기는 했지만, 부디 입에 맞으시길 바랍니다. 가급적 정력에 좋은 것들로 준비했으니, 너무 타박하지 않고 맛이라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인도 중국과 똑같습니다. 정력에 좋다고 하면 신발이라도 뜯어먹는 습성이 있지요.”
“하하하! 그렇군요.”
국내에서는 한국인이 정력에 좋다면 무엇이든 먹어 치운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중국과 동남아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다.
독특한 짐승만이 아니라 벌레나 흙까지 퍼먹을 정도로 그것에 진심인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한국인들의 취향은 솔직히 점잖은 편이 아니겠나?
“아, 들어오는군요.”
내가 중식 코스요리에 익숙한 편은 아니지만, 대표가 되고서 몇 번 정도 경험해보았다.
그래서 소채 정도는 대동소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규모부터가 달랐다.
가볍게 볶고 대친 죽순과 생목이버섯, 파바빈 볶음, 스노우피, 양송이, 당근 볶음, 말린두부, 땅콩, 고수무침, 다시마, 무조림까지.
하나씩 일일이 짚어가며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소채가 긴 테이블에 한가득 놓아졌다.
“하나, 하나 제가 중국에서 특별히 공수해온 최상질의 식재료들입니다. 요리는 식재가 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번 잡숴보시죠. 특히 우리 사위를 비롯해 젊은 대표님과 부대표님도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는 힘차게 대답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때는 오히려 조급해서는 안 된다.
나는 천천히 음식들을 덜어가며 천천히 음식을 곱씹었다.
가능한 남김없이 먹겠다는 것이지, 허겁지겁 배만 채울 생각은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가급적 음식의 맛을 음미해야 한다.
“흠!”
“이거 좋군요.”
“전혀 느끼하지 않은데요?”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깜짝 놀란 듯이 음식을 입에 넣기가 무섭게 고개를 치켜 들며 놀란 눈빛을 드러냈다.
이게 놀라운 것이 기본적으로 입이 짧은 조팀장 마저도 입에 맞는 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중국 음식이라도 모두가 기름지고 간이 셀 거라는 생각을 시작부터 깨부순다.
“입맛에 맛으신다니 다행이군요. 허허허.”
쉬융레이는 우리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전채에 너무 배를 채우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코스는 무려 13개나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만한전석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이곳 주방 상황으로는 거기까지는 무리라고 하더군요. 잠깐은 대여 개념으로 주방을 사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여, 열 세가지?
순간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무난히 해치울 수 있겠는데? 라고 생각했던 철없는 10초 전의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소채의 양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육류와 해산물까지 등장하기 시작하면…….
이건 세종이 녀석이 필요한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맛이 좋군요.”
-탁!
벌써 접시를 비운 양성태가 다음 접시를 채우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익숙한 일입니다.’
마법사가 정말로 오랜만에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건 뭐 소화마법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정작 이 자리의 최대 히어로는 우리가 아니었다.
이것만 끝내고 하자. 응? 응? 응?